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나는 다시 한 번 나라의 정보를 살폈다.
[권나라]
[하얀사슴 신의 가호]
[인도하는 하얀사슴]
[전용 스탯 : 감각 7/민첩 4/분석 11]
‘인도하는 하얀사슴.’
저 인도가 안내를 뜻한다면.
‘그렇게 되면 이 게이트가 쉬워진다!’
빠르게 게이트를 깰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일단 확인이 먼저긴 했지만.
가고일 인형과 함께 벽면의 중앙에 있는 입구를 살펴보던 권재경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밖에서는 길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안에서 꺾여있는 것 같은데.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권재경의 시선이 나라에게 꽂혔다가 다시 내게 향했다.
“그전에 도아 씨 의견을 좀 듣고 싶은 게 있습니다.”
권재경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사실 나라가 가호를 받은 이후로는 한 번도 길을 헤멘 적이 없습니다.”
뜬금없이 딸을 자랑하는 팔불출 아빠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권재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권재경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모른 척 되물었다.
“어떤 가호인데요?”
“인도하는 하얀사슴이라는 가호라고 했습니다.”
“인도하는….”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권재경이 이어서 설명했다.
“어린이집은 물론이고 처음 가는 곳조차도 앞장서서 찾아가더군요. 그래서 제 생각이지만 이 미로도 나라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재경이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음. 확실히 그런 가호를 받았으면 믿어 볼 법하네요. 그럼 아저씨 생각대로 한번 해보죠.”
나름 완벽한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나라는 가고일 인형을 붙잡아 품에 안고 있었다.
“꼬, 꼬마 친구, 날 좀 놔주지 않겠어?”
나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고일 인형의 날개를 움켜잡았다.
“끄악! 뽑힌다, 뽑혀!”
“나라야.”
권재경이 그런 나라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나라를 불렀다.
“응?”
나라가 가고일 인형의 날개를 주물럭거리다가 권재경을 바라보았다.
“이 안쪽에 나라가 안고 있는 인형 같은 게 또 있대.”
권재경이 가고일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와! 진짜?”
나라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아빠랑 인형 찾기 해볼까?”
“좋아.”
나라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라는 어디로 가고 싶어?”
권재경의 질문에 나라가 가고일 인형의 꼬리를 잡아들고 벽의 입구들을 살폈다.
“피, 피 쏠려! 웁.”
“기분 탓 같은데.”
인형에게 피가 있을 턱이 없었다.
“저기!”
나라가 인형을 든 손을 휙 들어 올려 입구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가고일 인형의 꼬리를 잡아들고는 손을 앞뒤로 휘둘렀다.
“우웩!”
인형이 헛구역질을 했다. 저쯤 되니 좀 불쌍할 정도였다.
“나라야, 그렇게 휘두르면 인형이 힘들지 않을까?”
내 말에 나라가 잠시 가고일 인형을 바라보더니 고이 안아 들었다.
가고일 인형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네, 친구.”
뭔가 커다란 눈망울에 고마움이 가득 담겨있는 것 같았다.
나라가 가리킨 입구의 앞에 선 권재경이 창을 고쳐 쥐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네. 조심하세요.”
입구 안쪽에는 기다란 굴이 이어져 있었다.
“가다가 가고일 석상을 만나면 일단 멈추는 게 좋아.”
가고일 인형이 충고했다.
그리고 길을 따라 왼쪽으로 꺾자 바로 가고일 석상이 나타났다.
“…너 사실 알고 있는 거 아냐?”
내 물음에 가고일 인형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 나도 몰랐는데….”
“저게 순한 가고일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합니까?”
권재경이 인형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는데?”
인형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권재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고일 인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니. 진짜 나도 몰라. 갔는데 공격하면 나쁜 놈인 거고 아니면 순한 놈인 건데….”
나라가 안고 있지만 않았어도 바로 인형을 던져서 석상의 움직임을 확인했을 텐데.
아쉬웠다.
살짝 한숨을 내쉰 권재경이 곧 석상 쪽으로 다가갔다.
크기는 입구의 계단 앞에서 보았던 놈들과 비슷했다.
그때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가고일이 손에 쥔 양손검을 움켜쥐었다.
등에 있던 날개가 촥 펼쳐지더니 놈이 단상에서 뛰어올랐다.
그리고 권재경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내리꽂혔다.
다행히 동작이 크고 둔했기에 권재경은 충분히 칼을 피해냈다.
“나쁜 놈이다!”
가고일 인형이 외쳤다.
“한 3초 전에라도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야.”
내가 빈정거렸다.
“무슨 소리. 섣부르게 판단하면 안 되지 않겠나, 친구.”
권재경은 가고일의 칼을 잘 피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나라였다. 갑자기 석상이 움직이며 아빠를 공격하는 걸 보니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최대한 짧게 끝내는 게 좋겠는데.’
가고일을 상대하기 가장 좋은 것은 망치나 도끼 같은 둔기류였다.
돌을 부술 정도의 큰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인데 그 정도의 충격을 줄 수만 있다면 다른 무기들도 가고일을 상대할 수 있긴 했다.
회귀 전 안세인의 경우에는 너클을 낀 상태로 가고일을 두들겨 팼었다.
‘가고일이 돌이 아니라 과자였나 싶을 정도였는데….’
주선오의 경우에는 이빨벼림이라는 스킬로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예리한 칼날을 만들어 돌을 베어냈고.
나는 그런 스킬이 없었기 때문에 가고일을 잡을 때는 술수를 즐겨 썼다.
가고일이 여럿일 때는 놈들끼리 부딪쳐서 부서지게 만들면 구경하는 맛이 꽤 있었다.
아니면 그림자 밟기와 백어택 연계를 주로 사용했다.
칼날을 사용하면 날이 망가졌기에 대신 손잡이 끝으로 일격을 날렸다. 그러면 저 돌덩이들도 한 방에 부술 수 있었다.
물론 약점도 있었다. 아무리 힘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약점을 알면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이 가고일이었다.
그리고 권재경은 늑대 신의 가호 덕분인지 우연인지 단번에 창을 휘둘러 가고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퍽!
“어우.”
가고일 인형이 부서져 떨어지는 가고일을 보며 질색했다.
권재경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쉽게 부서질 줄 몰랐던 듯했다.
“어쩜 그렇게 약점을 골라서 치나, 친구.”
권재경이 휘둘렀던 창을 거두며 물었다.
“약점? 뒷머리가 약점입니까?”
정확했다.
가고일의 약점은 뒤통수.
날아다니는 가고일의 뒤통수를 치려면 가고일을 바닥으로 내려오게 만들거나 아니면 놈의 등 뒤로 올라타야 한다.
그것만 성공하면 주먹으로 내리치더라도 뒤통수를 깰 수 있었다. 주먹이 조금 아프기야 하지만.
“뭐야, 알지도 못하고 친 거였어? 재능 있는 친구네.”
가고일 인형이 감탄하며 말했다.
권재경은 잠시 부서진 가고일의 잔해를 보다가 그 옆에 떨어져 있는 양손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몇 번 휘둘러보더니 창 대신 양손검을 들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번 약점을 파악하고 나자 권재경은 거침이 없었다.
갈림길이 나타나면 나라의 인도를 받고, 공격적인 가고일이 나타나면 가고일이 움직임을 취하기도 전에 가고일의 뒤통수를 깨버렸다.
그렇게 한 삼십여 분을 걸어 들어간 후 우리는 두 번째 순한 가고일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껏 지나쳐온 방보다 조금 넓은 방이었다.
방의 중앙 단상 위에 회색의 가고일 석상이 있었고 그 주변을 다섯 개의 가고일 석상이 둘러싸고 있었다.
“오, 저거다!”
나라의 품에서 쏙 빠져나온 하얀 가고일 인형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저기, 중앙에 회색 놈 보이지? 저게 친구네, 친구.”
권재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석상들에게 다가갔다.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한 놈의 머리를 깨고, 무기를 움켜쥘 때 한 놈.
날개를 펄럭일 때 또 한 놈.
창을 휘두르는 놈을 피해 옆 놈의 뒤통수부터 친 후.
마지막 놈까지 깔끔하게 처리했다.
‘확실히 몸놀림도 좋고 망설임도 없다.’
권재경은 생각보다도 더 잘해주고 있었다.
권재경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하얀 가고일 인형이 회색 가고일 석상으로 다가갔다.
“오, 친구!”
그러자 석상의 반쯤 뜨인 눈이 또르르 굴러 가고일 인형을 바라보았다.
“…뭐야, 뭐야. 이 인간들은 또. 무서워 죽겠네.”
석상의 입에서 잔뜩 겁먹은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친구. 다 내 친구들이라고.”
가고일 인형이 우리를 친구라고 소개했다.
회색 가고일 석상은 계속 눈알을 굴려 우리를 살폈다.
그러다가 곧 회색의 연기를 펑 터트리더니 하얀 놈과 같은 인형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놈은 회색의 가죽을 가졌고 역시 반쯤 감긴 눈으로 우리를 살피고 있었다.
[가고일 서식지 안의 순한 가고일들을 찾아내십시오. 2/3]
“우와!”
나라가 또 생겨난 가고일 인형에 감탄했다.
나라가 회색 가고일 인형을 잡으려 했지만 하얀 놈과 달리 회색 놈은 나라를 무서워했다.
회색 놈이 하얀 놈의 뒤에 숨었다.
나라가 곧 실망한 듯 입을 비죽였다.
하얀 놈이 껄껄 웃고는 나라를 위로하듯 나라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이제 하나만 더 찾으면 돼.”
“나라야, 다시 갈까?”
권재경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나라는 머리 위의 하얀 가고일 인형을 다시 끌어안고는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회색 놈은 앞서가는 우리의 뒤를 미행하듯 쫓아왔다.
30분 정도를 걷자 나라가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권재경과 위치를 바꿨다.
권재경이 나라를 안아 들었고 내가 가고일들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 정도 후 마지막 세 번째 가고일 인형을 만날 수 있었다.
[가고일 서식지 안의 순한 가고일들을 모두 찾아냈습니다. 3/3]
[게이트 클리어 보상이 상향됩니다.]
세 번째 가고일 인형은 까맣고 자그마한 놈이었다.
세 가고일 인형은 자기들끼리 얼싸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친구, 오랜만이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용케 보네?”
“…뭐야, 뭐야. 오랜만에 보는데 순한 말로 해줘.”
“거 말이 뭐가 중요해? 다시 만난 게 어디야.”
“만난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재회의 기쁨은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떨까.”
내가 끼어들자 회색 놈이 까만 놈의 뒤로 쏙 숨어버렸다.
하지만 까만 놈은 회색 놈을 가려주기에는 너무 작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회색 놈이 다시 하얀 놈의 뒤로 숨어들었다.
까만 놈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일단 여기 먼저 빠져나가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러면 재회고 뭐고 다 같이 황천길 가게 생겼는걸?”
“뭐?”
내가 되묻자 회색 놈이 하얀 놈을 보며 물었다.
“…뭐야, 뭐야. 얘기 안 했어?”
우리가 하얀 놈을 바라보자 놈이 슬쩍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뭘 말입니까?”
권재경이 그새 잠든 나라를 토닥이며 물었다.
하지만 놈들이 설명하기도 전에 갑자기 발밑이 세게 흔들렸다.
쿵-!
나는 황급히 자세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충격에 잠에서 깬 나라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으악, 꼬마 친구 운다!”
“뭐죠? 지진?”
권재경이 우는 나라를 달래며 가고일 인형들에게 물었다.
그때 또다시.
쿠웅!
지면이 흔들렸다. 뒤이어 바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권재경이 나라를 꽉 껴안으며 벽면에 발을 디뎠다.
나는 기울어지는 바닥에서 균형을 잡으며 하얀 가고일 인형을 잡아챘다.
“끄악! 나 터져, 친구!”
“설명해.”
하지만 하얀 놈은 비명을 지르느라 대답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대신 까만 놈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여기, 대장 가고일 몸속인데.”
“…!”
순간 밖에서 봤던 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개의 첨탑이 솟아있는 커다란 성.
‘성 자체가 가고일…!’
아차 싶었다.
가고일 중에는 성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진 놈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진작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더라니.’
놈이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가는 길은?”
내가 다시 균형을 잡으며 물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던가?”
까만 놈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
하얀 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끄악! 아, 아냐! 방법이 있으니까 나 좀 놔줘 봐, 친구!”
하얀 놈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깔깔거리던 검은 놈이 갑자기 권재경의 품에 안긴 나라에게 날아갔다.
“난 작으니까 이 작은 인간 데려갈게.”
“…뭐야, 뭐야. 그럼 내가 저 큰 인간이야?”
데구르르 눈을 굴리던 회색 놈이 당혹스러운 표정의 권재경에게 날아갔다.
“무슨…?”
검은놈이 나라를 붙잡았다. 회색 놈도 덜덜 떨며 권재경을 붙잡았다.
그리고 내 손에 잡힌 하얀 놈이 양손으로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놀라지 말라고.”
“…뭐야, 뭐야. 무서워.”
“잠깐 실례, 친구.”
후욱!
하얀 연기가 나를 휘감았다.
갑작스러운 연기에 눈을 감았다가 뜨자, 눈앞에는 게이트에 처음 들어와서 봤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얀 눈밭.
“…!”
그리고 그 너머에서 성채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