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 메인 퀘스트 : 에필로그 (01)
그렇게, 나는 마왕에게서 미하일을 빼앗아 오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내가 이겼어!’
그리고 그 순간.
몸에서 힘이 쑥 빠지며 그대로 추락할 뻔 했다.
“리샤!”
다행히 미하일이 잡아주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오로지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한다는 것처럼, 미하일의 금빛 눈동자에는 나 외에 어떤 것도 없었다.
온전한 금빛.
내가 그를 독점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나는 두 팔을 뻗어 미하일의 목에 매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력을 너무 써서 그래.”
“아……!”
조금 전 미하일에게 힘을 너무 많이 써서(?) 마력이 진짜 바닥난 것이다.
환생 이후 엄청나게 늘어난 내 마력양이 바닥을 보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몸을 허공에 띄우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미하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안해. 나 때문에.”
얘는 왜 이렇게 땅을 잘 파나 모르겠다.
다시 정신 차리라고 애정의 주먹으로 뺨을 쓰다듬어(?) 줄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 예쁜 얼굴에 상처 나면 어떡해.’
물론 그전에 애정의 쓰다듬은 전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한 거였다.
절대 내가 폭력적이라 그런 게 아닌 거다. 엣헴.
그래서 이번에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귓가에 속살거려서.
“이런 때 맞는 대답은 그게 아냐.”
“……응?”
“그냥, 내가 좋다고 해. 끌어안아 줘도 좋고. 뽀뽀해도… 더 좋고.”
나도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훌륭한 학생답게, 미하일은 나를 더욱 강한 힘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병아리 깃털처럼 가볍고 귀여운 키스가 내 두 뺨과 콧등, 이마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미하일의 속삭임은 더없이 감격적이고 애정으로 가득했다.
“좋아해. 아니, 사랑해. 리샤.”
“…나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순정적인 전리품을 꼭 끌어안고 헤죽헤죽 웃었다.
미하일은 얌전히 내 품에 폭 안겨 있었다.
그 뒤로도 꽤 한참동안.
***
아나트리샤 황녀가 지상에 강림한 태양이 되어 뿜어낸 빛은 눈부시도록 강력했고.
또한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으며. 대륙 끝까지 닿고도 남을 만큼 널리 퍼졌다.
물론 구원의 빛만 대륙 전체로 퍼진 건 아니었다.
그 직전에 나타난 끔찍한 어둠 역시 단 한순간이지만 대륙 전체를 짓눌렀더랬다.
그 어둠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죽음보다, 더욱 끔찍한 존재였으므로.
압도적이고 절망적인 멸망.
마왕의 존재감 그 자체의 일부에 불과했으나, 전 대륙의 살아 있는 생명들은 이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게다가 기억하는 이들은 극히 적지만, 대다수의 영혼들이 전생에 저 멸망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바가 있다.
환생한 이후라도, 영혼에 새겨진 공포감은 낙인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영혼들은 다시 쫓아온 멸망을 목도하고 끔찍한 고통과 절망을 맛보았다.
멸망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접한 이들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살아 있는 내내 고통 받았으리라.
그건 이 세계에 살아 있는 존재라면 똑같이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누군가’가 없었더라면.
하지만 아나트리샤의 빛이 그 멸망을 몰아내며, 정화했고.
연이어 전 대륙을 감싸 안았다.
아나트리샤 본인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마왕의 존재에 한번 닿아 상처 입은 살아있는 자들의 영혼은, 아나트리샤의 빛에 감싸여 치유 받았다.
덕분에 마왕을 목도한 일을, 끔찍한 악몽이었다-라고 말하며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일 아나트리샤의 빛이 없었다면,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되었을 거다.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아예 미쳐서 발광하는 이들이 무수히 많았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알았다.
저 빛이 자신들을 구원했다는 걸.
때문에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아나트리샤를 향해 감사와 애정, 환호성을 보내기에 바빴다.
특히나 광장에서 모든 걸 바로 앞에서 목격한 군중들은 더욱 그러했다.
“황태녀 전하 만세!”
“만세! 만세!!”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신 태양신의 따님!”
“아니, 태양신께서 드디어 지상에 강림하신 거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드디어 초대 황제 루스템께서 다시 내려오셨다!”
“태양신을 찬양하고, 흠모할지어다!”
이들의 환호성에 대답하듯 제단에 모셔진 태양석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빛나고 있었다.
아나트리샤의 뒤에서 마치 휘광처럼.
군중들은 태양석의 발광이 곧 그들의 환호성에 대한 긍정의 대답이라 믿었다.
사실은 그저 아나트리샤의 마력에 공명한 것에 불과함에도 말이다.
그녀가 마왕을 정화하고, 그에게서 미하일을 빼앗아오기 위해 한계를 넘어서는 태양의 마력을 발현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군중들은 그저 기뻐하고 또 환호했다.
마치, 단어 그대로 태양이 지상으로 내려와 어둠을 몰아낸 듯한 광경을 향해.
그리고 그날부터, 아나트리샤 황녀가 태양신의 현신 그 자체라는 소문이 전 대륙에 돌기 시작했다.
황태녀 책봉식에 참여한 사신들이 관련 소식을 재빠르게 물어 날랐고.
국적과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경험한 일과 연관된 사건이다 보니, 소문의 속도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설프지만 분명한 신앙이 되어 전 대륙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나트리샤가 알고 기겁하게 되는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쪽팔리는 소문이라며 진압하려 시도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녀가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신앙이 무르익어, 신전이 세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왜, 부끄러움만 내 몫인데!’
그녀가 절규하게 되는 건, 아직 한참 남은 미래의 일이었다.
***
역사에 비슷한 유례도 찾을 수 없을 황태녀 책봉식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황궁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황태녀 책봉식에 참여하기 위해 왔던 내외빈들 모두가 조금이라도 황태녀를 보고 싶어 안달을 했고.
사방에서 초대장과 알현 요청이 쏟아졌다.
이 혼란의 와중에 황녀궁, 아니, 이제 황태녀궁에 들어갈 것을 허락받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황실 가족들, 혹은 황태녀의 친인들.
그들 중 가장 먼저 알현한 이는 라이언 그랑디오르였다.
아나트리샤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기사를 맞이했다.
“라이언! 몸은 좀 괜찮아?”
조금 창백한 얼굴의 라이언은 자신의 황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태녀 전하 덕분에 다시 한 번 목숨을 구했습니다.”
책봉식 전날, 라이언은 동생 리지드에게 습격당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매개체로 삼아, 마왕에게 잠식된 미하일에게 저주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때, 검은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지던 라이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라이언은 마왕에게 가장 강력한 저주를 직접 받았다. 영혼을 조각내는 듯한 고통이 뒤따른 것은 물론이다.
아마도 아나트리샤의 빛이 이를 모두 정화하고 치료해주지 않았다면, 지금 살아서 인사하러 올 수는 없었으리라.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지.”
그런데도 아나트리샤는 도리어 미안함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사실 나만 아니었으면 라이언이 집중해서 저주를 받을 일은 없었을 걸.”
그때 마왕이 굳이 라이언을 노린 건, 아나트리샤 때문이었으니까.
라이언은 부드럽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람’은 곁에 안 계시는 겁니까?”
“으응?”
라이언은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스카의 왕자, 아니, 왕 말입니다. 그때 너무 열렬하셔서 한시도 떼어두고 싶어 하시지 않는 듯 했는데요.”
“그, 그건……!”
아나트리샤의 두 뺨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생각해 보면 다들 보고 있었잖아! 무슨 정신이었지, 진짜?’
가족들이, 특히 아빠와 오빠, 외할아버지가 그날 뒤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부담스러워졌다. 눈물로 손수건을 적시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가족들이나 지인들만이 아니라, 생판 모르는 대중들 앞에서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고, 뽀뽀도 하고…….
그야 말로 온갖 애정 행각을 다 벌인 셈이 아닌가!
대체 무슨 용기, 아니, 만용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나트리샤는 갓 화덕에서 꺼낸 빵처럼 뜨끈한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어물어물 변명했다.
“한시도 떼어 놓고 싶지 않은 정도까진……아니고.”
“아, 그러면 혹시 아직 제게 미약하게라도 가능성이 남아 있는 걸까요?”
훅 치고 들어온 라이언의 말에, 아나트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미소도 없었다.
묵직한 진심, 오로지 그뿐.
라이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주군이자 레이디인 아나트리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진심만을 담아 말했다.
“어린 시절 처음 뵌 이후 늘 당신을 마음에 담고 기다려 왔습니다. 부디 제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겠는지요?”
“……라이언.”
아나트리샤는 망연한 얼굴로 자신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롯하게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진심을 다한 대답을 줄 수밖에 없다.
아나트리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라이언. 내 마음에는 한 사람밖에 없어서, 너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건 불가능해.”
라이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아나트리샤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대답을 이미 알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의 알현 요청과, 이 한참 늦은 듯한 정식 고백은, 결국 한 가지 의미였다.
‘제대로 실연당하려고 온 거구나.’
이미 아나트리샤가 누굴 선택했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라이언은 정식 구애를 하기 전이었다.
반쯤 장난으로, 반은 농담처럼, 자주 언급했으나, 이렇게 정식으로 고백하는 건 처음이다.
그는 제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거절당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온전히 주군과 기사로서의 관례로 돌아가기 위해.
“고마워, 라이언.”
“아닙니다. 사실 처음부터 거절당할 걸 알아서, 조금 두려워한 것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 용기는 내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되찾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그 사람 앞에서 당신께 구애해서 심기를 좀 불편하게 만들어주고 싶기도 했는데.”
“그런데?”
“역시 승리자 눈앞에서 차이는 건 좀 별로일 것 같아서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늘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물러가기 전, 라이언은 아나트리샤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오롯하게 레이디의 기사이자, 주군의 신하로서.
이 인연만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끊어지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티 없이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
그리고, 당연히 아나트리샤의 손님은 한 명으로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