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1화 (212/218)

Level 29. 메인 퀘스트 :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서 (04)

“우리…… 둘만?”

“응.”

그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귀찮은 날 파리 같은 것들이지. 그런 놈들과 네 시선, 네 목소리, 네 손, 네 시간, 네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아.”

조금 전까지는 내가 아는 안쓰럽고 다정한 미하일 그대로이다가.

순간적으로 돌변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폭력적이고 음험한 말을 내뱉는다.

이 순간은 미하일이, 내가 아는 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내 뺨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를 소중하게 보듬는 듯한 손길.

한 세상을 닫기 위해 존재하는 마왕과 같은 존재에겐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내가 낯설어? 무서워? 미하일이 아닌 것 같아?”

“조금… 낯선 건 사실이야. 하지만 무섭진 않아. 미하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안 들고.”

“역시 나의 리샤야.”

그는 내 손을 쥐고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자신을 칭찬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손에 닿는 미하일의 뺨은 선연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가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려 주는 것처럼.

지난 5년간 시체처럼 누워 있던 동안의 체온이 훨씬 낮았다.

지금 그는 눈을 뜨고 있고. 내 앞에서 말을 하고,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게 기뻤다.

마왕이 이미 강림하여 그를 변질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수하고 이기적인 기쁨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까 말했잖아? 사실 진작부터 이러고 싶었어.”

어차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건만.

“나만이 네 시선을 받고, 네 목소리를 듣고, 네 손을 잡고, 네 시간을 함께하고……, 네 마음을 독차지하고 싶었어. 계속.”

그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끔찍한 죄를 고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그런 본심을 애써 누르면서, 너를 위해, 네 행복을 위해 움직였지. 물론 그때도 진심이었지만, 그럼에도 슬펐고 또 기뻤어.”

“뭐가 기뻤다는 거야?”

“그때, 나를 죽이는 순간, 네가 울고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환생 후 다시 만난 네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라 말한 순간이.”

나도 모르게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를 독점하고 싶을 정도로 좋다면서, 나에게 미움받는 게 기쁘다니.

미하일의 농밀한 목소리가 귓전을 적셨다.

“네 증오마저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았거든.”

사랑도, 증오도. 오롯하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큰 죄와 동의어인 그의 욕망이노라고.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불완전하게 강림한 마왕은 전생과 달리 미하일을 완전히 잡아먹지 못했다.

다만, 그를 일부 물들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평소 제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들. 행동. 욕망을, 지금의 그는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미하일은 지금까지 중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게 속삭였다.

“너 외에는 전부 필요 없어. 모두 지우고, 우리 둘만 있자. 응?”

다른 모든 존재가 사라진 곳에서, 단둘뿐.

그건, 사실상 멸망의 다른 이름일 터였다.

결국,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부정할 수 없는 마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그럴 수 없어. 나는 그래서는 안 돼.”

그러자 미하일은 진심으로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는 곧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을 했다.

“아, 네 가족들이 있었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사실 네가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알아. 나는 이뤄 줄 수 있어.”

미하일은 환하게 웃더니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눈앞이 검게 물들고.

“이건 마음에 들 거야.”

그의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를 울렸다.

***

루퍼스리안은 후회했다. 나스카 성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때 움직였어야 했다. 

불길함과 불쾌감을 느끼긴 했으나, 하나뿐인 동생을 빼앗아갈 놈에 대한 분노이자 견제라고만 생각했다.

아나트리샤를 위한 중요한 날에, 그런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행사를 망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놈이 동생의 손을 잡고 허공을 다정히 산책하는 꼴을 보고도 그냥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눈앞이 온통 시커멨다. 그것만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감각이 전부 차단되어 있었다.

“젠장!”

소리를 질러도 주변에 닿는지 알 수 없었고.

손을 뻗어 봐도 닿는 감촉이 없다.

들리는 소리 역시.

당연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알았다.

‘리샤가 위험해!’

검은 구체에 잡아먹히기 직전, 그는 보았던 것이다.

동생의 손을 잡고 선 놈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사교도에게 세뇌되어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을 향해 마력탄을 날리지 않았나.

아나트리샤가 막지 않았다면 전부 죽었을 터다.

그런 말을 하는 놈들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에야, 루퍼스리안도 동의했다.

하지만 적어도 리샤의 책봉일에, 그것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는 알았다.

하더라도 보는 눈이 없는 뒤에서 하지.

명백히 아까의 미하일은 비정상적인 상태였다.

게다가.

‘분명히 부정의 마력이었어. 아니, 그 수준이 아니라…… 마왕 그 자체…….’

루퍼스리안은 동생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왕을 직접 목도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선명하게 알 수밖에 없었다.

그 힘은, 마왕의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종류였다.

역시 그때 미리 죽였어야 했나. 이렇게 되기 전에.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저앉아 후회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동생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구해 내야 했다. 도움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것도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곁에서…….’

이 마음만은 다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누구도 포기하지 않은 채 노력하고 있으리라.

루퍼스리안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

“어?”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나는 낯선 곳에 서 있었다.

아니, 낯설지는 않았다.

발아래 펼쳐진 금이 간 아스팔트 도로. 고생물의 뼈처럼 드러난 교각. 

황폐한 현대 문명의 흔적들. 그 화석 같은 도시의 뼈대 위로 화려한 조명이 빛나고 있었다.

몬스터가 몰려들어도 사람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저 빛은 바로 그 증거였다. 그래서, 그녀는, 안서나는 늘 높은 곳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뭐지?”

조금 전까지 그녀는 분명히……?

그때 등 뒤에서 머리꼭지를 잡아당기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서나야.”

고개를 돌리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미하일…….”

숨 쉬는 공기마저 위화감이 어려 있건만. 그의 얼굴과, 그의 시선, 그의 목소리, 그의 이름만은 익숙했다.

“또 여기서 혼자 야경 보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자연스레 대답했고 미하일은 푸스스 웃었다.

내게 내미는 손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손길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손을 잡은 채, 우리는 폐쇄된 고층 빌딩의 잔해에서 내려왔다.

가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나야!”

“어디 갔었던 거야?”

“아, 미하일이 찾아왔구나. 다행이야.”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옷차림은 더러웠다. 조금 전까지 전투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빠는 서른 살일 때의 모습이었고.

부모님은 나와 오빠의 나이에 맞추어 나이를 든 모습이었다. 

머리가 금색이나 은색이 아니고, 눈 색 역시 평범한 한국인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아빠가 내가 열두 살 때 전사하지 않은, 엄마가 마왕 소환 3년 전에 전사하지 않은.

우리 가족이 온전하게 나이 든, 그런 풍경.

전생에도, 현생에도 존재한 적 없는.

나는 가슴께가 콱 틀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옆에서 미하일이 선하게 웃으며 물었다.

“행복해, 서나야?”

“……”

이 광경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이 떨렸다. 

몇 번이나 달싹거려도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이 낯설면서도 그리운 가족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옆에 평온하게 선 미하일의 모습도.

배경으로 펼쳐진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의 광경까지도.

그 모든 것을 전부 눈에 담고 난 뒤.

겨우 미하일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다시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겨우 소리를 빚어 내뱉을 수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행복하지 않아?”

“……행복하겠지. 이게 진짜라면.”

“진짜가 될 수 있어. 네가 좋다고 하면. 고개만 끄덕여도 돼. 전생에는 내가 완전히 마왕에게 먹혔으니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달라.”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더없이 달콤한 독과 같은 단어들을.

“이건 내가 너를 위해 만든 세계니까. 이전에 그랬듯 지금 역시도.”

그의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이미 한번 세상은 멸망했고, 내가 얻은 두 번째 기회는 그가 만들어 준 것이다.

그는 지금 말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세계는 그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라고.

그러니, 얼마든지 그가 바라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노라고.

그렇게 해 주겠다고.

“너에게 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아니까. 그리고 사실 전생을 그리워하고 있었잖아? 그때의 실패를 매번 곱씹으면서 아등바등했지. 이건 전생에 너를 슬프게 한 모든 걸 제거한 세계야. 네가 가장 바라는 세상.”

미하일은 다시 한번 애원했다.

“이대로 함께 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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