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5/218)

Level 30. 메인 퀘스트 : 나를 위한 세계 (03)

잠든 미하일에게 훔치듯이 빼앗아온 도둑 키스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비밀 데이트 중에 했던 키스와도…… 또 달랐다.

입술이 서로 맞닿고, 숨이 얽혀들었다.

그리고 이 아찔한 접촉을 통해, 아나트리샤가 가진 태양의 마력 거의 전부가 미하일의 몸 안으로 물밀 듯 밀려들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것보다 거셌고.

해일이 밀려와 모든 것이 잠기는 것보다도 규모가 컸다.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인간이, 아나트리샤라는 이름의 바다 속으로 잠겨드는 것과 같았다.

두 사람은 잠시 모든 걸 잊었다.

마왕의 존재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것도.

그걸 막고 아나트리샤를 지키기 위해, 미하일이 몇 번이나 스스로를 포기했음도 잊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마저도.

남은 것은 그저 감각 뿐.

상대와 닿아 있다는 선명한 감각.

그리고 흘러넘쳐 상대방마저 휩쓸어 버릴 정도로 선명한 애정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모든 걸 잊은 채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

“여보.”

“……응?”

“나 조금 때려줘.”

퍽!

“커헉!”

이젤리아는 남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딸이 괜히 좋아하는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자 대뜸 주먹부터 날린 게 아닌 거다.

모전녀전 그 자체였다.

사랑해마지않는 아내의 달콤한 주먹 맛(?)에 카스톨트는 부정하고픈 현실을 깨달았다. 

또르르, 깨달음과 아픔의 눈물이 한 방울 황제의 뺨 위를 굴렀다.

“크흑. 꿈이…… 아닌 거구나.”

지금 그들은 조금 전 세상을 뒤덮었던 멸망의 어둠에서 벗어난 직후였다.

일반인들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지만.

그 어둠 안에서도 아나트리샤를 찾아 끊임없이 부딪치고 발버둥 쳤던, 그들 가족은 계속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 꼴을 보게 되어 버린 것이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카스톨트 황제는 좌절의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마왕도 멸망도 그를 무릎 꿇게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내, 내 딸이… 우리 아가가! 이렇게 사람 눈 많은 데서 첫 뽀뽀를……!”

“그냥 뽀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길어지는 걸 보면……. 어쩌면 첫 키스도 아닌 걸 지도…….”

“그, 그만! 여보! 듣고 싶지 않아!”

가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들이대는 아내에게 카스톨트는 비명을 질렀다.

그때 이젤리아는 조금 이상한 걸 느꼈다.

당장 미하일을 동생에게서 떼어내어 족치자고 난리를 쳐야 정상인 아들이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비정상적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알았다.

‘아아. 분노와 살기가 극에 달하면……, 저랬었지.’

가족도 별로 못 본 모습인데 말이다.

루퍼스리안이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전생에 죽였어야……, 아, 아닌가. 그땐 이미 죽었나. 그럼 역시 미래에라도 죽여야……. 아아. 하지만 그랬다간 리샤가 울 텐데! 그러면 리샤가 모르게…, 모르게 할 수 있나?”

딜레마에 빠진 아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좌절하는 조각상 부자를 바라보며, 이젤리아는 혀를 찼다.

모전녀전에 이은 부전자전을 증명하는 오브제 사이에서,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웃었다.

“둘 다 마음이 너무 약해빠져서 큰일이야. 벌써부터 이렇게 힘을 빼면 안 돼.”

“여보?”

“어, 엄마?”

루퍼스리안은 십대 중반 이후 자신은 다 컸다며 잘 안 쓰던 ‘엄마’라는 호칭까지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이대로 둘 다 힘 다 빼고 그냥 엎어져서 저 여우같고 도둑고양이 같은 녀석에게 리샤를 고이 내주고 행복하기만 빌고 있으려고?”

후후, 하고 이젤리아는 무섭게 웃었다.

“난 아닌데.”

그녀는 이미 끝나 있었던 것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을 직접 실천한 준비가.

물론 그 사랑의 형태와 정도는 전적으로 이젤리아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반론 따윈 받지 않을 예정이었다.

“여, 여보!”

“엄마아!”

잠시 좌절했던 두 남자는 하늘 같은 아내(or 엄마)의 선언에 힘입어 부활했다.

세상이 멸망할 뻔 했다는 사실 조차, 딸(or 동생)을 뺏길 위기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가족은 언제나 한 가지 이유로 똘똘 뭉칠 때, 세상에서 가장 강해지는 법이었다.

***

주변인들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길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 끝난 뒤.

아나트리샤는 나직이 미하일의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만, 눈꺼풀이 떨리면서, 긴 검은 속눈썹의 그림자가 파들거렸다.

검은 나비가 눈꺼풀 끝에 앉은 듯한 미하일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햇살 아래 그의 눈동자가 드러난다.

여전히 그의 눈은 붉은 색이다. 금빛은 흐리게 섞여 순간적으로 반짝일 뿐.

아나트리샤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전신의 마력이 주먹으로 집중된다.

그녀가 또 주먹을 내지르려는 걸 눈치 채기라도 한 건지.

미하일의 입이 살짝 조급하게 열렸다.

그리고 어쩐지 화가 날 정도로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거, 알아?”

“…뭘?”

조금 목이 멜 뻔 했다. 

그런데 이어진 말에 아나트리샤는 울컥하던 것도 싹 잊어버릴 뻔 했다.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인거, 리샤.”

아나트리샤가 아는 미하일의 말투 그대로였다.

전생부터, 지금까지.

어떤 걱정도 그늘도 없을 때면, 그는 늘 이렇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이건 오로지 ‘미하일’만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안도감이 밀려들었고.

아나트리샤는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면서, 바락 외쳤다.

“당연하지! 딴 여자한테 맞고 오면 가만 안 놔둘 줄 알아!”

***

그러자 가족들까지 아래에서 황당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딴 여자에게 맞는 게 바람피우는 급인 거야?”

“당연한 말이란다! 외간 여자의 주먹을 허락하는 건 조신한 남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너도 기억해 두렴?”

“그래. 루퍼스. 네 엄마의 말이 무조건 옳단다.”

“…….”

가족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와 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해질녘 노을을 닮은 눈 색은 분명히 아름다웠지만, 또한 서글프고 쓸쓸한 색이었다.

모든 게 스러져 어둠으로 먹혀버리기 직전의 색.

하지만 지금 그의 눈 안에서 저 색은 노을의 색이 아니게 되었다.

파편화되어 흐리게 산란하던 금빛이 서서히 차올랐다.

마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처럼.

미하일이 더없이 사랑하고 그렇기에 닮아갔던 나의 금빛이 다시금 아래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미하일, 맞지?”

“응. 리샤. 나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뻗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미하일은 힘차게 나를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미하일!”

“그래, 리샤.”

“미하일, 미하일…….”

“나 맞아. 미안해, 리샤.”

나는 한없이,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미하일은 나를 안아 토닥이며 내가 몇 번을 불러도, 다시 대답을 해주었다.

대답이 이어지는 한, 미하일이 미하일로 남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내가…, 티는 안 냈지만. 크흥,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알아?!”

“알아. 미안해. 진작 이겨내지 못해서 미안.”

“그 소리가 아니잖아!”

나는 눈물콧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로 빽 외쳤다.

“네가 미안해야 할 건, 마왕을 못 이겨낸 게 아니라…… 또 네 멋대로 너 자신을 포기하려고 한 거야!”

그랬다. 

이번에도 미하일은 자신을 되찾고도, 모든 위험성을 없애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스스로를 버렸다.

내가 그걸 원치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미안. 미안해.”

“알면, 됐어. 계속 미안해하면서……, 평생 계속 갚으면서 살아야지.”

절대, 절대로 안 놔줄 테니까.

“바라던 바야.”

아래에서 몇 마디 아우성치는 듯한 소리가 들린 듯도 했지만.

우리는 듣지 못한 듯 행동했다.

나는 미하일에게 속삭였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 나에게서 날 빼앗지 말라는 말.”

“응. 내가 잘못했어.”

“그 소리가 아니라…….”

아나트리샤는 눈물 가득한 눈을 소매로 닦으며, 얼굴을 들었다.

미하일과 정면에서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선언했다.

“너도 내 세계의 일부야.”

“…….”

“네가 있어야 내 세계가 완성 돼. 그 정도로 소중하고 중요한 조각이야.”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나에게서 널 빼앗지 마. 제발.”

네가 한 일이라도 싫어.

날 위한 거라면 더 싫어.

굳이 말로 이어지지 않았어도, 생략된 말까지 미하일은 완전히 이해한 게 틀림없었다.

아까는 내가 먼저였지만, 이번에는 그가 먼저였다.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간절하고 다급하게, 그는 나를 끌어안고 입술을 겹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이 감겼다.

덕분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설득(물리)의 효과는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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