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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211/218)

Level 29. 메인 퀘스트 :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서 (03)

아냐. 그럴 리 없다.

내 입 밖으로 낸 말을 스스로 부정했다.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늘 그랬다. 미하일을 상대로는, 정말로 나답지 않은 짓들을 자꾸만 벌이게 되고 만다.

조금 전 입술 밖으로 나온 ‘마왕’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부정하듯 다시 그를 불렀다.

“미하일.”

“응.”

이번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분명히 미하일이다.

아우라와는 상관없이,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미하일이 맞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지금의 그는 ‘마왕’이라는 단어 외에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상태였다.

***

나는 이미 마왕에게 완전히 잡아먹힌 미하일을 본 적 있었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것’은 마왕이었다. 미하일의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었지만.

본질은 우리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강림한, 멸망이 인간의 형태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인, 그런 존재.

그렇기에 고통스러웠고 힘들었지만, 결국은 이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하일은 달랐다.

마왕의 기척과 기운, 마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그런데도, 분명히 미하일이 맞았다.

검은 결계에 갇혀 내 마력이 전혀 발동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위기감보다.

이 사실이 주는 아득한 절망감이 더욱 컸다.

그때의 그는 미하일의 모습을 한 마왕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마왕의 기운을 가진 미하일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이번에는 다른 이름으로.

“마왕.”

“……아니다, 라고 부정하긴 힘드려나.”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마력을 전혀 쓸 수 없는 내가 그와 함께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나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력으로 감싸여 있을 때처럼, 아니, 달리 보면 훨씬 안락하고 안정적이다.

미하일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나는 속절없이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단단한 가슴팍이 내 얼굴에 닿고, 등줄기를 감싸오는 손길이 따듯했다.

이 사람이 여전히 미하일이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 나는 너의 미하일이 맞아. 그렇지?”

나도 그 말에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 침묵이 곧 긍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허망하게 말했다.

“소피아구나. 소피아가…… 지금까지 네 안에 숨어 있었던 거였어.”

5년 전 하스티아에서 치명상을 입었을 소피아를 계속 찾았다.

하지만 그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레비아탄을 제외한 다른 멸망의 마수들 근처에도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에릴은 그저 미끼였을 뿐이다.

많은 힘을 잃고, 마지막 기회를 노리며 소피아가 숨어 있을 만한 곳.

사실 그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다.

‘미하일의…… 안에 있던 공허한 구멍. 마왕의 그릇.’

그의 심장에 존재하는 검은 구멍.

내가 이미 몇 번이나 미하일의 상태를 살폈어도, 그 구멍 내부는 관찰할 수 없었다.

시스템 창이 멀쩡할 때도 불가능했다.

그것은 마왕이 강림했던 흔적이며, 나중에 마왕이 채워질 그릇이었으므로.

소피아는 그곳에 똬리 튼 채, 5년간 마왕 강림을 진행해 온 것이다.

몸의 주인인 미하일조차도 모르게.

“하스티아에서 소피아가 너를 잡아 놓고 레비아탄의 코어로 이용하기만 한 게 어쩐지 이상했는데……. 그래. 진짜 목적이 그게 아니었으니 당연할 수밖에.”

내 망연한 말에 대답하듯, 미하일의 몸 위로 반투명한 상태로 소피아의 모습이 피어올랐다.

소피아가 남긴 상념.

아니, 망령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까.

-빙고. 정답이에요. 안서나 씨. 좀 늦고 말았지만.

소피아 특유의, 모든 걸 비웃는 듯한 키득거림이 귀에 쟁쟁히 울렸다.

-사실 그때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당신 손으로 미하일을 죽여서, 그를 통해 완전한 마왕이 부활하실 수 있길 바랐는데…….

“실패했지.”

-그래요. 내 완패였어요.

나는 그때 소피아의 유도와 달리 미하일을 죽이지 않았다.

그건 정답이었던 셈이다.

적어도 그때는.

단지, 소피아는 두 번째, 세 번째의 방법을 남겨 두고 있었을 뿐.

-5년이 넘었으니, 꽤 오래 걸렸죠. 내 남은 모든 힘과 영혼 자체를 갈아 넣었어도, 그분의 완전한 강림은 불가능했어요.

“……불완전하다고?”

-희망을 가지고 싶은 모양이지만, 별 의미 없어요. 그리고 사실…… 이게 당신에게는 더 절망적이지 않나요?

소피아의 망령은 환하게 웃으며 미하일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감싸 안은 듯.

-전생과 달리, 지금의 이분은 마왕이지만, 동시에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이기도 하니까.

형태가 없으니 감각 역시도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미하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미하일은 손을 뻗어 소피아의 망령을 거머쥐었다. 부정의 마력으로 휩싸인 손아귀에, 소피아의 가는 목이 잡혔다.

그는 경멸 어린 눈으로 자신을 강림시킨 사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찮은 것 주제에. 그녀를 잘 안다는 것처럼 떠들지 마.”

-아아. 독점욕도 참 심하셔라. 아, 이건 혹시 미하일 본인의 성향이려나. 본래의 그분은 인격이랄 게 없는 존재니까.

콰직!

미약한 소피아의 망령은 부정의 마력 안에서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웃고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소피아는 기대와 희열에 차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너무 기대되는데……, 난 그걸 볼 수… 없겠죠……. 그때처럼……. 역시, 아쉬…….

뿌득!

흩어지는 그녀의 망령을 부정의 마력이 짓이겼다. 곧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버렸다.

“……소피아.”

그녀가 전생부터 지금까지 나를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허망한 끝이었다.

어찌 본다면 허망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놓은 덫은, 이미 나를 삼킨 채였으니.

그때, 부드럽지만 더없이 단호한 손길이 내 턱을 잡아서 돌렸다.

자신을 보라는 듯. 다른 이에게 내 시선을 빼앗기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리샤.”

“…미하일.”

“저런 것에게 네 눈길을 낭비하지 마.”

검은 태양이 지상에 내려선 듯 우리의 주변은 온통 검었다.

이건 밤이 아니었고, 안식도 아니었다.

압도적인 무게의 멸망. 그저 한번 세상을 짓누르면 그것으로 충분할 파괴와 죽음, 소멸의 힘이었다.

다만, 그것은 완전한 파멸의 직전에 멈춰 있었다.

세계 전체를 삼킨 채, 멸망의 목전에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네 눈은 나만을 담기에도 모자라.”

평소 미하일의 말투보다 조금 더 나른하고 끈적끈적한 느낌.

달콤한 단어 하나하나가 집착적으로 내 귓바퀴를 핥아 왔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가장 선뜩한 것은, 마왕임이 분명한데도, 지금의 그가 두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하일이니까.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오랫동안 가장 내밀한 곳에 숨겨 둔 욕망을 끄집어내어, 고백하는 것만 같았다.

“네가 나를 죽여 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싫었어. 죽고 싶지 않았거든.”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다 그렇지.”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행복하길 바랐지만, 내가 없어진 뒤에 혼자 남아 행복할 너를 볼 수 없을 테니까.”

“……,”

“그리고 네 주변에는 거슬리는 놈들이 늘 줄을 서 있었잖아. 내가 사라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네게 달려들 놈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전 미하일이 라이언과 코넬, 파비엘에게 보였던 적대감이 떠올랐다.

“그래서 죽고 싶지가 않았어.”

조금씩 선명해졌다.

이건 분명히 미하일이 하는 말이다. 마왕에게는 질투니 독점욕이니 하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건 소피아의 말대로 인격이 없는, 멸망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껍질을 둘러쓴 것에 불과했으므로.

“그리고 너무 기뻤어.”

“…뭐가?”

“네가 끝내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이.”

속에 가득 담긴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토해 내는 것처럼, 기쁨이 새어 나오는 듯한 미소였다.

“버리지 못한 거야.”

“더 기쁜걸. 그러면 기대해도 될까?”

그가 내 손을 가만히 잡고서, 손등에 키스했다.

어이없게도 인간의 온기가 선명했다. 입술의 감촉 역시도.

“이번에도 네가 날 선택해 줄 거라고 말이야.”

무슨 선택을 말하는 걸까.

이번에도 그는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먼저 대답했다.

“함께 있자, 리샤. 다른 것들은 모두 버리고, 우리 둘이서만. 응?”

어울리지 않게도, 그는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며 내게 매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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