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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45화 (46/201)

제45화

중앙에 모인 모래더미에서 가느다란 모래 줄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래 줄기는 점점 굵어지면서 나선형으로 돌기 시작했고 금세 10미터 높이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다란 모래 회오리를 일으켰다.

“저, 저게 뭐야!”

위층에서 돌아온 몰리와 카터, 타일러, 루크가 성안의 모래 회오리를 보고는 기겁했다.

“다가가지 마세요.”

내가 경고했다.

모래 회오리는 성안의 열기를 금세 날려 보냈고 곧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르르륵.

부드러운 모래 알갱이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 가운데, 모래 인형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사람의 모습과 닮은 모래 슬라임이 서 있었다.

슬라임의 머리에는 곧 커다란 삿갓이 스륵 생겨났고, 손에는 구불구불한 곡선의 형태를 띤 모래 막대가 들려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부였다.

“휴휴휴휴….”

모부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막대로 삿갓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얼굴에 나타난 세 개의 직선이 뻥 뚫린 문 너머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소중한 제 집에 쳐들어왔나 했더니…. 아는 얼굴이 보이는군요. 휴휴휴휴.”

모부의 가느다란 눈이 내게 향했다.

“무, 무슨 소리죠?”

몰리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저런 놈을 만난 적이 있었나…?”

카터도 의아한 듯 중얼거렸고 타일러 역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모부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모부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어서, 모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잘 구분이 안 되는 탓이었다.

반면 주선오는 뭔가 눈치챈 듯 나를 휙 바라보았다.

“혹시 종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모래를 잔뜩 묻히고 나타나 인터뷰를 한 영상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녕, 모부.”

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캐나다 랭커들의 눈이 나에게 쏠렸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모부의 입이 살짝 뒤틀렸다.

“그래요…. 휴, 이렇게 제 사랑스러운 모래 인형들을 부술 사람이라면 왠지 당신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휴휴휴휴….”

“그래? 영광이네. 그럼 그때 했던 얘기도 기억 나?”

내 물음에 모부가 다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휴휴휴휴휴휴…. 그럼요. 기억하고 말고요.”

“그래. 시험 같은 건 됐어.”

모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 좋아요. 어차피 이 곳의 클리어 조건은 저를 이기는거에요.”

모부의 말이 끝나자 곧 바닥에 퀘스트가 떠올랐다.

[모래 슬라임 모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십시오. 0/1]

* * *

그 퀘스트는 모든 각성자의 앞에 동시에 나타났다.

“모래 슬라임…. 대결에서 승리하라고?”

캐나다의 세 각성자는 동시에 성안의 모래 슬라임을 바라보았다.

게임에서 흔히 나오는 동글동글하고 귀엽게 생긴 슬라임이 아니었다.

사람의 형체를 취했지만 온몸이 모래로 이루어진 모습.

게다가 원뿔 모양의 모자에 구불구불한 지팡이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라임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슬라임은 약한 놈이라는 인식이 세 각성자의 머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저걸 잡는 게 클리어 조건?’

‘…별로 세 보이지는 않는데.’

‘그동안 저런 놈한테 각성자들이 다 당했다는 말인가?’

윤도아가 먼저 깨부순 백여 개의 모래 인형을 보지 못한 각성자 셋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셋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 놈이면 해볼 만 할 것 같다.’

먼저 움직인 것은 타일러였다.

“기동력.”

구조를 살피는 공간지각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내부 공간은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

타일러는 암기를 꺼내들며 기동력 스킬을 사용했고 민첩 스탯과 비례한 속도로 모래 슬라임의 뒤로 이동했다.

타일러의 암기가 모래 슬라임의 뒤를 노릴 때, 몰리와 카터 역시 모래성의 안으로 뛰어들었다.

푹!

타일러가 던진 암기는 정확히 모부의 목에 꽂혔다.

하지만 슬라임이라면 저 정도의 암기로는 상처를 입힐 수 없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한 바.

그저 시선을 돌리는 용도였다.

의도대로 모부가 뒤의 타일러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 몰리가 칼로 모부를 올려쳤다.

“용오름!”

몰리의 칼이 일으킨 회오리가 모부의 몸을 갈랐다.

촤아악!

그리고 뒤이어 천천히 다가온 카터가 용오름으로 몸을 반쯤 잃은 모부에게 두터운 건틀릿을 내질렀다.

“돌격.”

17마력의 주먹이 모부의 몸에 닿자.

퍼억!

모부의 모래가 터져나갔다.

‘됐어!’

동시에 세 각성자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하지만.

“휴휴휴흇.”

아래쪽에 쌓인 모래 언덕에서 모부의 웃음이 들려왔다.

‘…웃어?’

몰리와 카터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모래 언덕이 다시 모부의 형태를 갖추었다.

카터가 다시 한 번 모부에게 최대 마력의 주먹을 내질렀다.

퍽!

형태가 갖춰지던 모부의 얼굴이 뭉개졌다.

모부의 얼굴은 조금 전처럼 터져나가는 대신, 카터의 주먹을 삼켰다.

“…! 이게 뭐야!”

카터가 모부의 얼굴에서 주먹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빠지지 않았다.

결국 카터는 빠르게 건틀릿에서 손을 빼며 뒤로 빠졌다.

이번에는 몰리가 사선으로 칼을 휘둘렀다.

서걱!

털썩.

몰리가 베어낸 모부의 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번에는 목을!’

몰리가 다시 한 번 크게 칼을 휘둘렀다.

“휴휴휴휴흇!”

그 순간, 한층 더 커진 모부의 웃음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에 박혔던 카터의 건틀릿이 모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모부를 베어내던 몰리의 칼이 뭔가에 걸린 것처럼 막혀버렸다.

덜컥!

‘뭐지?’

몰리가 칼을 빼내려 했지만, 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몰리의 칼 역시 모부의 몸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몰리는 칼을 놓친 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모든 것을 삼킨 모부는 모래를 부르르 떨더니 뭉개졌던 얼굴과 베였던 팔을 다시 회복했다.

“휴휴휴. 재미있군요. 하지만.”

모부의 얼굴에 나타난 직선 세 개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당신들과 놀아줄 생각은 없는걸요.”

“…뭐라고?”

카터가 발끈하며 다시 모부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갑자기 뭔가가 카터의 뒷덜미를 덥썩 잡아당겼다.

“그만.”

윤도아의 목소리였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카터의 머리 위로 무언가 휙 스쳐 지나갔다.

카터가 뒤를 돌아보자.

퍽!

윤도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뒤쪽의 모래벽에 깊숙히 박혀있는 쇳덩이만이 보였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겨진 카터의 건틀릿이었다.

그사이 어느새 타일러의 뒤로 이동한 윤도아가 단검으로 무언가를 쳐냈다.

캉!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거지?’

순식간에 뒤를 빼앗긴 타일러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카터가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 불과 3초 전.

카터와 타일러의 거리는 도저히 3초 만에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반면, 성 안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몰리는 윤도아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 있었다.

카터가 모부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윤도아가 빠르게 움직였다.

모부에게 달려들던 카터의 뒷덜미를 끌어당기더니 갑자기 훅 사라졌다가, 곧바로 타일러의 뒤에 나타나더니.

타일러에게 날아들던 비수를 쳐냈다.

‘뭐지? 공간이동? 마법사? 움직임이 너무 민첩한데.’

몰리가 떨어지는 비수를 받아드는 윤도아를 바라보며, 윤도아의 특성에 의문을 품던 찰나.

윤도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몰리에게 꽂혔다.

동시에 윤도아가 들고있던 비수를 몰리에게 던졌다.

“!”

갑작스러운 상황에 몰리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비수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쇄액!

윤도아가 던진 비수가 몰리를 향해 날아오던 몰리의 칼을 쳐냈다.

캉!

챙그랑!

두 개의 칼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휴휴휴휴. 그때보다 움직임이 훨씬 좋아졌군요.”

모부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윤도아에게 말했다.

“너한테 평가받자고 보여준 거 아니야.”

윤도아가 타일러의 앞으로 나서며 캐나다의 각성자들에게 말했다.

“제가 예전에 이놈이랑 약속한 게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다들 물러나주세요.”

몰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과 비수를 집어 들었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냐.’

슬라임 하나라고 우습게 봤던 자신들의 잘못이 컸다.

조금 전 윤도아가 없었더라면, 공원의 무덤에 세 구의 시체가 더 늘어났을 것이다.

처음의 스킬들은 모두 모부가 일부러 맞아준 것.

이후, 모부는 흡수한 세 각성자의 무기를 각자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카터의 잔뜩 구겨진 건틀릿과 타일러의 암기, 몰리의 칼까지.

어째서 타일러의 암기와 몰리의 칼은 뒤에서 날아들었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몰리는 윤도아와 캐나다 랭커들의 수준 차이를 확실히 느꼈다.

‘계속 여기에 있는 건 방해야.’

판단을 마친 몰리가 빠르게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여전히 멍하게 윤도아를 바라보는 카터와 타일러에게 외쳤다.

“물러나죠!”

“휴휴휴. 그렇게 둘 것 같나요?”

모부가 들고 있던 모래 막대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바닥에 골고루 흩어져있던 모래 알갱이들이 작은 회오리를 일으키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후다닥 몸을 일으킨 카터와 입구로 향하려던 타일러의 앞을, 모래 인형들이 막아섰다.

모래 인형들은 둘을 향해 꿈틀꿈틀 움직이며 다가왔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들의 무기를 빼앗아 되돌려주던 모부를 본 이상, 그들은 섣불리 모래 인형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마나구.”

뒤쪽에서 빠르게 날아든 작은 구슬들이 모래 인형들의 머리를 하나씩 터트려나갔다.

펑!

퍼엉!

모래 인형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나가자 인형의 몸체가 다시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네, 모부야.”

동시에 윤도아가 모부에게 동그란 구슬을 날렸다. 모부는 웃으며 그 구슬을 꿀꺽 삼켰다.

“휴휴, 이런 장난감 구슬은…! 흇!”

콰앙!

말을 채 마치지 못한 모부가 폭발했다.

모부의 몸을 이루던 모래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고 그 폭발의 충격파에 몰리와 카터, 타일러는 입구 쪽으로 밀려났다.

몰리는 빠르게 둘을 데리고 성 밖으로 뛰어나왔다.

주선오가 겁먹은 루크를 보호하며 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모래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주, 죽은 건가?”

타일러가 중얼거렸지만 주선오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모일 겁니다.”

주선오의 말대로 성 안의 모래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캐나다의 세 랭커와 루크, 주선오가 서 있던 입구의 양쪽 통로의 모래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 옆에…!”

루크가 주선오의 옷깃을 붙잡으며 외쳤다.

“이런!”

모래 인형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세 각성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무기를 빼앗아 삼키는 모래 인형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 뒤로.”

주선오가 말했다.

“베어봤자 무기를 빼앗길 거예요!”

몰리가 급하게 외쳤다. 그때 한 모래 인형이 카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빨벼림. 물어뜯기.”

주선오의 손에 들린 칼이 반짝 빛나더니 순식간에 칼의 날이 세 개로 갈라져 보였다.

‘뭐지?’

몰리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 뜨는데.

주선오가 그대로 카터에게 달려드는 모래 인형에게 칼을 내리그었다.

“헉!”

카터가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먹힐 거야!’

몰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서걱.

모래 인형이 네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사르륵 부서져 내렸다.

“…어, 어떻게?”

몰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뒤로.”

주선오가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말했다.

아직 남은 모래 인형은 많았다.

게다가,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던 모래도 다시 꿈틀꿈틀 형체를 갖추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겨우 베어낸다고 하더라도, 모래 인형은 다시 나타난다.

“이, 이걸 어떻게 죽여….”

겁을 먹은 몰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선오는 모래 인형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저희는 버티는 겁니다.”

주선오의 시선이 모래 인형들 너머, 성안의 윤도아에게 향했다.

“저분이 모부를 죽일 때까지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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