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빚은 바로 갚는 게 신조라서.”
나는 칼을 던졌던 놈에게 칼을 되돌려줬다.
쇄액!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칼은 놈의 귀를 스쳐 뒤의 담벼락 깊숙이 박혔다.
“…!”
놈들이 당황한 사이 나는 놈들의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 명치에 주먹을 한 번씩 박아넣었다.
기술을 쓸 필요도 없었다.
놈들은 그대로 픽픽 쓰러졌다.
“…….”
주선오가 넋 나간 얼굴로 쓰러진 놈들을 바라봤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상황이 정리되자 주선오는 내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별거 아니에요.”
내 말에 주선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가까이서 보니 주선오의 팔에 조금 큰 상처가 있었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참, 낮에는 잘 봤습니다. 전 아직 혼자서 A급도 클리어하지 못했는데….”
나를 바라보는 주선오의 눈에 살짝 존경의 눈빛이 서려 있었다.
회귀 전에는 동등한 입장이었던 사람에게 이런 눈빛을 받자니 기분이 썩 괜찮았다.
“혹시 괜찮으면 말 좀 편하게 해도 되나요?”
며칠 전만 해도 서로 막말을 하던 사람에게 존대를 쓰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지난번 주선오에게 신분증을 보였기에 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편하게 하세요.”
주선오가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너도 편히 해. 어쨌든 보자고 한 건 전에 했던 제안 때문인데.”
주선오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맙지만 거절할게.”
“아….”
금세 주선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왜인지 알 수 있습니까?”
5일에 기관의 발표가 나면 주선오도 알게 될 사실이었다.
괜히 감췄다가 그때 가서 배신감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으니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각성 기관으로 갈 생각이라서.”
“…네? 기관은….”
주선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아.”
내 짤막한 대답에 잠시 나를 보던 주선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게 있으시겠죠.”
“맞아. 대신에.”
내 말에 주선오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나랑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건 어때?”
“협력…, 관계요?”
주선오가 되물었다.
“그래.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관계.”
물론 생략된 말이 있었다.
‘내가 필요하다면 네가 도와주는.’
의외의 제안이었는지 주선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야 좋지만. 제가 도울 일이 있을지….”
주선오가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주선오를 격려했다.
“물론이지. 사람이 어떻게 혼자 모든 걸 처리하겠어.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고.”
내 말에 주선오가 조금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내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주선오가 내 손을 맞잡았다.
* * *
다음날, 찾아간 각성 기관은 어제와는 다르게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특히 가호자 등록처에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야, 저거 봐. 저기, 윤도아 아냐?”
“헐! 진짜 왔어!”
“인증샷 찍어야 하는 거 아냐?”
가호자들이 호들갑을 떨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근처의 한 직원에게 물었다.
“김 이사님 계십니까?”
“…어, 아, 네. 아, 잠시만요!”
당황해하던 직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빠르게 걸음을 옮겨 이사실로 향했다.
곧 이사실에서 나온 김지석이 나를 발견하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활짝 웃는다.
“윤도아 씨!”
나는 김지석에게 살짝 고개를 꾸벅였다.
김지석의 표정에는 이내 미안함이 섞여들었다.
“미리 연락해주셨으면 모시러 갔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관장님도 계십니까?”
“네. 이쪽으로.”
잠시 관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김지석이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오십시오.”
안에 있던 안세인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오. 어서 와요. 앉아요, 앉아.”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김지석을 불러 세웠다.
“차는 됐습니다. 같이 이야기하시죠.”
“아. 알겠습니다.”
김지석이 자리에 앉자 내가 입을 열었다.
“어제 주신 제안.”
둘의 눈빛이 기대감에 반짝였고.
“수락할게요.”
내 말이 끝나자 둘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었다.
“단, 조건이 몇 개 있어요.”
“말씀하세요.”
안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석은 탁자 위에 있던 노트북을 펼쳐 자신의 앞에 두었다.
“어제 말씀하셨던 대로 지금, 충분히 각성 기관이 활성화되고 있죠?”
관장실 밖의 상황만 봐도 어제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안세인과 김지석도 그 부분은 쉽게 인정했다.
“맞아요. 확실히 가호자 등록이 몇 배나 늘어났어요.”
“이 정도로 활기차게 기관이 돌아가는 건 처음입니다.”
김지석의 목소리가 상당히 들떠 있었다.
“제 역할은 그냥 그 정도로 끝낼게요. 기관에 이름만 올려두고 그냥 가끔 얼굴을 비추는 정도요.”
“네? 그럼….”
“같이 가호자를 각성시키거나 그런 건 안 해요.”
내 단호한 이야기에 안세인이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
“대신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드릴게요.”
안세인과 김지석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요?”
“현재 각성자 중에서 말인가요?”
“아뇨.”
생각해둔 사람은 있었지만,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괜히 잘못 둘러대다가 말이 틀려지면 곤란해질 수 있었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가호자 중에서 찾아보려고요.”
“흠…. 그래요. 윤도아 씨가 찾아준다면 믿을만한 사람이겠죠.”
김지석이 노트북의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그럼 기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나요?”
일주일이면 될 것 같았지만, 만약을 위해 기간을 늘려뒀다.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한 달이라. 흠. 그래요.”
안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알겠어요. 빠를수록 좋겠지만, 우리도 어차피 정부 쪽이랑 정리할 게 남았으니 각성자를 키우는 건 다음 달부터 시작해도 크게 늦지는 않을 것 같네.”
안세인의 말에 김지석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관의 실권을 저한테 주세요.”
어찌 보면 기관장의 자리를 넘기라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세인은 그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실권?”
“네. 물론 모든 일에 참견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기관의 일에 참여할 때는 무조건 제 말에 따라주셨으면 해요.”
“뭐. 그 정도는 가능하죠.”
안세인이 흔쾌히 대답했다.
“소속 기간은 1년으로 하고요. 그 이후에는 다시 계약하든 그때 가서 판단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신할 사람을 찾아봐야하니까 가호자 리스트를 좀 보고 싶네요.”
“얼마든지요.”
내 요구들이 별 문제없이 모두 수락되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기색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 정도로 해두죠.”
계약금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한 달에 1억으로 결정되었다.
이름만 빌려주는 것에 비하면 꽤 거한 금액이었지만 준다는 걸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계약서까지 작성을 완료하자 안세인이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좋네요. 이제 같은 소속이니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리고 전담으로 윤도아 씨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안세인이 김지석을 바라봤다. 김지석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김 이사님이 직접? 괜찮겠어요?”
조금 걱정스러운 물음이었다.
아무래도 기관의 이사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내 비서 노릇까지 할 수 있겠냐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김지석은 이미 결정을 내린 표정이었다.
“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안세인이 다시 나에게 말했다.
“앞으로 공식적인 일들은 김지석 이사를 통해서 연락하도록 하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김지석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살짝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기관이 정부의 소속으로 넘어간다는 발표가 있을 예정이에요. 그때 윤도아 씨가 각성 기관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할 생각인데 괜찮겠어요?”
“네.”
“혹시 그 자리에 함께 가줄 수 있겠어요?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말로만 공표한다면 거짓말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상당히 귀찮은 자리였다.
적어도 1시간 정도는 얼굴을 비추고 있어야 할 테고 나에게 쏟아지는 질문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세인의 요청을 수락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있을 회견장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전 기관장 주선오와 정식으로 기관장을 맡게 될 안세인, 그리고 주선오의 무리에 함께할 이리나까지 현재 활동 중인 각성자들이 모두 모인다.
거기에 정부 인사들과 경찰들, 수많은 기자까지.
이러한 기회를 놓칠 광신도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앙심을 감춘 채 기자 활동을 해오던 광신도들이 각성자들을 공격하는 작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광신도들은 제압되지만 많은 부상자가 생기고 기자회견 자체도 엉망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광신도들은 그 일을 계기로 더 자신감을 얻어 활개 치게 된다.
‘그 꼴을 가만 놔둘 수는 없지.’
“가서 얼굴은 비추겠지만, 개인적으로 질문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최대한 귀찮은 일은 피하고자 조건을 달았다. 안세인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건 나한테 맡기고, 내일 회견에 늦지 않게만 와줘요.”
“알겠습니다.”
안세인과 인사를 나눈 후 관장실을 나와 김지석에게 물었다.
“가호자, 각성자 리스트. 지금 볼 수 있나요?”
“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김지석이 나를 가호자 등록처 뒤쪽의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받은 가호자 등록 서류는 여기에 보관하고 있지만, 지방에 사시는 분들은 사실 이곳까지 와서 등록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방에도 지부가 있긴 하지만 아직 없는 곳이 더 많고요. 이런 불편함 때문에 아마 가호를 받았어도 등록하지 않은 분들이 꽤 많을 거예요.”
김지석이 방 안의 컴퓨터 앞에 앉아 기관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금세 리스트를 열었다.
“여기 취합해놓은 리스트입니다. 기관에서도 혹시 몰라 열람을 제한해놓은 리스트입니다.”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해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리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김지석이 공손하게 인사한 후 방을 나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 먼저 가호자 리스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등록된 가호자는 총 삼백 여 명이었다.
꽤 많은 숫자였지만 대다수는 각성 기관의 게이트 정보 수집을 위한 파견 직원이었고 일반 사람의 숫자는 오십여 명뿐이었다.
‘하나씩 살펴보는 건 다음에 하고.’
일단은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나는 빠르게 리스트를 넘겼다.
그리고 곧 익숙한 사진과 이름을 보고 손을 멈췄다.
‘있다!’
[권재경]
[푸른 늑대 신의 가호]
[공포를 모르는 늑대]
회귀 전 내가 몸담았던 공포의 늑대 무리의 단장이자, 내가 성장하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단장님이라면.’
각성 기관의 가호자나 각성자를 키우는데도 제격일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권재경의 주소를 입력했다.
사실 이 리스트에 권재경이 없었다면 권재경을 찾는 것이 조금 힘들어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권재경의 성격상 가호를 받은 즉시 등록했으리라 판단했고 역시나였다.
‘단장님한테는 빚진 게 참 많은데….’
나는 다시 핸드폰을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각성자 리스트도 한 번 봐둬야겠다.’
지금까지 등록된 각성자는 나를 포함해 여섯뿐이었다.
[주선오]
‘주선오는 넘어가고.’
[신교진]
[소 신의 가호]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소]
[전용 특성 : 백발백중]
두 번째 각성자였다.
신교진.
소 신의 가호를 받은 이후로 뭘 하든 운이 받쳐줘서 지금은 게이트에 무관심할 것이었다.
[안세인]
[곰 신의 가호]
[재주넘는 곰]
[전용 특성 : 곰의 앞발]
안세인.
다음 각성 기관장의 자리에 앉지만, 후에 정부의 말도 안되는 요구들에 질려 주선오처럼 따로 무리를 만들어 독립하게 된다.
나보다 열 살 이상이 많았지만 회귀 전 안세인의 주먹은 버텨내기에 꽤 까다로울 정도였다.
[이리나]
[여우 신의 가호]
[이치를 깨달은 여우]
[전용 특성 : 생명의 이치]
유일하게 치유 능력을 가진 각성자였다. 덕분에 게이트 안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정시언]
[매 신의 가호]
[발톱을 감춘 매]
[전용 특성 : 매의 발톱]
다섯 번째 각성자 정시언은 회귀 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내가 각성하기 전에 게이트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실력이 좋았다며 정시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윤도아]
‘뭐, 나도 패스하고.’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일치했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신교진과 정시언도 조만간 다시 활동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그때를 대비해 미리 이들의 연락처를 저장했다. 그리고는 리스트를 닫고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김지석이 내게 물었다.
“이제 댁으로 가십니까?”
“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오늘은 괜찮습니다.”
나는 김지석의 호의를 거절했다. 어제처럼 차에 둘이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불편함이 앞섰다.
김지석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시간에 맞춰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