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윤도빈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렸을때부터 뭔가 꽁한 게 있으면 항상 저런식이었다.
분명 지금껏 내가 연락을 제대로 못 해서 걱정을 끼친 것에 대한 시위이리라.
뭐라고 하고 싶지만 내 모습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기에 잔소리도 못하는 것이고.
“참, 도빈아.”
내 부름에 윤도빈이 표정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집 옮겼어.”
“…뭐?”
윤도빈의 미간이 재차 찌푸러들었다.
“어디로? 본가는 어떡하고?”
“본가는 그대로 있어. 기관에서 단련실 딸린 집을 마련해줬거든.”
“…기관에서 그런것도 해줘?”
윤도빈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동안 게이트를 돌거나 단련실에 박혀 있거나 아니면 기관을 들르는 일로 바빴기에 집을 옮겼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갑자기 이사도 했다고 하니 놀랄 만 하겠지.’
회귀 후 동생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로는 그닥 신경을 써주지 못한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단련실은 필요하니까 구해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됐네. 이번에 게이트 다 닫고 들러서 보고 가.”
내 말에 도빈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빈이는 게이트를 돌고 난 후에는 학교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굳이 학교 근처에 살 필요도 없으니, 집에 들어와서 살게 하는 것이 훨씬 안심이 될 터.
‘생활비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고.’
지난 2주 동안 간간이 들어온 의뢰를 해결하고 받은 돈만 해도 50억이 넘었다.
게다가 2월이 돼서 각성 기관 쪽에서의 계약금도 들어왔기 때문에 현재 내 계좌는 계속해서 최고점을 갱신하고 있었다.
‘진짜 수중에 그런 돈이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단 말이지.’
나는 창틀에 괸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게이트를 닫으며 얻은 보상들로 내 악마의 고양이 옵션도 성장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옵션을 확인했다.
[전용 특성 : 악마의 고양이 lv.2]
[전용 스탯 : 마나 운용 43/탐지 40]
[특성 스킬 : 마나 방패 lv.2/염력 lv.2]
이틀 전 새벽, 목포의 게이트를 닫아 얻은 스탯 포인트를 사용해, 드디어 두 스탯 모두 40을 넘기게 되었다.
마나 운용의 범위는 총 43미터.
탐지 역시 이제는 어느 정도 외곽선의 형태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마나 방패의 크기도 이제 큰 대야 정도가 되었다. 강도 역시 더 단단해지긴 했지만.
‘그깟 놀이 휘두른 도끼에도 깨지다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게다가 스탯은 꽤 올랐지만 전용 특성과 스킬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스킬이나 종합 보상 쪽을 주로 노려야겠어.’
나는 앞 유리에 떠 있던 옵션들을 없앴다.
차 안은 조용해진 상태였다.
도빈이는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 게이트를 가려면 힘들 테니 조금 쉬게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도빈이를 자게 내버려 두었다.
* * *
하루 전, 강릉 저수지에 도착해 게이트의 상태를 본 안세인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각성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가호자들이 각성을 하기 좋은 C급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유.
게이트는 일반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위치인 저수지의 중앙에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현재.
아직 게이트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푸른색의 연기가 넘실거리고 있는 게이트는 저수지의 물 표면에 비치어 꼭 두 개의 게이트가 나란히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말씀하신 게이트 브레이크가 오늘내일 중으로 일어날 확률이 큰 겁니까?”
옆에서 함께 게이트를 바라보던 권재경이 물었다.
“추정이지만요. 어쩌면 더 늦어질 수도 있죠.”
안세인의 대답에 권재경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나라를 괜히 데려온 건가.’
지난번 게이트에 들어갔다 온 이후로 나라는 권재경과 더욱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 함께 온 이리나가 나라를 돌봐주겠다고는 했지만 불안했다.
“그래도 대전에서 일어난 게이트 브레이크보다는 상황이 나을 것 같아요. 여긴 C급이니까.”
대전의 게이트 브레이크가 또 떠오르는 바람에 안세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아 씨가 막아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피해가 컸을 겁니다. 아마 대전 전체가 파괴됐을지도 모르고요.”
권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재경 역시 대전 게이트 브레이크의 영상을 보았다.
“대단하더군요.”
권재경이 진심 어린 소감을 내뱉었다.
영상에는 윤도아의 활약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놀랐던 점은 초능력자로 알고 있던 윤도아가 단 두 자루의 단검만으로 푸른 상급 놀을 제압했다는 것이었다.
‘하긴 몸놀림 자체가 예사롭지는 않았어.’
보통 게임에서도 마법사 같은 원거리 딜러는 몸이 약하고 근접 공격에 취약했다.
하지만 가고일의 게이트 안에서 봤던 윤도아는 가고일들의 근접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는 것은 물론 오히려 놈들의 무기를 빼앗아 공격하기도 했다.
“우리도 윤도아 씨한테 뒤처지면 안 되겠죠. 저 안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잘 해결합시다.”
“네.”
안세인이 권재경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뒤쪽의 막사로 걸어갔다.
현재 이곳에 있는 각성 기관 소속 각성자는 총 다섯 명.
전력이 되지 않을 이리나와 권나라는 제외한 숫자였다.
C급 게이트이긴 했지만 안에서 어떤 몬스터가 몇 마리나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기관 소속의 각성자는 많이 늘었지만 기관의 요청에 응한 각성자는 셋 뿐이었다.
기관의 각성자들 역시 대전의 브레이크 영상을 보았을 터.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에 누가 선뜻 지원을 하겠는가. 셋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인원이었다.
‘어쨌든 다섯이서 해결을 해야 한다.’
잠시 게이트를 바라보던 권재경이 몸을 돌려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는 지원 요청에 응해준 각성자들이 나와 있었다.
“선생님. 혹시 윤도아 씨는 안 오나요?”
한 각성자가 권재경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브레이크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도아 씨는 다른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각성자들의 표정이 불안으로 물들었다. 권재경은 그런 셋을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C급이니까 그렇게 강한 몬스터들이 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네….”
각성자들이 기운 없이 대답했다. 다시 한번 각성자들을 격려한 권재경은 이리나와 나라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나라는 이리나의 무릎 위에 앉아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나라야, 아빠한테 와.”
권재경이 자리에 앉으며 자신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나라가 이리나의 무릎에서 일어나 권재경에게 다가왔다.
“괜히 고생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권재경이 무릎 위에 나라를 앉히며 말했다. 하지만 이리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전 치유 특성이라 혼자서 게이트 돌지도 못하는데요, 뭐.”
이리나가 책에 집중하고 있는 나라를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나라 특성은 뭐에요? 같은 각성자인데 그걸 못 들었네.”
이리나의 물음에 권재경은 나라의 전용 특성을 떠올렸다.
가고일의 게이트를 닫은 후, 가고일들이 건네줬던 보상을 확인할 때.
권재경은 나라의 특성 선택을 도우려 했지만 다른 사람의 선택지는 볼 수가 없었다.
가호의 정보는 가호를 지닌 본인밖에 볼 수 없는 것이기에.
권재경은 아직 한글을 전부 읽을 줄 모르는 나라에게 가호 내용을 똑같이 그려보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알아낸 나라의 전용 특성은.
“하얀사슴의 예언입니다.”
이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언이요?”
“네.”
“그런 것도 있구나. 나라도 저처럼 흔치 않은 특성 같네요.”
이리나가 나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측은함과 동질감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스킬은요?”
“예지라는 스킬이 있는 것 같더군요.”
이 역시 나라가 글을 따라 적은 것을 보고 알아낸 것이었다.
설명에 의하면 예지는 나라 주변에서 하루 이내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는 스킬이었다.
이리나의 눈이 다시 커졌다.
“예지요?”
“네.”
이리나가 잠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음…. 아저씨, 그러면 나라 스킬로 혹시 게이트 브레이크가 언제 일어날 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예지 스킬이 어떤 식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나라가 사용한다고 해서 주변에 피해가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써보는 건 어때요?”
권재경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저 나라를 보호할 생각만 했을 뿐, 나라와 함께 상황을 개척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예지 내용의 1순위는 사용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
지금 나라가 예지를 사용한다면, 분명 나라에게 위험한 상황을 예지하게 될 것이다.
이리나의 말이 아니었다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지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렇군요. 그래야겠습니다.”
“그럼 나라가 어떻게 스킬을 쓰게 하냐가 문제인데….”
이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권재경은 나라가 게이트에 입장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나라야.”
“응?”
나라가 고개를 들어 권재경을 바라보았다. 권재경은 나라의 손에서 그림책을 내려두고는 말했다.
“나라 스킬 중에 예지라고 있었지?”
“응.”
“그거 한 번 써볼까?”
나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예지, 말해봐.”
나라가 권재경의 말을 따랐다.
“예지.”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라는 말을 내뱉은 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권재경과 이리나가 서로를 보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아빠.”
나라가 권재경을 불렀다. 나라는 바닥의 한 지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글자 나타났어?”
“응.”
이리나가 황급히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나라에게 건넸다.
“나라야, 여기에 똑같이 써볼래?”
나라는 펜으로 종이 위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저수지의 물이 넘쳐 주변이 모두 잠기게 됩니다.]
잠시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권재경과 이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리나가 먼저 막사를 뛰쳐나갔다.
권재경은 빠르게 나라를 안아 올린 후 막사 한쪽에 두었던 양손검을 등에 메었다.
‘하루 이내라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했다.
권재경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 안세인과 각성자 셋이 모두 모여 있었다.
“예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세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권재경은 나라의 손에 들린 종이를 안세인에게 보였다.
“일단은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작 6살짜리 아이의 말이었다. 하지만 나라 역시 각성자. 게다가 예지 스킬이라면.
종이에 쓰인 글귀를 확인한 안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죠. 막사는 둬요.”
안세인의 말에 각성자들의 움직임이 급해졌다.
당장 1초 뒤에 이곳이 잠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막사를 거둘 여유는 없었다.
대충 무기와 간단한 짐들을 챙겨 든 각성자들이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
앞장서던 권재경이 잠시 망설이는 순간.
“이쪽.”
나라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권재경은 지체없이 나라의 말을 따랐다.
약 10분 후, 각성자들은 높은 지대로 올라설 수 있었다. 권재경은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아직 게이트와 저수지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헉, 헉. 어우, 죽겠네.”
뒤따라온 다른 각성자들 역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숨을 헐떡였다.
“그, 근데 진짜 예언이에요?”
한 각성자가 물었다.
다른 각성자들은 여섯 살짜리 아이의 말에 영 신용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히 애가 심심해서 장난쳤다거나 그런 거 아네요?”
“그러게. 6살인데….”
각성자들의 중얼거림에 안세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이를 떠나서 나라도 제대로 전용 특성을 가진 각성자예요. 만약 틀린 정보라고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각성자들이 조용해졌다.
권재경은 나라를 땅에 내려놓았다.
나라 덕분에 길을 헤메지 않고 곧장 높은 지대로 올라설 수 있었다.
권재경은 나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저수지의 표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권재경이 잠시 고개를 돌려 서서히 내려앉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어, 서, 선생님.”
한 각성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권재경을 불렀다.
그리고 들려오는 강한 파동음.
권재경이 다시 게이트를 돌아보았다.
우우웅——.
게이트의 푸른 연기가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게이트가 점점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에 따라 푸른색의 연기가 저수지의 노을빛 표면에 닿으며 잔잔했던 표면에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게이트를 휘감으며 일렁이던 연기가 녹아내리듯 흘러내렸고, 그 안에서 블랙홀 같이 새까만 게이트의 심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심연은 계속 커지며 저수지의 표면을 밀어냈고 그렇게 밀려난 물은 주변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쏴아아—!
“소, 소용돌이….”
이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거렸다.
쿠구구궁—.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물은 계속 밀려났고 곧 각성자들이 지내던 막사가 있던 평지로 저수지의 물이 넘쳐흘렀다.
촤아아!
순식간에 막사가 쓸려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짜 넘쳤어….”
한 각성자가 중얼거렸다.
나라의 예지가 없었더라면 분명 이곳의 모두는 저수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게 됐으리라.
쿠구구—!
저수지의 중앙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확장을 멈춘, 10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의 심연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각성자들이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브레이크.”
안세인이 중얼거렸다.
“다들.”
권재경은 등에 메고 있던 검집을 내려 양손검을 손에 쥐며 말했다.
“준비하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