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3/218)

Level 30. 메인 퀘스트 : 나를 위한 세계 (01)

분명히 미하일의 말은 틀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것이 아름답고 완전한 세계일 수 있었다.

가족들은 온전하게 무사했고.

미하일도 옆에 있고.

다른 이들 역시 무사한, 그런 세상.

여전히 몬스터는 몰려들고, 게이트는 닫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가던 내 세상.

소피아는 사라졌고.

마왕은 강림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몬스터 역시 사라져 더는 슬픔이 없는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가장 좋은 부분들만을 고이 잘라내어 장식한…….

행복한 모형 정원.

그는 그것을 내 손에 쥐어 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네가 한 마디만 하면 돼. ‘좋다’라고. 그러면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할 수 있어. 이번에야 말로 영원히.”

그러면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노라고.

하지만…….

나는 대답 전에 눈을 감았다. 안온한 어둠이 눈꺼풀 아래 펼쳐져, 몸을 감싸 안는다.

그가 이 세상을 내게 보여주려 했을 때, 눈을 한번 가렸다가 다시 뜨여주었다.

그것처럼 눈꺼풀 안쪽의 잔상에 불과할 ‘이것’은 한 번의 눈 깜빡임으로 지워낼 수 있었다.

이 환상이 정말 현실이 될 수 있다 한들, 아직은 아니었다.

내 입에서 긍정의 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현실로 확정되지 않는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미하일이 굳이 내게 긍정의 답을 요구하고 있을 리 없으니.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내가 아는 그들 그대로였으니까.

저 환영으로 덮어씌워져버린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가족들은 이곳에 없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하일은 이 환영의 세계를 바로 현실로 바꿔치기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선 것은 미하일 뿐이었으니까.

거짓된 전생을 복사하여 만들어진 환영들도. 가족들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었다. 

미하일이 안타깝게 탄식했다.

“왜 거부하는 거야? 너를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잘라낸 세상이야. 내가 너를 위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데.”

그는 하나의 세계를, 날카로운 가시를 잘라내어 내게 선물한 장미꽃 한 송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이미 있어.”

“뭐?”

미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살해당하는 태양이 내뿜는 듯한 단발마를 닮은 노을빛 눈동자였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우면서도 이질적이었다.

“지금 세상.”

손을 뻗어 밖을 가리켰다.

지금 그와 다를 둘러싼 이 공간 밖에 여전히 남아 있을, 두 번째 세상.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가족들이 있을 그곳.

하지만 미하일은 내 말에 순순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족한 게? 이곳에서도 너는 힘들어 하고, 슬퍼하고, 누군가를 잃기도 했어.”

“그래. 그랬지.”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는 백치로 오해받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조각나 있었다.  오빠는 상처받고, 아빠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가두고 있었으며, 엄마는 돌아가신 줄 알았다.

나는 어린 몸으로 나서서 그걸 전부 기워 붙여야 했다.

우리 가족을 온전히 되찾는 데에는 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고. 증오하고, 모함하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전생의 연과는 상관없이 날 싫어하고,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 세실리아가 그랬고. 그 부모들도 그러했고, 에릴과 홀덴 영애도 있었다.

소피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에릴의 세뇌에 당해 나를 비난하던 이들도 있다.

그 비난의 소리 모두가 세뇌로 인한 건 아닐 것이다. 

남들이 하는 말에 휩쓸린 것이든. 혹은 그냥 나를 싫어하는 것이든.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으니까.

완벽한 세상은 아닐지도 몰랐다.

나를 위한 세상은 아니었다.

미하일은 그런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번엔 실패였어. 그러니까 다시 해줄게. 네가 아파하고, 슬퍼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도록.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고 완전한 세계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결국 네가 나에게서 두 번째 세상까지 빼앗아 가겠다는 소리야.”

“서나야.”

“아니. 리샤야. 아나트리샤.”

분명히 나를 이루는 근간은 전생의 기억이다.

안서나로서의 삶. 그 연장선 위에 아나트리샤의 삶이 존재하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기쁘고 소중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지마. 미하일 나스카.”

미하일의 붉은 눈이 떨려왔다.

***

이젤리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마력을 움직이고, 아스트라를 발현시켰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세상 그 자체를 가린 장막과 같은 어둠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소중한 가족의 존재 이전에,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

아마도 이것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세상의 멸망일 것이다.

전생에 한번 찾아올 뻔 했던 그 파멸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의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온 몸으로 부딪치는 것.

그녀의 발악이 이 압도적인 고요함과 어둠에 미약한 상처라도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 어린 것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가족들을 다시 모아냈는데.’

남편에 대한 상처와 의심으로 고통 받다, 결국 그 곁을 떠났을 때.

자신은 결국 한번 가족을 버린 셈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하스티아는 위험했고, 아이들은 너무 어렸으니까.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남편을 조금만 더 믿었다면……,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길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더없이 소중한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해 주지 못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슬프고, 자책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걸 이겨내고 되찾은 가족들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이미 한번 손에서 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번에는 놓칠 수 없어!’

그녀는 몸과 영혼을 다해 전력으로 어둠을 향해 부딪쳤다.

계속, 계속해서.

***

쿵, 쿵, 쿵-.

울림이 있었다. 

처음에는 극히 미약했으나, 조금씩 그 진동이 높아지고 소리가 커져갔다.

아직 가장 깊은 곳에 있을 아이의 귀에 닿기에는 더없이 미약했으나.

그 존재만은 명료했다.

***

“----!!”

카스톨트는 폐를 통째로 끄집어내듯이 외쳤다. 

아내와, 아들과, 딸.

그에게 있어 하나 하나가 세상보다 더욱 무겁고,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지만 제 입에서 나온 소리는 스스로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한번 포기한 적 있었기에 더더욱.

오해로 인해 아내를 잃은 이후, 그는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의 상처에 매몰되어 온 힘을 다해 돌봤어야 할 아이들을 외면했다.

자신을 벌주기 위해서라 했지만, 결국은 핑계였다.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숨어버린 것이었고.

그 결과, 아이들에게서 아버지의 존재마저 빼앗아버린 것이기도 했다.

그걸 알려준 건 어린 딸아이였다.

“아바가 우리항테서 압빠를 빼사가버리묜 오또케!”

그 작은 몸으로, 아기는 엉엉 울면서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달려가 안아줬을 때, 결국 울면서 매달렸던 아들 역시.

그 아이들이 알려주고, 아이들이 되찾아준 인연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니, 그 이상의 존재들.

설사 자신의 몸이 으스러지고 영혼이 흩어진다 해서, 그들의 곁으로 향하기 위한 몸부림은 절대로 멈출 수 없었다.

결코.

***

미하일은 당혹스러워 했다.

“내가 너를 너에게서 빼앗아?”

“그래.”

“나는 너를 빼앗지 않아.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 내가 어떻게 너를…….”

“아니. 너는 그러려 하고 있어. 저 밖에 두고 온 나의 일부를 나에게서 빼앗으려 하는 거니까.”

“너의…… 일부?”

미하일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의 넌 너로서 온전해. 나는 너에게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어.”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나의 자율 의사와 영혼에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

육체 역시 마력의 발현만을 막아두었을 뿐. 원래의 나 그대로다.

그런데, 나를 빼앗으려 한다고 말하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밖에 있을 내 가족들, 내 친구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싫어하는 사람들, 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 해도…… 그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 그들은 결국 ‘나’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일부야.”

“리샤. 그런 하찮은 것들에까지 자비를 베풀 필요 없어. 그건 너무 과분해.”

“이 세계를 부수는 건, 결국 그들 안에 있는 나까지 죽이는 거야. 그렇게 되면 결국 나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남을 수 없어.”

이건 진심이었다.

그가 보여준 환영 속 예쁘게 깎아낸 세상을 부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안서나는 그곳에서 한번 죽었다.

그 죽음으로서 세상은 멸망했고, 그 실패와 끝까지가 전부 그 세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안서나는 힘껏 싸웠고, 가족들을 잃었고, 친구들도 잃었고, 배신당했고, 미하일을 잃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았고, 싸웠고, 또한 죽었다.

조금 전 미하일이 보여준 안전하고 완전하게 재구성한 그 세계는, ‘안서나’의 삶에 대한 모독이었다.

같은 의미로 지금의 세상에 똑같은 짓을 한다면, 그건 ‘아나트리샤’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머릿속이 불이 켜진 것처럼 환했다.

나는 더없이 명료하게 대답했다.

“내 실패와 슬픔, 배신, 부족함을 네 잣대로 재서 잘라내려 하지 마.”

그건 결국, 세상의 멸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였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틀린 건 수정해 주겠어!”

원래, 이럴 땐 설득(물리)가 최고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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