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헉!”
유지은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나는 유지은의 팔을 잡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우리의 앞으로 떨어진 새빨간 액체는 바닥 위에 넓게 펼쳐졌다.
그러더니 곧 빠르게 모여들어 위로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사람의 형체를 취했고 중절모와 지팡이의 형태까지 만들어냈다. 그 형태는 미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레부.’
회귀 후, 이렇게 만나게 되니 굉장히 반가웠다.
놈의 정보를 살펴보니.
[레부]
[악덕 아이템 보부상]
[불을 다룰 수 있는 상급 불꽃 슬라임]
간단한 정보들이 떠올랐다.
이놈에게 악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거래 대상이 각성자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부는 상대가 누구든 그냥 자신이 흥미가 동하면 아이템을 팔아넘겼다.
그래서 이놈의 주 고객 중에는 성가신 상위 몬스터들도 있었다.
또한 모래 슬라임 모부와 마찬가지로 거래를 위해서는 이놈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놈의 얼굴에 가느다란 세 개의 곡선이 그려졌다.
엎어놓은 그릇의 모양으로 휘어진 두 개의 곡선의 틈이 살짝 벌어졌다.
놈이 천천히 우리를 살폈다.
곧 웃고 있던 입의 틈이 벌어지며 놈이 말했다.
“쿄쿄쿄쿄. 실례합니다. 놀라신 모양이군요.”
유지은이 놈의 기괴한 외모 탓인지 경찰봉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런 유지은의 팔을 잡았다.
“아뇨. 하지 마세요.”
유지은이 긴장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경찰봉을 내렸다.
“쿄쿄쿄. 판단력이 좋은 분이군요, 당신은.”
그러더니 놈이 손을 뻗어 중절모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간들. 상급 슬라임인 레부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저렇게 신사의 탈을 쓰고 있지만 한 번 신경이 거슬리면 거침없이 불길을 내뿜는 놈이었다.
저놈을 붙잡으려면 일단 놈의 신경을 긁어야 했다.
섣불리 덤벼들었다가는 신사랍시고 싸움을 피해 게이트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악덕 아이템 보부상.”
내 중얼거림에 레부가 화들짝 놀라는 모션을 취했다.
“쿄? 저를 알고 계십니까? 영광입니다. 하지만 악덕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쿄쿄쿄. 그래도 알아봐 주셨으니 특별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레부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훅 튕겼다. 그러자 손의 일부가 튀어나와 내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나는 그것을 낚아챘다.
“레부의 조각입니다.”
물방울 모양의 붉은 보석이었다.
“10개를 모으면 시험 없이 저에게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쿄쿄쿄.”
‘쯧, 이놈의 쿠폰제.’
나는 레부의 조각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서 이번 시험은?”
“쿄쿄쿄쿄쿄.”
레부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너무 성급하시군요. 일단 옆의 분을 위해서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유지은을 바라봤다. 유지은은 무슨 일인지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한발 물러섰다.
“쿄쿄쿄쿄. 감사합니다.”
레부의 시선이 유지은에게 향했다. 유지은이 흠칫 놀라며 경찰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시다시피 전 아이템 보부상입니다. 아이템을 주워 먹고 그것을 팔면서 소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소는 무슨.”
회귀 전 저놈이 저질렀던 일들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레부의 시선이 잠시 내게 향했다.
“…쿄. 설명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쿄흠.”
레부가 말이 끊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쓰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바로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어 눈 옆에 가져다 댔다.
“여러분이 온 이곳은 C급 아이템 게이트입니다. C급. 아주 쉬운 곳이지요. 그래서 저도 난이도에 맞춰서 아주 쉬운 시험을 낼 겁니다.”
레부가 다시 손을 내려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었다.
“이 시험을 통과하시면 보상으로 아이템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과하지 못한다면요?”
유지은이 물었다. 레부의 입이 다시 호선을 그렸다.
“쿄쿄쿄쿄. 그건 직접 겪어보시면 됩니다.”
유지은이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레부가 양손으로 지팡이를 잡으며 물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유지은을 돌아보자 유지은이 살짝 고개를 끄덕 여보였다.
“쿄쿄쿄. 그럼 일단 시험 방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레부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 내려찍었다.
그러자 레부와 우리 사이의 바닥에 작은 선물상자가 나타났다.
“열어보십시오.”
레부의 말에 내가 유지은에게 말했다.
“열어보세요.”
유지은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다시 한번 상자를 가리켰다.
천천히 상자로 다가간 유지은은 경찰봉으로 상자의 뚜껑을 슬쩍 밀어 올렸다.
덜컥.
피융!
“꺅!”
안에서 작은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유지은이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쿄쿄쿄쿄! 잘하셨습니다.”
상자의 위에 레부의 조각과 함께 글자가 떠올라있었다.
[시범단계 통과]
“시험은 그런 방식입니다. 상자를 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끝. 간단하지요? 쿄쿄쿄쿄.”
레부가 지팡이로 자신의 조각을 슥 밀어 유지은에게 보냈다.
“그건 앞으로도 많이 이용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유지은이 조심스레 레부의 조각을 받아들자 레부가 다시 지팡이를 툭 내리쳤다.
그러자 열린 상자가 사라지고 이번에는 상자 2개가 나타났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상자를 여십시오. 0/1]
그와 함께 퀘스트 내용이 떠올랐다. 유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글을 읽었다.
“이렇게 상자의 개수는 점점 늘어납니다. 단계는 총 5단계. 준비되셨으면 시작하시지요. 쿄쿄쿄.”
“이번엔 제가 열게요. 잠깐 물러나 계세요.”
내가 유지은에게 손짓했다. 여기서는 어떤 걸 선택하더라도 함정일 것이다.
나는 허리 뒤에 매어뒀던 심연의 불꽃을 꺼내 들었다.
“쿄오? 상당히 좋아 보이는 아이템이군요.”
레부가 내게 허리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이템을 주워 먹는 슬라임의 본능이 반응한 것이리라.
“내 거에 손대면 가만 안 둬.”
내 말에 레부가 허리를 바로 펴며 웃었다.
“쿄쿄쿄쿄쿄! 전 주인이 있는 아이템은 먹지 않습니다!”
‘대신 죽이고 먹겠지.’
코웃음을 친 나는 오른쪽에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쇄액!
상자 속에서 칼이 튀어나왔다.
‘역시.’
나는 심연의 불꽃으로 내게 날아오는 칼을 쳐냈다.
카앙!
“쿄!”
레부에게 날아간 칼이 놈의 복부에 꽂혔다.
“놀랐습니다! 일부러 저한테 날리신 겁니까? 쿄쿄쿄.”
칼이 레부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그럴 리가.”
내 천연덕스러운 말에 레부가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쿄쿄쿄.”
그러다 놀란 유지은을 보며 설명했다.
“사실 이번 단계는 두 번째 시범단계였습니다. 잘못된 상자를 선택한다면 그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거지요, 쿄쿄쿄! 재미있지 않습니까?”
레부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유지은은 하나도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잘못 선택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유지은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원하는 걸 얻으려면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쿄쿄쿄쿄!”
나는 아직 열리지 않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퐁!
글자가 떠올랐다.
[두 번째 시범단계 통과]
[1단계로 가기 위한 상자를 열었습니다. 1/1]
“이제 방식은 잘 아시겠지요? 그럼 시험을 시작합니다. 쿄쿄쿄쿄.”
레부가 한껏 웃어젖히더니 다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껏 바닥에 압축되었던 놈은 곧 쏘아 올리듯 위로 튀어 올랐고 조금 전 떨어졌던 천장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4개의 상자가 나타났다.
[2단계로 가기 위한 상자를 여십시오. 0/1]
“.......”
유지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자를 내려다봤다. 내가 모른 척 물었다.
“혹시 무슨 스탯 있으십니까?”
“어…. 전…. 민첩이랑 후각이요.”
나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후각? 꽤 유용한 스탯이네요.”
“음. 네. 가호를 받은 이후로 확실히 후각이 예민해졌어요. 평소에는 맡지 못하던 냄새도 맡게 됐고…. 지금 여기도….”
유지은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뭔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괜찮으시면 제가 잠깐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이제 알아서 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유지은은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상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한 상자를 선택했다.
“이거 열게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은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경찰봉으로 뚜껑을 젖혔다.
[1단계 통과]
[2단계로 가기 위한 상자를 열었습니다. 1/1]
“와!”
자신의 추측이 맞은 것이 기뻤는지 유지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뭔가 아시겠어요?”
“네. 알 것 같아요.”
이번에는 상자 8개가 나타났다.
“2배로 많아지는 걸까요? 5단계까지 있다고 했으니까…. 64개….”
유지은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물었다.
“제가 또 골라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쉽게 정답지를 찾기 위해 데려왔는데 먼저 나서주기까지. 거절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지은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차분히 상자들을 살펴보던 유지은이 상자 하나를 골랐다.
“이거로 할게요.”
유지은이 조금 자신감이 붙은듯 살며시 상자를 열었다.
덜컥.
[2단계 통과]
[3단계로 가기 위한 상자를 열었습니다. 1/1]
“오예!”
유지은이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나 역시 기뻤다.
유지은의 후각 덕분에 게이트를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쿄쿄쿄쿄. 꽤나 운이 좋군요. 이제 이 방은 좁으니 다음 방으로 옮겨볼까요?”
천장에서 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앞쪽의 벽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벌어졌다.
이어진 방은 조금 더 컸고 바닥에는 16개의 상자가 놓여있었다.
“이번에도 가능합니까?”
유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역시 단번에 다음 단계로 가는 상자를 찾아냈다.
가볍게 3단계까지 통과하자 레부가 조금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쿄오오? 조금 이상하군요. 운이 너무 좋은 거 아닌가요? 쿄쿄쿄쿄. 일단은 다음 방입니다.”
더 커진 다음 방에는 32개의 상자가 있었다.
유지은이 또 해냈다.
[4단계 통과]
[마지막 단계로 가기 위한 상자를 열었습니다. 1/1]
“쿄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합니다. 상자가 투명했던가요?”
레부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방은 상자로 바닥에 가득 차 있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64개일 것이다.
“쿄오오.... 마지막 단계군요.”
레부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재미없어?”
천장을 보며 물었지만 레부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근데 어쩌지? 마지막까지 한 번에 통과해버릴 것 같은데?”
내 말에 오히려 유지은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단계를 한 번에 통과하면 추가 보상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유지은이 나를 말리려 했지만 나는 그런 유지은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곧 천장이 열리더니 슬라임이 비죽 튀어나왔다.
놈의 젤리 속 불의 일렁임이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커져 있었다.
‘열받기 시작했네.’
“...쿄쿄. 아직 마지막 단계가 남았습니다만?”
“보나마나지, 뭐. 별것도 아닌 시험인데 틀릴 리가.”
“…실패한다면요?”
“실패? 안 하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레부의 일렁임이 더욱 커졌다. 그걸 본 유지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쿄쿄쿄쿄쿄.”
슬라임이 조용히 웃었다.
“좋습니다. 만약 한 번에 찾아내신다면 추가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쿄쿄쿄쿄쿄.... 대신.”
슬라임의 입이 직선을 그렸다.
“실패하시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물론.”
내 대답을 들은 슬라임이 조용히 웃으며 천장으로 사라졌다.
“…뭘 믿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유지은이 불안한 기색을 비쳤다.
“유 경장님 믿고요.”
내 뻔뻔스러운 대답에 유지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처럼 고르시면 돼요. 제가 저질렀으니 틀려도 뒷감당은 제가 해요.”
유지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스탯이 틀릴 일은 없었다.
“하….”
영 불안해 보였지만 유지은은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신중하게, 하나씩.
유지은은 상자들을 살폈다.
그리고.
한 상자를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