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30. 메인 퀘스트 : 나를 위한 세계 (02)
***
아나트리샤는 또 외쳤다.
어둠을 향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지금만은 최악의 적이 된 이에게.
“나에게서 나를 빼앗지 마!”
마왕의 힘에 의해 묶여 있던 빛이, 사슬을 부수고 다시 드러났다.
이것은 순전히 마음과 마음의 힘이 서로 부딪친 결과였다.
아나트리샤의 의지가 마왕의 본능을 이긴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마왕에게 물들기 전 미하일이 바란 것은, 순수한 아나트리샤의 행복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금색의 빛으로 둘러싸인 아나트리샤의 주먹이 미하일의 뺨을 후려갈겼다.
언젠가, 허공에서의 랑데부 때 그러했던 것처럼.
퍽!
유달리 맑고 선명한 소리가 울렸고.
그것이 어둠의 장막을 찢는 소리라도 된 것처럼, 어둠의 한 가운데 빛의 구멍이 뻥 뚫렸다.
그 사이로 폭력적인 빛이 새어나와 아나트리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마치, 세상의, 생의 축복처럼.
이에 호응하듯 아나트리샤의 맑은 청보랏빛 눈동자 위로 서광이 비쳤다.
미하일은 멍하니 그 빛을, 소녀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왕 역시 망연하게 자신과 상극인 태양의 빛을, 그 빛을 품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일말의 적의마저 잊은 지 오래로.
미하일은 환생 이후 바뀐 아나트리샤의 청보라색 눈동자를 사랑했다.
아니,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 중 그 어느 것도 사랑스럽지 않은 건 없었고.
이것은 사실 전생부터도 똑같았으나.
그럼에도 저 청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게 무엇인지…….
미하일은 아련하게 생각했고.
또한 마왕은 깨달았다.
‘통이 트기 직전 새벽하늘 같은 색이다.’
그러한 색이라는 건 알고 이미 알고 있었다.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건, 비로소 지금에서야 가능했다.
가장 어두운 밤에서, 밝은 아침으로 이어지는 색.
창백한 푸른색과 짙은 보랏빛이 섞여 일렁이는, 새벽의 하늘.
여명이 오기 직전의 시각.
저 색의 뒤에는, 날카로운 태양이 금색과 붉은 색의 햇살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리라.
그렇다. 그녀의 저 붉은색이 도는 금빛 머리카락을 닮은 저 햇살이.
어쩌면 그녀를 이루는 색 부터가 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거운 어둠을 부수고 치솟는, 갓 태어난 태양.
미하일의 상념대로였다.
마왕의 깨달음 그대로였다.
이제 이 둘은 구분이 거의 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색이야.’
마왕의 본능으로서는 증오하고 거부해야 마땅한 색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나트리샤의 빛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했다.
아나트리샤를 이루는 색이기에, 이를 닮은 태양마저 사랑하게 될 만큼.
그렇게 본다면, 이미, 마왕은 존재 의의를 잃은 지 오래인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고 파괴하길 원해야 마땅한 존재가 바로 마왕인데.
그가 절대 부수지 못하고 사랑할 존재가 이미 있었으므로.
현재 그를 이루고 있는 중심은 미하일의 인격이었다.
이제 둘은 어느 하나로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얽혀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 마왕의 눈에마저 여전히 아나트리샤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세상 전체를 멸하는 것만이 존재의 의의 그 자체인 마왕의 본능이 져버린 것이다.
미하일이라는 한 인간이 아나트리샤를 사랑하는 마음에.
때문에 마왕으로 각성한 지금에까지도, 그녀의 존재만큼은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그저 세계로부터 잠시 분리해내고, 그녀 외의 것들을 멸망시킬 수 있게 해 달라 조르는 것 뿐.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의 의미의를 생각하면 어이없고 형편없는 타락이었다.
게다가 아나트리샤가 휘두른 주먹 한 방이 결정적이었다.
태양의 마력으로 가득 찬 그녀의 손길은, 무의식적으로 미하일에게 제 마력을 흘려 넣었다.
덕분에 미하일과 어지럽게 섞여 있던 마왕의 존재가 일순간이고 일부에 불과하나 정화되며 흐려졌다.
그 결과 미하일은 확실하게 인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조금 전보다 확실하게.
이건 소피아가 바란 것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 분명했다.
마왕이 미하일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 미하일이 마왕을 흡수한 것으로 결정되어 버렸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왕이 아니게 된 건 아니지.’
좀 더 미하일에 가까워졌으나, 그의 몸과 영혼에 강림한 마왕의 존재는 그대로였다.
미하일은 아직도 제 안에서 속삭이는 악의와 절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죽여. 죽여. 죽여.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증오해. 죽여…
-끝은 이미 왔어. 수명이 다한 세상이 구차하게 도망쳐 만든 것이 이 세계야.
-역겨워. 없어야 해.
-마땅하고 안온한 멸망을!
그건 인간 한 명의 영혼이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세계 전체에 속한 모든 생명을 증오하고, 죽이고, 소멸시키길 바라는 절대적인 명령.
그렇기에 미하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어 아나트리샤에게 자신이 자신임을 고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저 두 번째 공격을 멈출 테니까.
언젠가 자신이 이 마왕의 악의에 져버린다면, 아나트리샤를 위험하게 할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그러니 여기서 끝내야 해.’
진작, 전생에 그렇게 끝났어야 했던 목숨이다.
다시 한 번 그녀와 만났고.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 원망도 받았고,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녀의 연인도 되어 보았다.
모든 것들이 감히 바랄 수 없는 행복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이제 만족하고 사라질 때였다.
다시 한 번 아나트리샤의 주먹에 날카로운 금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의 파편이 사방에 어른거린다.
그건 말 그대로 태양을 닮아 있었다.
밤의 어둠이 아무리 깊고 무거워도, 결국 새벽이 오고야 마는 것처럼.
미하일은 그 빛을 바라보며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곧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리샤의 모습이겠구나.’
그러니 마지막까지 온전하게 새겨두고 싶었다.
***
황태녀 책봉식의 영광과 기쁨이 고조되던 와중에.
갑작스레 나타난 어둠은 세상을 잠식했다.
광장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입장에 상관없이 똑같은 광경을 보고 경험했다.
몸이 사라지고, 영혼이 짓눌리며, 자신이라는 인격 자체가 흐려지는 끔찍한 감각.
그 와중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이들은, 영원 같던 시간의 찰나 사이에 나타난 빛을 하나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쫓았다.
오로지 믿고 의지할 것이라곤 그 미약하고 밝은 빛 한 줌 뿐이었으니까.
그 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조금씩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보았다.
빛이 한 소녀의 모습을 이루는 것을.
조금 전 마왕마저 멍하니 바라보게 만든 색이 그녀를 채색하고 있었다.
새벽하늘을 갈라 찢으며 떠오르는 갓 태어난 태양의 빛깔이었다.
하늘의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태양의 빛살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그야말로 태양 그자체가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 듯 했다.
작열하는 빛이 모든 어둠을 갈라 찢으며 떠오른 순간.
내내 어둠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은 비로소 소리를 내어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리샤!”
“아가!”
“우리 딸!”
약간의, 그러나 명백한 차이를 두고 부름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화, 황녀님!”
“황녀 전하!”
“우리 황태녀 전하!!!”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르르 쏟아져 내려, 단 한사람을 향했다.
그들을 지옥의 끝자락에서 꺼내준 유일한 빛을 향해.
***
미하일은 겸허하게 기다렸다.
아나트리샤의 두 번째 빛이 자신을 꿰뚫기를.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이 지독한 생을 끝낼 수 있길.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조금의 해가 되지 않을 수 있길 바라면서.
그리고.
툭, 투둑.
맑은 물방울이 미하일의 눈꺼풀 위로 떨어졌다.
긴 속눈썹에 아침 이슬처럼 어린 눈물은, 티 없이 맑고 또 맑아 너무 서글펐다.
“리샤…….”
태양과도 같은 소녀는 나약하게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하일의 인격이 마왕을 이겨냈음을. 그럼에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소멸을 강하게 바라고 있다는 걸.
“이, 바보야…….”
미하일은 말문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리샤,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당장은 괜찮아도 언젠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 네가 상처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런 나를 이해해 달라고?
제발 행복하라고?
어떤 말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입 닥쳐. 말하지 마. 안 들을 거니까.”
“…….”
아나트리샤의 몸이 눈이 멀어버릴 듯한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 그녀의 손에 몰려들었던 공격적이고 압도적이던 태양의 마력이, 그녀의 머리에 모였다.
아니, 머리가 아니었다.
미하일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이 벌어진 순간.
아나트리샤는 두 번째 공격으로 미하일을 꿰뚫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무엇보다 강력한 공격을 퍼부은 셈이었다.
‘잠든 공주님을 깨운 게 왕자님의 키스라면, 반대는?’
언젠가 한 소녀의 실없던 생각. 그리고 도둑처럼 훔쳤던 입맞춤이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아나트리샤는 미하일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세상을 뒤덮고도 남을 눈부신 마력이 이를 통해 흘러들었다. 더없이 따스하고 상냥하게. 그러면서도 반론이나 저항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여러모로 그녀를 닮아 있었다.
그 빛도.
또한, 키스 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