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마지막 단계 통과]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게이트를 나가기 전 보상을 확인하십시오.]
“와!”
유지은이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곧 방 안의 상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천장이 덜컥 열리더니 다시 한 번 슬라임이 쏟아져 내렸다.
아까와 같은 형체를 갖춘 레부가 나타났다.
“쿄….”
레부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놈의 눈치를 보던 유지은이 슬쩍 내 뒤로 빠졌다.
“자. 보상 내놔. 추가 보상도.”
내 말에 레부의 얼굴이 내게 향했다.
“의심스럽습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이라니. 누가 들으면 사기라도 친 줄 알겠네.”
“쿄오오….”
레부가 턱을 톡톡 두드렸다.
“좋습니다. 약속은 약속. 추가 보상까지 총 두 개씩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레부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다섯 개의 상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보상 역시 랜덤입니다. 저도 어떤 아이템이 선택될지는 모릅니다. 좋은 아이템도 있겠지만 좋지 않은 것도 있을 겁니다. 어디 골라보십시오. 먼저 그쪽 인간.”
레부가 유지은을 가리켰다. 유지은이 허락을 구하듯 나를 바라봤다.
“고르세요.”
내 대답에 유지은이 앞으로 걸어가 상자들을 살폈다.
보상은 모두 레부의 몸 안에 있던 것들이라 퀘스트를 할 때처럼 스탯을 이용한 편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퀘스트를 진행할 때보다 더욱 신중해 보였다.
레부가 그런 유지은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명심하십시오. 가장 먼저 연 상자 두 개의 보상만 획득이 가능합니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유지은이 곧 상자를 선택했다.
“일단 이거 할게요.”
“좋습니다. 열어보시죠.”
유지은이 상자 하나를 열었다.
덜컥!
“이건….”
유지은이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경찰봉과 비슷하게 생긴 짤막한 철편이었다.
“쿄오. 나름대로 괜찮은 B급 아이템입니다.”
레부가 살짝 아쉽다는 듯 말했다.
“딱 좋네요. 사용도 익숙하실 테고.”
내 말에 유지은이 철편을 몇 번 휘둘러보았다. 그러더니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게 차이가 너무 나는데요.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
“그건 연습하셔야죠. 게이트에 들어와서 경찰봉 휘두르실 건 아니죠?”
유지은이 살짝 입을 비죽였지만 나름 만족한 듯 했다.
그리고 남은 네 상자 중 하나를 더 골라 그것을 열었다.
두 번째 상자에서는 레부의 조각이 나왔다.
꽝이었다.
“쿄쿄쿄. 레부의 조각! 축하드립니다. 쿄쿄쿄쿄!”
레부가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웃음을 터트렸다.
레부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보상이었다.
조각은 10개를 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적어도 레부와 8번 이상을 더 만나야 하는 것.
자신의 아이템도 지키고 고객층도 넓히는 일석이조의 보상이었다.
유지은은 실망한 표정으로 조각을 챙겨 뒤로 물러섰다.
“쿄쿄쿄. 그럼 다음은….”
레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조금 가라앉았던 불꽃이 나를 보자마자 다시 이글거렸다.
레부가 바닥을 두드렸다.
새로운 상자 다섯 개가 나타났다. 나는 가만히 상자들을 살폈다.
레부는 가장 처음 연 두 개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모든 상자를 동시에 열면?
레부의 반응이 기대되어 웃음이 절로 났다.
‘마나막.’
나는 염력으로 기다란 나무 막대 같은 마나막을 만들어냈다.
나는 미소를 띤 채 그것을 이용해 모든 상자의 뚜껑을 동시에 열었다.
덜컥.
“어라. 다 열렸네?”
내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
가만히 상자들을 내려다보던 레부의 얼굴이 내게 향했다.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충분히 열받았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상자 연 건데.”
그리고는 덧붙여 물었다.
“동시에 다 열렸으니까 다 가질 수 있는 거 아냐?”
“…쿄…. 쿄쿄쿄….”
레부가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상당히 길게 이어졌고 레부의 불길이 조금씩 주변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유지은이 겁먹은 듯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좋습니다. 규칙은 규칙이니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만, 들어보시겠습니까?”
레부가 물었다.
나는 팔짱을 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
“지금 상자에 들어있던 아이템들을 확인해본 결과 최대 A급의 아이템이었습니다.”
레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상자들의 안에서 다섯 개의 아이템이 솟아올랐다.
[A급 1회용 회복 물약]
[C급 너클 장갑]
[B급 1회용 방어 물약]
[레부의 조각x3]
[C급 가죽 방어구]
“만약 이것들을 전부 반환하신다면 레부의 조각 10개가 됩니다. 그러면 그 조각들로 제가 가진 아이템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다면 S급 아이템의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레부가 제안했다.
놈의 입장에서는 낮은 급의 아이템을 여러 개 가진 것보다는 S급의 아이템 하나를 가진 것이 더 이득이었다.
하지만 저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추가적인 대가를 바라는 것.
내가 모른 척 물었다.
“그래? 너무 나한테 이득인 거 아냐?”
“물론 그렇게만 하면 제가 손해입니다. 그렇게 해드리는 대신, 저와 잠깐 놀아주시면 됩니다. 쿄쿄쿄쿄.”
레부가 다시 웃었다.
나도 레부를 따라 웃었다.
“놀아? 재밌겠네.”
놈에게 놀이는 곧 싸움.
바라던 바였다.
내 대답에 유지은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냥 5개 받아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잠깐 놀아주고 S급 아이템이라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죠. 유 경장님은 먼저 나가시는 게 낫겠어요.”
사실 노리는 건 S급 아이템이 아니라 저놈 자체였지만.
일단은 유지은을 내보낸 후 놈에게 다시 딜을 할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은 자신의 제안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쿄쿄거리며 웃었다.
“그러시겠습니까? 그러면 출구를 열어드리겠습니다.”
“열어.”
내 말에 레부가 출구를 열었다.
유지은은 눈앞에 나타난 출구 게이트를 보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게 제 걱정이에요.”
내 대답에 유지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유지은이 출구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곧 게이트가 사라졌다.
“자. 그럼.”
내가 다시 레부를 바라봤다.
“뭐 하고 놀까?”
“쿄쿄쿄.”
레부가 웃었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어떤 것을 요구할 줄 알고.”
“뭘 몰라. 뻔하지. 덤벼.”
내 말에 레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쿄쿄쿄쿄쿄쿄!”
다시 놈의 불길이 크게 일렁였다.
“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 대신. 나도 조건 좀 걸자.”
레부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쿄쿄쿄쿄! 뭡니까?”
“내가 이기면 너 재취업시켜줄게.”
내 말을 들은 레부의 입이 일직선을 그렸다.
“…쿄? 재취업 말입니까?”
아무래도 한국어 실력이 조금 부족한 모양이었다.
“널 내 수하로 받아준다고.”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레부는 기가 찬 모양인지 몸의 불길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 더욱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쿄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제가 이긴다면 당신이 제 부하가 되는 겁니까?”
“아니. 그럴 일 없지. 넌 나 못 이겨.”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레부에게는 도발로 여겨질 것이다.
“…좋습니다. 건방진 콧대만 꺾어줄 생각이었지만 통째로 삼켜야 속이 시원하겠습니다.”
레부가 무너져 내렸다. 바닥을 제외한 방 안이 순식간에 레부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뒤덮였다.
부웅!
뒤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날아왔다.
“치사하게 처음 공격부터 사각이야?”
나는 핀잔을 주며 살짝 옆으로 몸을 피했다.
내 옆을 스쳐 날아간 창이 앞쪽 벽을 통해 다시 레부의 젤리로 흡수됐다.
휙!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단검이 날아왔다.
나는 심연의 불꽃을 뽑아 날아오는 단검을 쳐냈다. 튕겨진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미없네. 더 많이 내보내봐.”
내 말에 붉은 방이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는 온갖 무기들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빠르게 그림자 단검을 마저 뽑아 들고 날아오는 무기들을 쳐내거나 피했다.
챙!
카앙!
내가 맞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쏟아지던 무기들의 비가 멈췄다.
그러더니 잔뜩 가라앉은 레부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놈이…!”
방안이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무기가 아니라 레부의 젤리가 직접 쏘아져 들어왔다.
무기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를 직접 붙잡아 삼키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철퍽!
내가 피해낸 레부의 젤리가 바닥에 붙었다. 천장과 바닥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불줄기가 생겨났다.
나는 가볍게 움직여 계속 쏟아지는 레부의 젤리들을 피했고 곧 방 안은 레부의 붉은 거미줄로 메꿔졌다.
슬슬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들이 적어지기 시작했다.
레부는 불꽃 슬라임이지만 그 몸체는 완벽한 불이 아닌 젤리.
즉 베어낼 수 있는 몸체였다.
하지만 아이템을 삼키는 슬라임이기 때문에 잘못 칼을 휘둘렀다가는 오히려 칼을 내어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회귀 전에 이놈을 붙잡을 때도 그 점이 가장 골치 아팠다.
레부가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를 인식한다면, 놈은 그것을 얼마든지 삼킬 수 있었다.
그래서 놈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빼앗아 둔 후에야 공격이 가능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칼날이라면.’
나는 두 개의 마나막을 만들었다. 대신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작게. 단검의 형태를 닮도록.
“마나 단검.”
서걱.
마나 단검이 내게 날아오던 레부의 붉은 거미줄을 잘라냈다.
“무슨…?”
레부가 갑자기 잘려 나간 자신의 불줄기를 보며 당혹감을 내비쳤다.
나는 오른손의 심연의 불꽃을 휘휘 돌리며 물었다.
“이게 다야?”
허공을 자유자재로 휘젓는 마나 단검들 덕에 방 안을 가득 메웠던 거미줄들이 모두 잘려 나갔다.
바닥으로 잘린 거미줄들이 축 늘어졌다.
“이, 인간!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죽이겠다!”
방안을 뒤덮고 있던 붉은 불꽃들이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나는 방긋 웃었다.
이제 놈의 전의를 상실시킬 타이밍이었다.
레부가 커다랗게 몸을 부풀렸다. 거대해진 레부의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웠다.
한껏 숨을 들이켠 레부가 내게 커다란 화염구를 뱉어냈다.
“쿄아!”
화르륵!
놈이 뱉어낸 화염구가 내게 쏘아져 내렸다.
마나를 움직여 화염구의 경로를 뒤틀 수도 있었지만.
나는 화염구를 피해 미끄러지듯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레부의 그림자 안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그림자 밟기.”
그림자를 밟아 대상의 사각지대로 이동하는 은밀한 고양이의 특성 스킬.
훅!
순식간에 나는 레부의 뒤로 이동했다. 나는 양손의 칼을 고쳐 잡았다.
지금 내 위치는 놈의 사각지대.
사각지대에서 공격 시 추가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스킬인 백어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력이 굉장했지만.
‘그림자 밟기와 연계한다면.’
연계 성공 시 적용되는 추가 데미지는 기본 백어택의 2배 이상!
“백어택!”
나는 두 단검을 레부의 등에 찔러 넣었다.
퍼엉!
“쿄오오!”
시원하게 터져나가는 레부를 보며 잊고 있던 짜릿함이 온몸을 감쌌다.
‘이 맛이지!’
비전 마법이 편하고 강력한 위력을 지닌 건 분명했지만, 나는 역시 이 감각이 좋았다.
주르륵.
“쿄…. 쿄옥….”
붉은 불의 젤리들이 흩뿌려져 앞과 양쪽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만약 레부가 슬라임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인지하기 전에 죽었을 만큼 강력한 위력.
나는 양손의 단검을 휘릭 돌려 허리 뒤의 칼집에 꽂아 넣었다.
철컥.
“…쿄…, 쿄오….”
레부의 신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온몸이 터져 나가는 바람에 다시 조각들을 회수할 기력조차 없는듯했다.
“읏차.”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레부에게 물었다.
“어때. 내 수하가 될 생각이 좀 생겼어?”
하지만 여전히 레부는 끙끙 앓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염력으로 마나를 움직여 레부의 조각들을 쓸어모았다.
그제야 레부는 자신의 조각들을 뭉쳐 다시 형체를 만들어냈다.
“쿄, 쿄오오…. 이놈…. 죽일 테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레부가 다시 불타오르며 뭉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레부가 완전히 형태를 갖출 때쯤.
“마나구.”
반경 50cm의 마나를 모아 1cm로 압축해 놈에게 날렸다.
콰앙!
다시 한 번 레부가 벽면을 뒤덮었다.
놈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고 나는 다시 놈의 조각들을 친절히 모아주었다.
“생각이 좀 바뀌었어?”
“쿄오옥…, 주, 죽이겠다….”
나는 다시 마나를 모았다. 이번에는 25cm를 1cm로 조금 약하게.
펑!
모였던 레부의 머리가 다시 벽으로 날아갔다.
철퍽!
머리를 제외한 레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레부는 날아간 얼굴의 잔해를 끌어모으며 터져나간 목의 단면에서 다시 얼굴을 끌어올렸다.
놈의 입이 갖춰졌을 때 다시 물었다.
“아직이야? 잘 생각해 봐. 나는 지금 너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제안하지도 않고 아까 바로 죽였을 거라고.”
내 회유에도 레부는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주, 죽이겠…, 쿄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마나구를 날렸다.
펑!
“여전히?”
“죽여버….”
쾅!
“지금도?”
“잠깐….”
철퍽!
“계속?”
퍼억!
“그만!”
일곱 번째로 입이 복원되자마자 레부가 외쳤다.
나는 만들어둔 마나구를 날리려다 멈칫했다.
“대답도 안 듣고 있잖습니까!”
그새 머리를 모두 만들어낸 레부가 크게 일렁였다.
“아. 그랬나?”
마나구를 만들어 던지는 것이 꽤 재미있어서 그것에 너무 몰두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답은?”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잠시 부들거리던 레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