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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02) (2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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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방문자는 파비엘 파셀이었다.

책봉식 사건 이후 처음 만난 파비엘은 평소와 많이 달라 보였다.

늘 활기찬 강아지처럼 보였었는데.

오늘은 조금 우울한가 싶을 만큼, 표정도 행동도 무거웠다.

그 덕분에 아나트리샤는 조금 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얘도 벌써 열네 살이지. 열다섯이 얼마 안 남았고…….’

워낙 어릴 때부터 보아 왔어서,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였는데 말이다.

전생 때부터 그러했다.

부모님이 서로 친하다 보니 거의 사촌 형제처럼 가깝게 자랐고.

그녀에게 동생이 없다 보니, 동생이 있다면 파비엘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생각하고 아꼈던 것이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늘 작고 귀엽기만 하던 꼬맹이.

하지만 지금의 파비엘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특히나, 전생에는 이미 성인이 된 이후의 모습도 봤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에조차 자신은 이 아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했었다.

가혹한 상황에서 전사 통지로 그 마지막을 듣게 된 때에도.

그때는 그저, 어린 동생 같은 아이를 잃은 것이 슬펐다.

하지만, 이젠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던 것만큼, 그는 어리지 않았다.

그때에도, 또 지금도.

아나트리샤의 멍한 눈을 보더니, 파비엘은 피식 웃었다.

“어쩐지 이제야 제가 황녀님보다 키도 더 커졌다는 걸 깨달으신 것 같네요.”

“으음.”

좀 찔리지만, 아니라고 변명하기도 그랬다.

그는 전생에도, 현생에도 몇 번이나 그녀에게 말했었으니까.

“누나가 날 마력 폭주에서 구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반했다고 착각했다니, 말도 안 돼! 난 진지해!”

“저도 벌써 열네 살이에요, 황녀님. 내년에는 기사 서임도 예정되어 있는데…….”

그렇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며, 봄의 축제 파트너 신청까지 했었는데.

너무나도 가볍게 취급해 버렸다. 그냥 어리니까 뭘 모르는 거라고 말이다.

정작 그 어린애보다 뭘 모르는 건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아기 때부터 보아 왔기 때문에 속속들이 다 안다고 오만했다. 

전생부터 이어진 인연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리다고 해서 마음까지 미숙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자라면 웃으며 말할 추억이라고만 치부해 버리는 건, 파비엘에게 너무한 일이었다.

그걸, 아나트리샤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랑을 하게 되자, 그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타인의 진심까지도.

그래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미안해. 파비엘.”

그러자 여전히 그늘져 보이는, 오늘따라 유달리 훌쩍 커 보이는, 파비엘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어렸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밝아 보이는 표정이다.

“고백하기도 전에 차여 버렸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째선지 홀가분한 정도가 아니라 순수한 기쁨이 더 커 보였다.

아나트리샤가 그걸 묻자, 파비엘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차인 건 슬프지만, 그보다 이제야 황녀님이 제 마음이 진지하다는 걸 알아주신 게 기뻐서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파비엘은 아나트리샤가 아는 소년이었다.

다만, 밝고 활달한 표정이어도, 전처럼 어린아이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많이 성장했고, 더욱 성장할, 이제 곧 남자가 될 날이 머지않은 소년.

그것이 비로소 온전하게 보였다.

그래서, 아나트리샤는… 아니, 안서나는 전생에 끝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지 않았던 동생에게 다시 한번 속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덧붙였다.

당사자는 듣지 못하겠지만.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아나트리샤가 여러 사람을 만나느라 바쁜 사이.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한 곳 있었다.

바로, 황궁 외곽의 객관. 나스카인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주어진 그곳에, 불쑥 루퍼스리안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시종이나 하인들의 안내를 굳이 받지 않고, 미하일의 침실 문을 바로 걷어차, 제 방문을 알렸다.

쾅!

“시커먼 도둑놈, 나와!”

“헉! 이 무슨……, 아, 제국의 황자 전하?”

루퍼스리안의 난입을 미하일보다 먼저 직면하고 기겁한 건, 늙은 장로 로겐이었다.

제 주인의 시중을 들다 봉변을 당한 노인은 미하일이 몇 번이나 안심을 시킨 끝에야 겨우 물러갔다.

그런 미하일의 태도를, 루퍼스리안은 가증스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단둘만 남자, 결계를 친 직후.

미하일은 빙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

사근사근 상냥한 한마디에 루퍼스리안은 거의 토혈할 정도로 강한 심적 타격을 입었다.

“누우가 네 형님이야!!! 어딜 다 이긴 놈처럼 굴고 있어!!!”

루퍼스리안이 씩씩대는 걸, 여유 있게 넘기면서, 미하일은 직접 차를 우렸다.

희고 긴 손가락이 다기를 다루는 것이 물 흐르는 것처럼 우아했다.

“요즘 다도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그쪽을 신경 쓰시는 듯해서요.”

그렇다. 여전히 이젤리아는 ‘얘야, 차가 쓰구나.’를 시전 중이었고.

미하일은 장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젤리아만 공략하면 황제와 루퍼스리안, 덧붙여서 크눔펜 국왕까지 알아서 따라온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젤리아는 미하일이 아나트리샤에게 보인 애정과 헌신.

거기에 조신하게 머리를 굽히고 따르는 태도만은 높이 사고 있었다.

이건 루퍼스리안의 예상보다 지나치게 빨랐다!

그 덕에 집안 남자들 사이에 경각심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리샤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결혼해 버릴지도 몰라!’

그 결과 루퍼스리안이 견제를 위해 직접 온 것이다.

루퍼스리안의 앞에 미하일이 직접 우린 밀크티가 놓였다.

밀크티는 어릴 때도 지금도,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차였다.

밀크티를 한 입 마신 루퍼스리안의 눈썹 끝이 튕겨 올라갔다.

‘이 자식!’

그는 놀라고 그 이상으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다도를 본격적으로 신경 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미하일의 밀크티가 엄청나게 맛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완벽하게 아나트리샤의 취향에 맞춘 것이었다.

‘이렇게 차가 떫어지기 직전까지 진하게 우린 다음, 향만 더하는 게 리샤의 취향이지. 게다가설탕의 양도 정확히 계량해서 달달하면서도 과하게 달지 않게 했어!’

그야말로 루퍼스리안과 카스톨트가 우린 밀크티 맛의 장점만 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득의양양한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루퍼스리안의 반응으로 자신이 제대로 해냈다는 걸 눈치챈 반응이었다.

미묘한 패배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도 부친도 외조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시작부터 진 싸움이다.

미하일이 아나트리샤를 위해 무엇까지 했느냐보다는, 아나트리샤가 미하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했으니까.

그의 하나뿐인 동생이 마왕에게서 빼앗아올 정도로, 미하일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게 있었다.

책봉식에서 미하일이 마왕에게 잠식되어 벌인 일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게 심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다.

뒤에 벌어진 일이 더 심각해서였던 것이다.

마왕이 세상 전체를 어둠의 구체 속에 묻어 버렸던 순간.

그건 짧은 악몽과 죽음, 멸망을 압축해 놓은 경험에 가까웠다.

그 압도적인 상황을 경험한 이들에게, 그전에 미하일이 분노하며 군중을 공격한 건 사소한 일로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제대로 기억한다면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소지가 컸다.

하지만 그때 마왕의 힘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지독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때의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고 왜곡시키려 했다.

무의식적으로.

압도적이고 끔찍한 어떤 괴물이 그때 광장에 나타났고.

아나트리샤가 신성한 빛으로 이를 정화하고 세상을 구했다.

이 사실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때문에 암흑의 구체 안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이들 외에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루퍼스리안은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추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미하일 나스카가 맞는 거냐? 다른 뭔가가 남은 거 아냐?”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루퍼스리안이 던진 질문은 매서운 돌멩이였다.

미하일이라는 호수에 던져진.

파문이 일렁였고, 온통 금빛으로만 물들어 있어야 할 호수에는 분명한 붉은 빛이 위험하게 어른거렸다.

미하일의 금빛 눈동자에 흐릿하게나마 다시 일어난 붉은 빛에, 루퍼스리안은 작게 탄식했다.

“너……!”

하지만 루퍼스리안이 움직이기 전, 미하일이 한 발 더 빨랐다.

루퍼스리안의 손을 잡아채 테이블 위로 짓누른다.

도망치거나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미하일이 우아한 눈매를 반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너무 그렇게 날 자극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난 계속 노력하고 있단 말이야.”

“……뭐?”

루퍼스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뭘 노력하고 있다는 거지? 혹시 미하일로 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단 소리야?” 

노력해야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건 결국 한 가지 의미 외엔 없었다.

미하일 외의 어떤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

게다가 방금 루퍼스리안은 분명히 보았다.

그의 눈 안에서.

티끌에 불과하지만, 분명한 마왕의 파편을.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루퍼스리안에겐 미약한 불안감이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니길 바라면서 왔다. 그래서 루퍼스리안이 굳이 혼자서 온 것이다.

이 위험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면, 결코 혼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이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동생의 안위와 이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해도!

루퍼스리안은 전력으로 태양의 마력을 발현시키려 했다.

그 순간, 미하일이 길게 한숨을 쉬며 루퍼스리안을 놔주었다.

“……?”

뭐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시 마왕이 당장 부활할 듯한 압도적 위압감을 드러내던 미하일이었다.

금색으로 빛나야 할 눈동자에 섞여든 찌꺼기 같은 붉은 빛도 위험했다.

아직도 마왕의 파편이 완전히 스러지지 않았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미하일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으며 바닥에 떨어져 엎어진 찻잔과 차 얼룩을 치웠다.

그리고, 루퍼스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그의 금빛 눈동자에는 어떤 다른 색도 보이지 않았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보는 그대로야. 나는 계속 노력하고 있어. 미하일이기 위해서. 나를 버리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 리샤가 바라는 게 그거니까.”

루퍼스리안의 표정이 한층 사나워졌다.

“그러니까, 네가 언제든 마왕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놈이라는 소리인 거군.”

“글쎄. 그건 틀려.”

미하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왕이라 해도, 위험해질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뭐?”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마왕이 위험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니.

“마왕은 결국 한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의지야. 세상이 탄생하면서 예비된 순리에 가깝지. 그러니까 마왕은 이 세상의 모든 걸 증오하고 죽이고 없애길 바라야 해.”

실제로 전생에 강림한 마왕의 존재도, 환생 후 책봉식 날 보았던 존재 역시…….

“……!”

그제야 루퍼스리안은 깨달았다.

미하일은 어딘지 모르게 벅찬 어조로 속삭였다.

“마왕마저도 결국 한 사람만은 사랑하게 되어 버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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