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44화 (45/201)

제44화

통로를 돌아보러 간 윤도아는 십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에 빠진 몰리는 슬쩍 주선오를 바라보았다.

주선오의 얼굴에 별다른 감정은 없어 보였다.

‘뭐지? 걱정도 안 되나?’

그러고 보니 주선오는 랭킹 2위.

저 모습을 보니 랭킹 1위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깊은 걸까 싶기도 했다.

랭킹 2위의 정보는 그나마 이해가 가는 수준이었지만, 랭킹 1위의 정보는 믿을 수가 없었다.

S급 단독 클리어 경험이 많은 데다가 클리어 최단 시간이 40분이라니.

만약 몰리가 랭킹 2위 주선오의 입장이었다면 말도 안 된다며 불신을 내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주선오는 그렇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는 충직한 개처럼 그저 조용히 문을 경계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닙니까? 이 통로를 돌아보는데 이렇게까지 오래 걸린다고요?”

결국 답답했는지, 타일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주선오의 대답은 셋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금방 오실 겁니다.”

결국 참지 못한 카터가 모래 문을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면 먼저 열어 보는 것도 방법이겠지.”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주선오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중 믿을 건 한국에서 온 두 각성자 뿐이었다.

그런데 한국 1위 랭커가 없는 상황에서 제멋대로 문을 연다면, 전 랭커들의 뒤를 따를지도 몰랐다.

“그만둬요, 카터.”

카터는 점점 힘을 주어 모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모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났는지 작게 씩씩거리던 카터는 다시 한번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제발.’

몰리는 주선오의 눈치를 살피며 카터를 잡아당겼다.

“그만두라고요. 좀 말려 봐요, 타일러.”

하지만 타일러는 팔짱을 낀 채 한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냥 둘 다 놓고 오는 건데!’

몰리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느라 애쓰는 동안, 주선오가 늘어트리고 있던 칼의 손잡이를 고쳐 쥐며 충고했다.

“계속하시겠다면 막는 수밖에 없습니다.”

모래 문 때문에 화가 나 있던 카터에게는 그것이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카터가 주선오에게 한발 다가서며 말했다.

“말린다고? 어떻게 말입니까.”

키는 비슷했지만 덩치는 카터가 압도적으로 컸다.

하지만 주선오는 전혀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희는 엄연히 이 게이트를 닫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희의 의견을 무시해서 무슨 사고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

타당한 말에 카터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진짜 가만히나 있지.’

몰리가 이제 카터 말리기를 포기했다.

저 상황에서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나기에는 카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텐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상황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싶을 때.

“기다리기 심심했어요? 분위기가 험악하네.”

윤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몰리는 고개를 홱 돌려 드디어 돌아온 윤도아를 바라보았다.

윤도아는 험악한 분위기에 겁먹은 루크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주선오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쪽 뒤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길래, 잠깐 보고 오느라 늦었어요.”

“위층이요?”

몰리에 이어 타일러도 물었다.

“뭐가 있습니까?”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확인은 못 했네요. 그래서 그런데 네 분이 위층에 뭐가 있는지 확인 좀 해주시겠어요?”

윤도아가 정중하게 부탁했다.

“저희끼리요? 그럼 두 분은?”

타일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몰리 역시 이제 와서 넷만 위층으로 올라가라는 것이 조금 불안했다.

‘설마 우리를 다 죽이려거나 그런 건….’

의구심이 솟구쳤다.

윤도아는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부터 모두를 보호할 수는 없다느니 알아서 지키라느니 그런 소리를 해댔다.

만약 넷이 위층에서 실수로 혹은 타의로 죽게 되더라도 그건 게이트 안에서의 일.

윤도아가 자신들을 바다에 빠트려 죽인다고 해도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테지만.

‘…그럴 리는 없지.’

한국 랭킹 1, 2위가 자신들을 죽여서 얻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몰리는 이내 의심을 거두었다.

“저희는 여길 열어보려고요.”

윤도아가 모래 문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거긴 안 열리는 문 같습니다만.”

카터가 말했다.

힘에는 항상 자신 있어 하던 카터였다.

온 힘을 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주먹을 견뎠다는 것 때문에 저런 생각을 품은 듯했다.

삐딱한 말이었음에도 윤도아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만약 여러분이 돌아올 때까지 못 연다면 포기하죠, 뭐.”

몰리는 더 이상 카터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카터를 잡아끌었다.

“가죠.”

그리고는 한 손으로는 루크의 등을 앞으로 밀었다.

게이트에 입장 전, 루크의 특성이 잃기 아깝다고 했던 윤도아의 말을 떠올려보면 루크를 함께 보내는 것이 위험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방해돼서 올려보내는 걸지도.’

정말 정보대로 S급을 혼자 닫는 각성자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각성자에게 자신들은 같이 싸워야 할 동료라기보다 보호해야 할 대상일 테니까.

카터와 타일러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본국 랭킹 1위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조용히 몰리의 뒤를 따라왔다.

넷은 나란히 원형의 성벽 옆 통로를 걸었다.

계단을 등지고 걸어가자 보이는 것은 저 먼 곳의 수평선과 쭉 이어지는 통로, 그리고 벽뿐.

아무리 걸어도 계속해서 같은 풍경이 반복되자 몰리는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가 걷고 있는 게 맞긴 한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루크나 카터, 타일러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네 각성자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어?”

그때 루크가 외쳤다.

“저기 사다리가 있어요!”

그 말에 세 각성자가 모두 앞을 바라보았다.

계속 똑같이 보이던 풍경에 드디어 변화가 나타났다.

위층으로 연결된 기다란 사다리가 있었다. 대략 1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이였다.

“좋아. 그럼 제가 먼저 올라갈게요.”

몰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여기에서는 자신이 랭킹 1위였다.

좋아서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위로서의 모범은 보여야 할 것 같았다.

들고 있던 칼을 칼집에 넣은 몰리는 조심스레 모래 사다리를 붙잡았다. 사다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몰리는 성큼성큼 사다리를 오르며 눈을 부릅뜨고 위만 바라보았다.

시선을 잘못 돌렸다가는 드넓은 바다에 홀려 손을 놓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바닥에 까끌거리는 모래가 묻어났지만 몰리는 모래를 털 생각도 못한 채 사다리를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사다리의 끝이 보였다. 몰리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다리의 끝은 위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입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몰리는 조심스럽게 입구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넓은 공간 안에 여러 개의 모래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모래 기둥의 사이는 모래 벽으로 막혀있어 총 세 갈래의 갈림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몰리는 바닥에 올라선 후 입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 각성자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몰리가 그들에게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고 곧 타일러가 먼저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몰리는 다시 내부를 살폈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제발 나타나지 마라.’

몰리는 간절히 바라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칼을 뽑아 들었다.

곧 타일러와 루크, 카터까지 모두 안전하게 위층에 도착했다.

“살펴보죠. 루크는 여기에 있다가, 혹시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내려가서 그 사람들한테 가.”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몰리와 카터, 타일러는 각자 한 갈래씩 길을 맡아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쯤 후. 셋은 입구의 반대편 끝에서 마주쳤다.

“…어?”

“다들 무사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쪽은?”

“없었어요.”

“여기도.”

몰리의 바람대로 모래성 꼭대기 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성벽의 통로를 한 바퀴 돌고 와 캐나다의 각성자들을 모두 위층으로 올려보낸 나에게 주선오가 물었다.

“문 열어 볼까요?”

“아니, 아직. 조금 더 있다가.”

“네?”

주선오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달구는 중이거든.”

나는 이미 성벽의 통로를 따라 돌며 성의 구조를 다 파악한 상태였다.

위층에는 모래 문 너머에 있는 것 같은 모래 인형들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 캐나다의 랭커들을 그 위로 올려보냈다.

‘레부가 이곳을 달구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달군다고요?”

“응.”

나는 레부에게 아래층의 창문을 타고 들어가서 모래 인형들이 서 있는 이 층의 바닥을 뜨겁게 달구라는 명령을 내렸다.

레부가 아래층으로 이동한 후 나는 곧바로 모래 인형들의 머리 위쪽으로 마나막을 만들어냈다.

마나막은 뚜껑처럼 모래 인형들의 위를 꽉 막아 그곳의 공기를 위쪽과 차단했다.

‘레부가 고온으로 타오르다 보면 모래 인형들은 딱딱하게 굳겠지.’

그럼 문을 열고 나타난 우리에게 달려들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

알아서 다 깨져버릴 것이었다.

나는 주선오에게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교진이가 얘기했던 그 슬라임이군요.”

남원 휴게소에서 닫았던 게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응. 지금 걔가 열심히 불 때고 있거든.”

나는 살짝 모래 문에 손을 대 보았다. 뜨끈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됐을 것 같은데.”

나는 뒤로 물러나며 모래 인형들의 위를 막고 있던 마나막을 제거했다.

“열어 볼래?”

내 말에 주선오가 들고 있던 칼을 고쳐 쥐며 앞으로 나섰다.

“이빨벼림.”

주선오가 이빨벼림 스킬을 발동했다. 주선오의 손에 들린 칼의 날 부분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네.’

나는 반가운 기분으로 주선오의 칼을 바라보았다.

회귀 전 함께 게이트를 돌 때마다 보아왔던 스킬이었다.

무엇이든 벨 수 있도록 날카롭게 날을 벼려주는 스킬.

심지어 칼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냥 가느다란 막대여도 이빨벼림 스킬을 사용하면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었다.

‘예전에 사기 스킬이라고 엄청 욕했었는데.’

잠시 추억에 빠져있는 사이, 주선오가 칼을 휘둘렀다.

서걱!

주선오의 깔끔한 검격이 모래 문을 가로로 베어냈다.

칼을 거둔 주선오는 칼의 끝으로 반 잘린 문의 윗부분을 슥 밀었다.

안으로 밀린 문은 곧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뻥 뚫린 문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훅 몰아쳤다.

문 앞의 주선오가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우.”

나 역시 열기에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반절 정도 뚫린 문 안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모래 인형들이 보였다.

사람 형태의 쿠키를 본뜬 것 같은 인형들이었다.

문이 열린 것을 감지했는지 드디어 모래 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쩌적.

쩌저적.

모래 인형들이 꿈틀거리는 순간 놈들의 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베어낼 필요도 없군요.”

주선오가 들고 있던 칼을 내리며 말했다.

금이 가고 있음에도 모래 인형들은 스킬을 삼키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몇 발짝 떼지도 못해 금이 간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깨지고 머리가 부서져 내렸다.

툭.

투두둑.

곧 성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백여 개의 모래 인형이 모두 부서져 내렸다.

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바닥에 잔뜩 쌓여있는 모래 덩어리들뿐이었다.

‘이제 돌아오겠지.’

인형들은 모부와 연결되어 있기에 모부는 자신의 인형들이 부서졌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곧 주변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주선오가 흠칫 놀라며 성 안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쌓여있던 모래 덩어리들이 중앙으로 스스스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래성의 주인이 돌아온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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