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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16화 (17/201)

제16화

“…제가…. …졌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이 없었다.

“흠.”

나는 만들어둔 마나구를 향해 손짓했다. 그걸 본 레부가 비명을 질렀다.

“쿄! 주인! 주인으로 삼겠습니다!”

나는 날리려다 만 허공의 마나구를 손가락 위로 슬슬 굴렸다. 그러다가 턱을 괸 채 말했다.

“조금 더 정중히 부탁해봐.”

“…….”

레부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게 한 번에 오케이 했으면 좋았잖아, 안 그래?”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던 레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방긋 웃었다.

‘됐다.’

레부는 적어도 한번 말한 것은 지키는 놈이었다.

장난은 이쯤 치고.

“그래. 좋아. 네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받아주지.”

레부의 젤리가 부르르 떨렸다. 완벽하게 형체를 취한 놈의 얼굴에 직선 세 개가 그려져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웃어.”

직선 세 개가 부들부들 떨리며 곡선을 그렸다.

“…쿄쿄쿄쿄.”

“그래. 웃으니까 보기 좋네. 앞으로 까불지 말고. 웃고 다니고.”

“…쿄…. 알겠습니다….”

레부가 풀죽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는 놈에게 수하의 물건은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알려줄 차례였다.

“일단 앉아봐. 네게 몇 가지 당부해야 할게 있어.”

레부가 스르륵 무너지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회생활 할 줄 아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레부를 보며 말했다.

“일단 네가 가진 아이템이랑 앞으로 주워 먹을 아이템들.”

레부가 긴장한 듯 불을 꿀꺽 삼켰다.

“아,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난 그냥 필요할 때만 그것들을 빌려 쓰고 싶을 뿐이야. 다 쓰면 당연히 너한테 돌려줄 거고.”

즉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아이템 보관 창고로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주인이 빌려 쓰는 건데 설마 거절하겠어?”

“…쿄….”

“그리고 설마 주인 몰래 빼돌린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설마 주인이랑 싸울지도 모르는 몬스터들한테 넘긴다거나?”

레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답이 없다?”

“…쿄, 아, 아닙니다. 안 그럽니다.”

“물론 나도 약탈자는 아니니까 너한테 정당한 대가는 줄 거야.”

“쿄…. 대가라면…. 어떤 겁니까?”

살짝 기대하는 눈치다.

“재미.”

“…쿄?”

“넌 시험을 내는 이유가 네 재미를 위해서잖아. 나랑 다니면 재밌을 거야.”

진심이었다.

하지만 레부의 세 곡선은 울상을 그렸다.

“레부야, 대답?”

“…쿄…. 알겠습니다.”

“뭐가 빠졌는데?”

“…주인….”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말을 무시한다거나 도망간다거나 내 허락 없이 아이템을 다른 놈들한테 넘기거나 하면, 끝까지 쫓아가서 죽인다. 알겠지?”

“쿄….”

나는 손 위에 굴리고 있던 마나구를 레부의 뒤로 휙 날렸다.

“쿄!”

화들짝 놀란 레부가 황급히 몸을 웅크렸다. 마나구는 뒤쪽의 벽에 부딪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뭘 쫄아. 대답해야지, 레부야.”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쿄….”

레부가 대답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위협은 됐으리라.

본인이 한 말도 있겠다, 마나구에 몇 번이나 날아가 봤겠다, 내가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허리 뒤에서 심연의 불꽃을 꺼내 들었다.

“그럼 이제 여기로 들어와.”

“…쿄?”

나는 레부의 눈앞에서 심연의 불꽃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난쟁이들 심연의 불꽃이야.”

“…!”

레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심연의 불꽃은 불꽃 슬라임인 레부에게는 굉장한 연료였다.

난쟁이들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 직접 볼 수 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이것도 레부가 나한테 복종한 이유 중 하나였지.’

특히 레부에게는 지금처럼 수없이 터지고 난 이후에 몸을 회복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정말…, 심연의 불꽃, 입니까?”

레부가 조금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넌 주인 잘 만난 줄 알아야 해.”

내가 심연의 불꽃의 날을 레부에게 내밀었다.

레부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심연의 불꽃을 붙잡자, 순식간에 칼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쿄오오오….”

칼날의 불꽃이 크게 일렁이며 레부의 만족스러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타닥. 타닥.

심연의 불꽃 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였다.

피식 웃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레부야. 쉬더라도 출구는 열어줘야지?”

“쿄…. 알겠습니다, 주인.”

상당히 온순해진 레부가 출구 게이트를 열었다.

* * *

열린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윤도아 씨!”

유지은이었다.

“안 가셨네요, 아직?”

“네.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유지은이 안심한 듯 말했다. 본인이 나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묻지는 않았다.

“특성 선택은 하셨어요?”

“아, 네. 기다리면서 그거 하고 있었습니다.”

유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나는 물음과 동시에 유지은의 정보를 살폈다.

“뱀의 독이라는 특성입니다.”

[유지은]

[뱀 신의 가호]

[굴 안에 든 뱀]

[전용 특성 : 뱀의 독 lv.1]

[전용 스탯 : 면역 5/민첩 7/후각 11]

[전용 스킬 : 열감지 lv.1/진동감지 lv.1/후각증폭 lv.1]

‘회귀 전과 같은 암살자 특성.’

전용 특성의 선택에 따라 전용 스탯과 전용 스킬이 추가되어 있었다.

특성 스킬은 스킬 보상 게이트를 가지 않았기에 아직 생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잘하셨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도와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내 필요성에 의해 데려간 것이었지만 혹시라도 또 도와달라고 요청을 해오면 귀찮아지니 미리 말했다.

유지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이번에 도와주신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유지은과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레부를 불러냈다.

“레부야.”

“쿄?”

“주인이 궁금한 게 있는데.”

레부가 심연의 불꽃에서 비죽 고개를 내밀었다.

칼날에 작은 불꽃이 튀어나와 있는 것이 꽤 귀여웠다.

“지금 가진 아이템들 구경 좀 하자.”

레부가 칼날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다시 사람의 형체를 취했다.

“…구경, 말입니까?”

의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래. 내 수하가 어떤 걸 가졌는지는 주인이 알아야 하지 않겠어?”

레부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려다가 멈칫했다. 아마 웃고 다니라는 내 말이 떠오른 모양이다.

놈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아. 아까 나한테 날렸던 것들 빼고.”

나를 공격할 때 썼던 무기들은 대부분이 C급이고 높아봤자 B급이었을 것이다.

소중한 A급이나 S급을 그런 일에 쓰지는 않았을 터.

“쿄….”

레부가 끙끙 앓다가 결국 축 처진 얼굴로 아이템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A급 이상의 아이템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게이트가 열린 지 기껏해야 100일이 조금 지난 시점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금 나한테는 다 쓸모없는 아이템들.’

꽤 쓸모 있어 보이는 철제 방어구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무게가 무거워지면 민첩하게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무기류도 지금 내가 가진 단검들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레부가 아이템 꺼내기를 멈췄다.

“이게 다야?”

“…쿄.”

놈이 망설였다.

‘뭔가 숨기고 있네.’

“레부야. 아까도 말했지만, 숨기고 있다가 들키면 알지?”

내가 친절하게 말했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떤 레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뱃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쿄오오…. 이게…, 마지막입니다….”

레부가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놈의 행동으로 보았을 때 지금까지 내놓은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템이 분명했다.

‘S급? 아니면 설마…, EX급…?’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레부의 손을 바라봤다.

레부가 부들부들 떨며 손을 거두었다. 그 아래에 작은 돌고래 모양의 회색빛 돌이 있었다.

나는 그 돌을 집어 들어 그것을 살폈다.

크게 특별할 것은 없어 보였지만 내 앞에 떠오른 아이템의 정보는 이것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

정보를 읽은 나는 당혹감에 휩싸여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EX급 아이템 돌고래 신의 가호가 깃든 돌]

[자가치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무려 신의 가호가 깃든 EX급 아이템이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간혹 가다 이렇게 가호가 담긴 아이템이 나타나곤 했었다.

가호자가 받을 수 있는 신의 가호는 하나.

하지만 이런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자신이 받은 가호가 아닌 다른 신의 가호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EX급이지.’

나는 잠시 돌고래 돌을 바라보다가 레부를 불렀다.

“레부야.”

“…네.”

“그러고 보니 내가 너한테 아까 아이템 보상을 안 받았네?”

레부가 흠칫 놀랐다.

“아까 선택한 아이템 5개 반납하면 하나 고를 수 있게 해준다고 했었지?”

“…쿄오….”

레부가 슬슬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돌고래 신의 가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로 할게.”

“그, 그건…. 쿄…. 쿄옥….”

레부가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하긴, 나 같아도 굉장히 아깝다고 생각했겠지만.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른 건 다 집어넣어.”

레부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바닥에 늘어서 있던 아이템들을 다시 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여우 구슬을 발동해 돌고래 모양의 돌의 정보를 살폈다.

[자가치유 lv.1]

[상처 부위의 출혈을 줄이고 고통을 차단, 회복을 촉진합니다.]

‘뭐야? 이거 사기 아냐?’

얼척없는 가호였다. 다친 부분에서 피도 안 나고 아프지도 않으며 회복도 된다고?

어느 정도의 상처까지 회복이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이 설명대로라면 굉장한 가호였다.

그리고 그만큼 비싼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어떤 각성자에게도 부상은 치명적이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한 번 잘못 다치면 그걸로 끝.

그래서 후반에 게이트에 갈 때는 항상 치유나 방어 아이템들을 들고 다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가호를 얻을 수 있다면 억만금이라도 들일 터였다.

게다가 이 돌은 가호를 받지 않은 일반 사람도 사용이 가능했다.

일반 사람이 이것을 사용하면 가호자가 될 수 있었다. 돌 자체가 신의 가호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나중에 거대해질 아이템 시장에서도 이런 가호가 깃든 아이템들은 상상하지 못할 가격에 거래가 되곤 했다.

‘한 방에 인생역전이 가능하겠지만….’

이걸 팔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야 쉽게 쉽게 게이트들을 닫고 있지만, 나중에는 어떤 무시무시한 놈들이 버티고 있을지 모른다.

‘이건 내가 사용해야지.’

“돌고래신의 가호 사용.”

[EX급 아이템 돌고래 신의 가호가 깃든 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확인창이 떠올랐다.

“사용.”

우웅.

돌고래 모양의 돌이 가볍게 진동했다. 그러더니 곧 내 손바닥 안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곧 손바닥에 회색의 돌고래가 새겨졌다.

[돌고래 신의 가호 자가치유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메시지가 떠오르더니 손바닥에 있던 회색의 돌고래가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손바닥 안에서 꿈틀거리던 돌고래가 손목을 지나 팔로 향했다.

아무래도 내 몸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나는 내 팔을 유영하는 돌고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돌고래는 곧 내 손목에 팔찌마냥 길쭉하게 자리를 잡았다.

“…쿄. 주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새 아이템을 다 주워 먹은 레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쉬어.”

내 허락이 떨어지자 레부가 다시 심연의 불꽃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자, 그럼….’

새롭게 얻은 가호가 어떤 식으로 적용이 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전용 옵션을 살폈다.

[고양이 신의 가호]

[전용 특성 : 은밀한 고양이 lv.10]

[전용 스탯 : 근력 99/명중 99/민첩 99]

[전용 스킬 : 균형감 lv.10/도약 lv.10/유연성 lv.10/조용한 발걸음 lv.10]

[특성 스킬 : 그림자 밟기 lv.10/백어택 lv.10/은신 lv.10/표식 lv.10]

[전용 특성 : 악마의 고양이 lv.1]

[전용 스탯 : 마나 운용 20]

[특성 스킬 : 염력 lv.2]

[돌고래 신의 가호]

[전용 특성 : 자가치유 lv.1]

[특성 스킬 : 감각차단 lv.1/혈액차단 lv.1/회복 lv.1]

그동안의 내 노력의 결실들이었다.

운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내가 게이트를 닫았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들.

길어진 옵션만큼, 내 한계 역시 높아졌다.

근거리 공격에 원거리 공격, 거기에 회복까지!

뿌듯함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앞으로 올려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그만큼 시간도 충분했다.

나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회귀한 지 6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이런 옵션을 만들다니.’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 달력을 보며 앞으로의 일정을 따져 보았다.

일단은 각성 기관에 각성자를 키워줄 권재경을 만나러 가야 했다.

권재경은 10일에 각성한다. 그리고 내 계획대로 권재경을 기관에 소개해주려면 그때 게이트에 함께 입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나는 그 틈에 개인 의뢰의 기반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일단 두 번째 각성자인 신교진을 만나야 했다.

신교진은 개인 의뢰 시스템을 가장 처음으로 만든 각성자였다.

그는 온라인상에서 그 시스템을 구축한 후 의뢰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들어온 의뢰 중 본인이 받고 싶은 일만 골라 받은 후, 남은 의뢰는 다른 각성자들을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중개인의 역할까지 하며 수수료를 받아 챙긴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 역할을 내가 맡아야겠어.’

일단 신교진을 내 밑에 두고 개인 의뢰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한다.

그리고 신교진의 가호를 이용해 괜찮은 의뢰를 선별해서 그것들은 내가 해결하고, 나머지는 주선오의 무리에 넘긴다.

그렇게 된다면.

게이트 안에서는 레부를 수하로 두고, 현실에서는 주선오를 부려먹고, 온라인에서는 신교진을 이용할 수 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씨익.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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