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나는 김지석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대한 데스웜을 마주쳤던 게이트 안보다 둘이 있는 차 안이 더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선오 때문에 잘난 얼굴에는 면역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나보다.
김지석.
까만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몰아 드러난 굳은 눈썹과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
균형이 잘 잡힌 또렷한 이목구비.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회색빛의 수트까지.
누가 보더라도 되새겨볼 법한 남자였다.
현재는 각성 기관의 이사이지만 후에는 각성 기관 소속의 각성자들을 이끌게 된다.
각성 기관이 정부의 욕심에 휘청거리면서도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다 김지석 덕분이었다.
‘똑똑한 만큼 적도 많았고.’
안타깝게도 김지석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힘이 부족했다.
결국 박성현에게 죽은 최초의 각성자가 되었고 그것이 본격적인 전쟁의 시발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가호를 안 받았나?’
“혹시 김 이사님도 가호 받으셨습니까?”
“네? 아, 아니요.”
김지석이 조금 난처한 웃음을 띠었다.
“가호를 받는 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좀 지나다 보면 받을 수도 있겠죠.”
김지석은 후에 토끼 신의 가호를 받지만 그게 언제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각성 기관에는 가호자가 얼마나 됩니까?”
“각성 기관 내에는 꽤 있습니다. 게이트를 조사하는 파견 직원들은 대부분 가호자입니다.”
‘그럴 수밖에.’
각성 기관 사이트에 올라오는 게이트의 정보는 입장 자격을 가진 사람이 다가갔을 때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자격은 바로 신의 가호.
가호를 받은 사람, 즉 가호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게이트 앞에 서더라도 게이트의 정보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윤도아 씨나 다른 각성자 분들처럼 직접 게이트에 들어가 볼 용기는 없는 것 같아요.”
가호자가 게이트를 처음 클리어하고 전용 특성을 얻게 되면, 그때부터 각성자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런걸 보면 각성자분들은 정말 굉장합니다.”
김지석의 눈에 동경의 빛이 서렸다.
나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뿌듯했다.
나는 입가에 뜨려는 미소를 간신히 잠재우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른 각성자들은 활동을 안 합니까?”
“네. 주선오 각성자나 임시 관장님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 네 번째 각성자 이리나 씨는 가끔 모습을 비추긴 합니다. 종종 세 분이 게이트에 입장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나라면 치유계열의 전용 특성을 가진 각성자였다.
아직 이들에게는 무리일 A급 이상의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 같이 행동하는 모양이었다.
곧 익숙한 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 세워주시면 돼요.”
김지석이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그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김지석이 따라 내렸다.
“연락 주실 때는 아까 드린 명함에 있는 번호로 주시면 됩니다.”
김지석이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끝까지 깍듯한 사람이었다.
“좋은 결정 내리시길 기다리겠습니다. 같이 일하게 되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내 대답에 김지석이 다시금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무래도 저 미소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가의 사람들이 나를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야, 저거 윤도아 아냐?”
“응? 헐! 진짜네?”
“이 근처 사나 봐. 와. 아까 봤냐? S급 게이트 진짜 클리어하고 나왔잖아.”
“어, 봤지, 봤지.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커뮤니티에서 누가 그랬는데. 게이트 닫고 나오는 순간에 뒤에서 후광이 쫙 비춰서 무슨 신인 줄 알았다고.”
“아, 나도 그거 봤어. 그래서 절이라도 할 뻔했다며?”
이야기를 나누던 행인 둘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마터면 나도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입술을 꾹 깨물어 웃음을 참은 나는 종묘 앞에 있던 사람들의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떠올렸다.
통쾌했다.
그곳에 왔던 일반 사람들 대부분은 내 말을 믿지 못해 온 사람들.
직접 그 광경을 봤으니 이제는 나를 의심하는 말은 하지 못할 터.
게다가 경고까지 날렸다. 웬만한 악플러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갈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놈들의 악플은 이어지겠지만.
‘얼마든지 짓밟아주마.’
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 * *
집에 도착한 나는 몸의 모래를 씻어내며 머리의 잡생각들을 함께 털어냈다. 그리고 아까 받은 보상을 확인했다.
‘1회용 방어 스킬권은 남겨두고.’
방어나 회복 쪽의 스킬 및 아이템들은 후의 게이트들에서 위급상황을 대비해 아껴두어야 했다.
그리고 남은 스킬 레벨업권으로 염력을 2레벨로 올렸다.
[염력 lv.2]
[동시에 2곳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오를수록 동시에 제어할 수 있는 마나의 수도 증가하는 듯했다.
나는 곧바로 작은 마나막 두 개를 만들어냈다.
1레벨 때는 먼저 만들어뒀던 마나막이 해체되었지만, 지금은 두 개 모두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나를 더 만들자 역시 처음 만들었던 마나막이 사라졌다.
‘레벨이 10이 되면….’
어쩌면 동시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장면을 상상하니 기대감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빨리 레벨을 올려야겠어.’
두 개의 마나막을 이리저리 휘둘러본 나는 그것들을 해체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단은 실용적으로 염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나는 거실에서 신발 두 짝을 동시에 들어 올려 그 안의 모래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편하네.’
신발에서 떨어지는 모래들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거취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개의 이빨 무리냐, 각성 기관이냐.’
주선오의 권유를 받아들인다면 큰 고생은 없을 것이다.
지원은 지원대로 받을 수 있고, 궂은일은 주선오에게 시킬 수도 있으니까 편안할 거고.
나는 시험을 대비하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된다.
반면.
각성 기관에 소속된다면 고생길이 훤했다.
하지만 각성 기관이 바로잡히면 그만큼 각성자들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나는 대충 털어낸 신발을 내려두고 이번에는 옷들을 털기 시작했다.
시험을 생각한다면 각성 기관 소속이 맞겠지만.
‘뒷바라지는 질색인데.’
내게 누굴 챙겨줄 만큼 고운 심성은 없었다.
내가 고생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키워놔 봤자 나중에는 어차피 지들이 잘나서 큰 줄 알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기관에서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잠깐. 어차피 홍보가 목적인 거면 굳이 내가 거기서 활동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안세인이나 김지석의 말을 생각해보면 둘의 목적은 결국 많은 각성자들을 기관 소속으로 끌어들여 기관을 키우는 것이었다.
이미 내가 각성 기관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각성 기관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이름만 올려놓고 가끔 얼굴만 비추는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바로잡을 일이 생길 때만 가끔 개입하고.
‘이런 조건들만 걸어두면 거기도 괜찮을지도.’
나는 옷을 크게 털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은 끝났다.
‘주선오한테 연락해야겠다.’
나는 옷을 거둬 빨래통에 던져 넣었다.
바닥에 털어낸 모래가 가득했다. 나는 마나를 움직여 바닥의 모래들을 모았다.
‘공격도 공격이지만 일상에서도 참 유용하단 말야.’
가만히 앉아 팔짱을 낀 채 한곳으로 모이는 모래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굉장히 흐뭇했다.
내 앞에 모래가 수북이 쌓였다. 쓰레기통을 끌어다 살짝 기울인 채 모래들을 넣기 위해 마나를 움직였다.
“…어?”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사르륵.
모래가 마나에 스며들었다!
마나는 모래를 삼킨 채 형태를 만들어냈다. 모래가 위로 길쭉하게 솟아있었다.
모래는 내가 마나를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허공에서 모래들을 뱅글뱅글 돌리던 나는 문득 원리를 깨달았다.
‘형태가 고정되지 않은 물질이라면 흡수가 가능한 건가!’
나는 모래들을 쓰레기통에 넣은 후 서랍 한구석에 있던 라이터를 찾아 꺼냈다.
라이터를 켜고 마나를 움직이자. 모래처럼 불이 마나를 따라 움직였다.
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우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굉장한 발견이었다.
박성현도 마나에 모래나 물, 불 등을 섞어서 사용한 적은 없었다.
게이트 안에서도 근처에 물, 불 등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것들을 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속성 마법은 무시할 수 있겠어.’
회귀 전에는 마법사들을 상대하는 것이 가장 성가셨지만, 이제는 아니다.
만약 마법 공격을 받더라도 마나를 이용해 통제권을 빼앗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의아했다.
비전 마법을 얻고 나서 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비전 마법에 이어 원소까지 다룰 수 있게 되다니!
대체 남은 시험들이 어떻기에 나한테 이런 정도의 힘을 주는 건가 싶었지만.
‘상관없지.’
이 정도까지 오니 이제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같이 느껴졌다.
‘그냥 모조리 씹어 삼키면 그만.’
나는 핸드폰을 끌어당겨 주선오에게 연락했다.
[네.]
“윤도아예요.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저녁때 잠깐 뵙죠.”
[네. 제가 그쪽으로 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 * *
주선오가 근처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 밖으로 나갔는데 이상하게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어머, 학생! 큰일 났어!”
수군거리던 동네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더니 나를 붙잡고 말했다. 평소에 안면이 있던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나는 슬쩍 아주머니의 팔을 걷어내고는 물었다.
“뭐가요?”
“글쎄, 저쪽 골목에서 난리가 났어! 왜, 알지? 그 각성 기관장 주선오. 잘생긴 총각.”
“네.”
‘설마 주선오 왔다고 이 호들갑은 아니시겠지.’
“그 친구 지금 죽게 생겼다고!”
“네?”
“미친 사이비 놈들인지 뭔지 시커먼 옷 입은 놈 여럿이 그 총각을 공격하더라고! 일단 신고는 해뒀는데, 불안해서 원….”
“아. 알겠으니까 여기 계세요. 제가 가볼게요.”
나는 아주머니가 가리켰던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사이비 광신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100일 전부터 꾸준히 자신들의 세상이 올 거라 믿던 그놈들은 시작의 날을 기점으로 가호자와 각성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선오가 고작 그런 놈들한테 죽지는 않겠지만 이런 소란으로 동네가 시끄러워지는 건 사양이었다.
‘감히 우리 동네에서 피를 보려고 해?’
어두운 골목 안에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지는 않았다.
아마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모두 멀리 피해 있는 듯했다.
나는 가볍게 옆의 담장 위로 뛰어올라 골목 안을 바라봤다.
새카만 옷으로 온몸을 감싼 5명을 두고 고전 중인 주선오가 보였다.
막상 와보니 아주머니의 말처럼 심각한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생채기들이 있었지만, 저 정도로 죽을 리는 없었다.
‘하여간 호들갑은.’
속으로 혀를 내두른 나는 담장 위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괸 채 주선오를 지켜봤다.
회귀 전에야 나와 맞붙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녀석이었지만 그건 어쨌든 나중의 이야기.
지금은 어느 정도 실력일지 궁금했다.
‘흠.’
십여 분 정도 지켜본 결과.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을 제압하지 못할 실력은 아니었다.
주선오는 상대가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빈틈을 보고 칼을 휘두르려다가도 흠칫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공격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저놈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다칠 걱정이 없이 과감한 공격을 행하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주선오가 쓰러질 판이었다.
‘뭐든 새치기당하는 건 기분 나빠서 안 되겠네.’
“이봐요.”
내 목소리에 맹렬히 주선오를 공격하던 광신도 다섯 명이 멈칫하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 여기요.”
내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놈들이 나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흠칫 놀라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저 사람이랑은 내가 먼저 볼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선수 치시면 안 되죠.”
도둑 같은 놈들이 자기들끼리 뭉쳐 뭔가를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곧 한 놈이 외쳤다.
“사탄! 네 놈도 사탄이 분명하다! 감히 사탄들이 우리의 길을 막으려 들어?”
‘아…. 염병.’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놈이 내게 칼을 던졌다.
“허.”
기가 찬 한숨을 내쉬고는 날아오는 칼을 잡아챘다.
내가 각성자도 아닌 일반 사람이 던지는 칼 따위에 맞을 리가 없었다.
물론 각성자가 던졌더라도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순간 짜증이 치밀었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지금 이놈들을 정리해주면 주선오의 성격상 빚을 갚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최소 한 번은 부려먹을 수 있을 터.
나는 담벼락 위에서 내려와 바닥에 착지한 후 칼을 바로잡았다.
“너희가 먼저 시작한 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