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 메인 퀘스트 : 에필로그 (03)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증오해야 마땅한 존재가, 결국은 인격을 얻어 누군가를 사랑해 버렸다.
그 시점부터 그 존재는 더 이상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순리로서 존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건 결국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밤의 어둠과 행복한 꿈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만을 모은 듯한 미소가, 미하일의 얼굴에 걸렸다.
“내가 미하일이 맞냐고 물었지?”
순간, 루퍼스리안은 제 눈을 의심했다.
파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온전한 붉음이, 그러나 그때와 달리 안온한 애정을 품은 채, 잠시 미하일의 눈 색을 채색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내 대답이야.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미하일이기를 바라. 그런 한, 나는 미하일이야. 다른 어떤 존재도 되지 않아. 절대로.”
찰나였을 뿐이었다.
붉은빛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순수하고 다정한 금빛만이 남아,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한 소녀를 사랑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 이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마지막 방문자가 코넬이리라는 건 예상한 바였지만, 대뜸 이런 말부터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영지로 내려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
“영지로 간다고?”
“예. 저번 일에 대해 자숙의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가족들이 함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말입니다.”
에릴이 가장 공들여 세뇌했던 이가 바로, 가르텐 공작부인이다.
안 그래도 딸을 잃고 마음이 병들어 있던 공작부인에게는 타격이 유달리 컸으리라.
책봉식 이후에 공작부인이 영지로 내려가 요양할 예정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만 공작과 코넬까지 함께 간다는 사실은, 지금 코넬의 입에서 나온 말로 처음 알게 되었다.
아나트리샤마저 말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아예 안 오거나 하는 건 아니지?”
그러자 코넬은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실연했다고 영영 수도로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 속이 좁은 이로 보이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원래 가르텐 가문은 중앙 사교계에 그다지 참여를 안 하니까.”
그래서 다시 영지로 내려가 이전까지 하던 것처럼, 굴속에 박힌 여우처럼 지내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코넬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굳이 위로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전부 저희 가문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요.”
아직도 코넬은 에릴의 세뇌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남은 모양이다.
“너와 네 부모만이 아니잖아. 대다수의 사람들이 에릴의 세뇌엔 저항하지 못했는걸. 몇 번이나 말했지만, 너와 네 가문의 잘못이 아니야.”
이에 대한 코넬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황녀님께서 저와 저희 가문을 그만큼 생각해 주시는 건 기쁘지만, 그래도 저희의 반성까지 강제로 거둬 가지는 말아 주십시오.”
“응?”
“자책은 이미 충분히 했고, 또 황녀님께서 그때 해 주신 말에 깨달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반성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후련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황녀님의 명대로 그때의 일을 이제 저희 가문과 저만의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건 정말 다행이지만…… 그런데 왜 굳이 반성을 해?”
잘못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으면서, 왜 굳이 또 반성을 한단 말인가?
코넬은 더없이 엄격하게 대답했다.
“저와 저희 가문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지. 그리고 나중에라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반성해서 개선점을 찾아보려는 것뿐입니다.”
그야말로 깐깐함과 꼬장꼬장함을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가르텐 가문다웠다.
아나트리샤는 자신의 걱정이 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환하게 웃었다.
“기쁘신 건가요?”
“당연하잖아. 코넬은 내 친구인걸. 그래서 난 코넬이 자기 잘못도 아닌 걸로 스스로를 벌주는 짓은 안 했으면 했거든.”
“안 할 겁니다. 황녀님이 바라시는 게 그거니까요.”
그리고 인사의 키스를 아나트리샤의 손등에 떨어뜨리며, 그는 이번에도 전혀 예상 못 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
“어쩌겠습니까. 이런 성격이라서요. 기회만 생기면 호시탐탐 노릴지도 모릅니다. 그분께는 늘 긴장하시라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황녀궁을 나가는 코넬의 표정은, 늘 그녀의 앞에서는 제 감정을 다 추스르지 못해 어쩔 줄 모르던 어수룩한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
길고 긴 알현이 끝난 뒤, 나는 드디어 미하일에게 향할 수 있었다.
‘보고 싶어!’
이 생각 하나만이 오롯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실 아침에도 보았다. 일어나자마자 달려가서, 함께 아침을 먹고, 정원을 거닐고, 차도 마신 다음.
한계까지 함께 있다가 일하러 나온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오래 보다 보면 질린다는데.
미하일은 볼수록 더 보고 좋았고, 또 보고 싶었다.
이렇게 그를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이 마치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가벼울 정도로.
그때, 등 뒤에서 엘제가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전하! 저희가 따라가기 힘듭니다. 내려와 주세요!”
“저희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오!”
응? 내려와?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뒤를 따르던 시녀들이 전부 저 멀리 작은 인형처럼 보였다.
“헉!”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고 설레서 그냥 붕 떠서 날아가 버렸던 모양이다.
기분만 날아가는 것 같았던 게 아니다.
어쩐지 아주 부끄러워져서, 나는 그런 적 없는 것처럼 ‘흠흠.’거리며 지상으로 내려와 천천히 우아하게 걸었다.
시녀들은 드디어 가슴을 쓸어내리고 뒤를 따라올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향한 곳은, 황녀궁의 유리정원이었다.
내 일이 끝난 뒤, 거기서 미하일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발걸음마다 묻어나는 설렘을 애써 누르며, 빠르게 걸어,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 입구에 시녀들과 기사들을 떼어 둔 채,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미하일과의 꽁냥꽁냥 타임은 단둘이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원 가장 깊은 곳, 전 대륙의 온갖 꽃들이 다 옮겨 심어진 정원의 중앙에 도착해서, 나는 그를 보았다.
“……!”
계절을 잊고 만발한 꽃들의 위에, 그가 누워 있었던 것이다.
미하일의 검은 머리카락이 흐드러진 꽃무덤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려 있었다.
이름조차 다 알기 힘들 정도로 모인 꽃 가운데에, 그의 머리맡에 핀 꽃은 내게 익숙했다.
눈처럼 흰 색의 크로커스.
언젠가, 정확히는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때에, 직접 따서 미하일의 침실에 자주 꽂아 두었던 꽃이다.
희고 소담스러운 꽃잎 사이로 노란 꽃술이 수줍게 모습을 숨긴, 일견 수수한 꽃.
그걸 굳이 미하일의 머리맡에 꾸준히 가져다 놓은 건, 우연히 들은 꽃말이 내 마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꽃의 향기가 미하일에게 닿는 한, 내 마음도 전해질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어. 기다릴 거야.’
흰 크로커스 그늘아래 눈을 감고 누운 미하일의 모습이,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심장이 덜컥, 한 것은.
다시 미하일이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그때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아서.
그의 앞에만 서면 나는 계속 나답지 않아지게 되고 만다.
두려움이라니.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인데도.
아니, 아닌가.
내가 두려움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이겨낼 뿐이지.
그 사실을 되뇌며, 나는 용기 내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행히 처음 한 걸음만이 어려웠을 뿐이다.
빠르게, 조금 더 빠르게.
곧 나는 전력으로 미하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폭, 하고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아찔할 정도로 짙은 꽃냄새와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꽃잎이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나는 울컥해서 미하일에게 어린애처럼 징징거렸다.
“빨리 눈 떠. 뜨란 말이야.”
그러자 미하일은 조금 놀랐는지, 반짝 눈을 뜨며 물었다.
“왜 그래, 리샤? 기분 안 좋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그냥……, 난 너 잠든 거 보면 너무 불안해. 또 얼마나 기다려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그렇다. 이건 미약하지만 분명히 트라우마였다.
미하일의 두 팔이 나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미안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 내가 알려줬잖아? 이럴 땐 어떻게 하라고?”
그러자 미하일은 푸스스 웃더니,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짙은 크로커스 향이 내 코끝을 간질이고.
꽃그늘 아래에서, 더없이 달콤한 입맞춤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이젠 절대 널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다시 코끝에 여린 꽃잎 같은 입맞춤이 내려와 닿았다.
“네가 날 기다릴 일은 없어. 내가 널 영원토록 기다릴 테니까.”
양쪽 뺨에 닿는 감촉이 애달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너도 나도 서로 기다린다는 건 그만큼 늘 떨어져 있다는 소리잖아.”
나와 미하일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우리는 오롯하게 서로만을 시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런 건 진짜 싫어.”
“사실……, 나도 싫어.”
한쪽이 기다린다는 건, 우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
그럴 일이 없는 것이, 함께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미하일의 입술에 뽀뽀한 뒤, 숨결처럼 달콤한 말을 불어 넣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내가 이 남자를 책임질 수밖에.”
“……진짜 그래 줄 거야?”
미하일은 입이 타는지 입술을 슬쩍 핥았다.
붉은 혀가 살짝 시야를 스쳐 가는 모습은, 조금 자극적이었다.
미하일은 사막에서 찾은 물 한 모금을 삼키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나에게 물었다.
거의 매달리듯.
“나와 영원히 함께해 줄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 지금 청혼한 거야?”
그러자, 미하일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안은 그대로 빙글 돌았다.
하늘과 땅이 한 바퀴 진탕이 되고.
미하일은 그대로 나를 안아 솜씨 좋게도 정원 한편의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고 내 앞에 순종적인 종처럼, 혹은 신도처럼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더없이 정중하고 다정하게 물었다.
“이렇게 부족하고, 또 위험할 수도 있는 존재지만. 그래도 감히 너를 욕심내고 싶어. 그것만이 전생에도 지금에도 나의 유일한 행복이고 이기심이야. 이런 나와 영원을 함께 해 줄래?”
반지나 보석은 필요 없었다.
이 세계 그 자체가, 이 두 번째 삶이, 곧 그가 나에게 준 선물이었으므로.
물론, 청혼 선물이 될 줄은 몰랐지만.
미하일의 검은 머리카락에 흰 크로커스 꽃잎이 달라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입술에 대며 웃었다.
그리고 꽃잎을 나와 미하일의 입술 사이에 댄 채.
잔웃음 속에 섞어 속삭임을 불어 넣었다.
“키스 해 주면.”
이지러진 꽃잎의 향기가 더없이 달콤하게 혀끝을 간질였다.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더욱 확실한 대답이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