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성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모래 인형이 나타났나 보네.’
주선오의 이빨벼림이라면 모래 인형을 벨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모래 인형은 모부의 종.
모부를 베어내지 않는 한 모래 인형은 아무리 베어도 계속 나타날 터.
결국 밖의 모래 인형을 없애려면 이놈이 인형을 부릴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붙여야 했다.
“휴, 밖으로 나갔다고 안심하긴 이르지요.”
다시 형체를 갖춘 모부가 모래 막대를 짚으며 말했다.
“나한테 전력을 쏟아야 할 텐데?”
“휴휴휴휴. 그렇게 만들어 보시죠.”
모부가 모래 막대를 휙 휘둘렀다.
바닥의 모래들이 출렁이더니 곧 뾰족뾰족한 가시의 형태를 띠며 파도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사사삭!
바닥을 타고 오는 공격이라 도약을 한다면 가볍게 피할 수 있었지만. 이왕이면 새로 얻었던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많이 써봐야 익숙해지니까.’
조금 전 카터를 주저앉히고 타일러의 뒤로 이동했을 때처럼, 나는 모부의 뒤쪽 마나에 집중했다.
“블링크.”
훅!
새롭게 얻은 스킬 블링크는 그림자 밟기를 사용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는 가만히 멈추어 있는데 세상이 이동하는 기분.
꼭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목표를 잃은 모래 가시들이 벽에 부딪혀 스르륵 흡수되었다.
“휴, 도망친 건가요?”
내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부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나구.”
나는 곧바로 내 앞에 마나구를 만들어 모부의 뒤로 날렸다.
콰앙!
일부러 마나 소모를 줄이기 위해 50cm 반경의 마나만을 압축했는데 평소보다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
은밀한 고양이의 스킬인 백어택이 마나구에도 적용된 것이었다.
터져나간 모부가 벽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며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
‘슬슬 찍어 눌러볼까.’
모래 슬라임 모부는 불꽃 슬라임 레부보다 자존심이 센 슬라임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도 굉장했고.
이런 놈을 굴복시키려면?
레부보다 더 많이 패면 된다.
나는 모부가 모래를 끌어 모으지 못하도록 주변의 마나를 움직여 바닥의 모래를 긁어모았다.
“휴? 무슨….”
반쯤 몸을 회복한 모부가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모래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염력을 이용해 모래가 섞인 마나를 단단하게 뭉쳤다.
곧 주먹만 한 모래공이 만들어졌고 나는 그것으로 회복 중인 모부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퍼억!
“휴! 흇, 뭐, 흇! 뭐죠?”
모부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나는 모래공 하나를 모부의 주둥이로 날려 보냈다.
퍼억!
모부가 다시 무너져내렸다.
나는 또다시 모부의 모래들을 긁어모아 두 개의 모래공을 더 만들었다.
총 세 개의 단단한 모래공은 성안에서 이리저리 튕기며 정신없이 모부를 공격했다.
그리고 나는 모부가 무너질 때마다 모부의 모래를 빼앗아 모래공을 추가로 만들었다.
그렇게 총 열다섯 개의 모래공이 모부를 후려치자.
퍼버버벅! 퍼억!
“휴! 휴휴휴흇! 이, 이 못된 사람!”
몸을 이루던 모래를 많이 잃어 반쪽이 된 모부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바닥으로 스르륵 스며들었다.
“놀이는 여기까지예요! 이만 통째로 삼켜버리죠! 휴휴휴흇!”
모부의 목소리가 성안에 울려 퍼졌다.
쿠구구궁.
성이 흔들리며 위에서 모래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래성 안으로 들어간 모부가 성 자체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쿠구구구—.
드높았던 천장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작게 뚫려있던 창문이 짓눌려 붙어버렸고 천장은 점점 빠른 속도로 내려앉았다.
성벽과 천장에서 모래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성안에 모래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사사사아.
쿠구구궁—.
“성이 무너져요!”
“빨리 나와요!”
밖에서 몰리와 루크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부가 성으로 들어가며 모래 인형들을 물린 모양이었다.
“마나구.”
100:1의 마나구 24개를 동시에 만들어 사방으로 퍼트리며 입구를 바라보았다.
금세 내려온 천장이 이제 입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24개의 마나구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은 후, 입구를 향해 가볍게 도약했다.
훅!
좁아지던 입구를 통과해 각성자들의 앞으로 미끄러지자, 주선오가 나를 붙잡았다.
덕분에 계단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은 나는 몸을 추스르며 각성자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주선오만 조금 지쳐 보이는 게 다였다.
“고생했어.”
나는 가볍게 주선오의 어깨를 토닥인 후, 몸을 돌려 모래성을 바라보았다.
“조금 물러나죠.”
나는 각성자들을 이끌고 긴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곧 성의 천장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그리고 잠시 후.
쾅! 콰앙! 쾅! 쾅!
쿠구구궁!
두 면이 맞닿은 충격에 24개의 마나구가 폭발을 일으켰다.
성과 연결된 계단 역시 폭발의 충격에 흔들렸지만 다행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휴우웃!”
모부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성의 옆구리 이곳저곳이 터져나갔다.
“…갑자기 폭발이…?”
몰리가 흔들리는 계단 위에 주저앉은 채 중얼거렸다.
“…그쪽의 특성인가요?”
타일러가 물었다.
“네. 그리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말씀드리자면.”
내 말에 각성자들이 긴장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발로 바닥을 툭툭 쳐보였다.
“이 계단도 모부 몸의 일부고, 놈은 우리를 삼키려고 할 거예요. 방금 저 안에 있던 저를 삼키려던 것처럼.”
“삼킨다고요?”
“네. 아까 무기 빼앗겼죠? 그것처럼요.”
몰리와 카터, 타일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만약에 모부가 여러분들을 삼키려고 하면 도망치세요.”
주선오의 뒤에서 옷깃을 부여잡고 있던 루크가 물었다.
“어디로요?”
나는 옆의 바다를 가리켜 보였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모래성. 피할 곳이라고는 바다밖에 없었다.
“…그런….”
“너무 걱정은 마세요. 깊지 않은 곳에 아마 모래성을 버티게 한 지반이 있을 거예요.”
그때 성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꿈틀거리며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가시 돋힌 첨탑은 널찍한 삿갓으로 펼쳐졌고 가라앉았던 모래성 상층부가 모부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하층부 역시 누벽의 창문들이 닫히며 모부의 몸통을 이루던 중.
촤악!
닫히기 직전의 한 창문 틈에서 붉은 액체가 쏘아져 나왔다.
“!”
갑작스런 레부의 습격에 캐나다 각성자들이 기겁하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탱탱볼처럼 모래 바닥을 퉁퉁 튀어온 레부가 내 앞으로 철퍽 떨어져 내렸다.
캐나다 각성자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나며 경계했다.
하지만 나와 주선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카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뭡니까?”
레부가 곧 사람의 형체를 취하고 중절모와 지팡이를 만들어냈다.
모부와 상당히 비슷한 그 모습에 각성자들이 내게서 몇 발짝 더 멀어졌다.
“스, 슬라임?”
“또 다른 놈이 있었나요?”
하지만 각성자들의 외침을 무시한 레부가 후다닥 내 뒤로 숨으며 외쳤다.
“쿄오! 주인, 주인! 쿄쿄! 모래 인형들이 그렇게 깨지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쿄쿄쿄! 그렇게 속이 통쾌할 수가! 근데 모, 모부가 돌아와서 죽을 뻔했습니다, 주인!”
레부가 신나게 외치다가 금세 몸을 부르르 떨며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모부의 인형들을 부순 게 신이 나지만 모부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고생했어.”
내가 레부의 중절모를 톡톡 쓰다듬었다.
“주인…, 이라고요?”
타일러가 자신이 제대로 보고 들은 것이 맞는지 물었다.
“네. 제 부하입니다.”
“저 슬라임이랑 비슷하게 생겼어요.”
루크가 신기한 듯 레부를 보며 말했다.
“쿄! 모부랑 비교하지 마십시오! 전 불꽃 슬라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인간들도 다 똑같이 생겼습니다!”
레부가 버럭 화를 냈다.
그 외침에 이어 모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 레부라니!”
모래성 상층부였던 모부의 얼굴에 직선 세 개가 그려졌다.
그러자 레부가 다시 내 뒤로 쏙 숨어버렸다.
“레부!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고작 사람한테 빌붙어 살고 있었단 말인가요?”
모부의 직선 눈이 사납게 치켜떠졌다.
“쿄! 비, 빌붙다니, 쿄! 주, 주인이 얼마나….”
레부가 잠깐 망설였다.
“얼마나?”
내가 슥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 얼, 얼마나…. 쿄, 자, 잘해주시는데!”
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부의 한숨 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휴, 어쨌든 당신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을 거예요. 그럼 레부도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겠죠. 휴! 괴롭힐 슬라임이 없으니 얼마나 심심했던지! 다시 재밌게 놀 수 있겠군요, 휴휴휴휴흇!”
모부가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자 레부가 내 옷가지를 붙들며 말했다.
“주, 주인, 쿄! 저, 저놈 좀 혼내 주십시오, 제발!”
“휴? 절 혼내주라고요? 휴휴휴휴휴휴. 사람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건가요, 지금?”
모부가 길게 웃었다. 왠지 모르게 애들 싸움에 낀 부모 같은 기분이 되었다.
“레부, 일단 들어가.”
내 말에 레부가 금세 심연의 불꽃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휴휴휴.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군요.”
모부의 말과 함께 모부의 몸통과 연결되어있던 계단의 각진 단층들이 스르륵 펼쳐져 미끄럼틀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지금이 뛰어들 타이밍인가요?”
몰리가 모든 걸 포기한 심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고민할 틈도 없이 우리가 서 있던 층계가 크게 흔들리더니 위로 솟구쳐 올랐다.
덜컹!
쿠구구구.
동시에 모든 계단이 사라지며 평평해졌고, 곧 모부의 몸통과 연결되어있던 부분보다도 더 높이 솟아올랐다.
경사가 점점 심해지자, 모두가 아래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꺅!”
“으아악!”
나는 재빨리 단검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카각!
콰직!
주선오 역시 칼을 모래 바닥에 꽂아 넣어 경사를 버텨냈고 그것을 본 몰리와 타일러 역시 빠르게 칼을 꽂았다.
하지만 바닥을 찌를 수 있는 무기가 없는 카터와 루크는 계속 모래 미끄럼틀을 타고 미끄러졌다.
“카터! 루크!”
몰리와 타일러가 급하게 외쳤다.
카터가 급하게 루크를 붙잡고 건틀릿을 낀 손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찍었다.
카가가각!
칼처럼 바닥을 뚫어내지는 못했지만 건틀릿의 끝에 달린 뾰족한 돌기들 덕분에 둘의 낙하 속도가 꽤 줄어들었다.
하지만 미끄럼틀로 변한 계단의 각도는 점점 높아졌고, 그 종착지에는 모부의 벌어진 입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이 모부의 팔로 변한 것이었다.
나는 탐지로 계단이 있던 바닷속을 살폈다.
역시 깊지 않은 곳에 지반이 있었지만 매우 좁은 지반이라 그곳에 서기 위해서는 모래를 없애야 했다.
“선오, 어깨 잘라버려.”
내 말에 주선오가 곧바로 모래 바닥에서 칼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급격해진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선오의 행동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단검을 뽑아내며 모부의 팔을 박차고 도약했다.
“휴휴휴휴, 무슨 짓을 하려고요?”
우리의 움직임을 본 모부가 팔을 뒤틀었다.
다행히 주선오는 팔의 미끄럼틀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도약 방향이 틀어지고 말았다.
훅!
원래는 모부의 삿갓을 향해 뛰어오르려 했지만, 모부가 방향을 트는 바람에 바닷속으로 직행하게 되어버렸다.
블링크를 이용해 모부의 삿갓 위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아래에 펼쳐진 드넓은 푸른 바다를 보고 있자니, 문득 실험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도박이긴 하지만.’
실패하면 그때 블링크를 써도 늦지 않는다.
“흇!”
옆에서 모부의 비명이 들려오는 걸 보니, 주선오가 모부의 어깨를 베어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 대가로 모래가 부서지며 모두 바다에 빠지겠지만, 모부의 입으로 들어가 녹아내리는 것보다는 나을 터.
나는 앞의 바다에 집중했다.
바다의 표면에 닿기 2미터 전.
내가 떨어질 지점에, 레벨이 오르며 최대 2미터까지 떨어트릴 수 있게 된 마나 방패를 만들어냈다.
“마나 방패!”
바다 위에 레벨 2의 마나 방패가 촤르륵 생성되었다.
염력으로 마나 방패를 그곳에 단단히 고정시킨 나는 마나 방패 위로 착지했다.
쿵!
떨어진 속도 때문에 마나 방패가 순간 덜컹이긴 했지만.
‘버텼다!’
다행히 마나 방패는 내 무게를 견뎌냈다. 나는 그런 마나 방패를 박차며 도약했다.
콰직!
그 힘에 마나 방패에 금이 갔지만, 나는 성공적으로 모부의 삿갓 위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후욱!
목표 지점에 도달한 나는 나를 따라 떠오르는 금이 간 마나 방패를 없앴다.
‘마나 방패를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다니!’
즐거운 기분으로 모부의 삿갓을 밟고 다시 도약했다.
‘이번에도!’
나는 이번에는 내 위의 허공에 마나 방패를 만들어냈다.
“마나 방패!”
역시 2미터 앞의 지점에 마나 방패가 나타났고, 나는 허공에서 휘릭 몸을 뒤집으며 마나 방패에 발을 대었다.
찰나의 순간, 무릎을 접었다가 발끝에 힘을 주고.
두 단검을 역수로 고쳐 쥐며, 다시 모부의 삿갓을 향해 도약했다.
“백어택!”
두 단검이 모부의 삿갓을 내리찍었다.
쿠구궁!
내 두 개의 단검이 모부의 삿갓을 뚫어 내리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모래들이 솟구치며 모부의 머리가 움푹 파였다.
나는 모부의 모래들을 가르며 놈의 몸속 깊숙이 떨어졌다.
모부의 몸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모부가 내지르는 비명이 몸속에 울려 퍼졌다.
“휴우웃!”
나는 모부가 고통에 힘겨워하는 틈을 타 마나구들을 만들어 모부의 몸 이곳저곳에 꽂아 넣었다.
펑! 퍼엉! 펑!
모부의 몸 안에서 연달아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휴우우욱!”
모부의 몸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와 보니.
모부의 잘린 팔은 바다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상태였지만, 각성자들은 모두 무사했다.
쫄딱 젖은 채, 반쯤 잠겨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지반의 위로 올라서 있었다.
각성자들이 무사함을 확인한 나는 뒤로 돌아 모부의 상태를 살폈다.
형태를 잃고 구멍이 숭숭 뚫린 모부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해야겠네.’
나는 고개를 돌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모부를 끝장낼 마지막 방법.
처음 해보는 것이었지만, 왠지 자신이 있었다.
마나는 어디에든 존재했다.
공기 중에도 있고 건물의 벽 사이에도 있으며 심지어 사람의 안에도.
그리고 물속에도.
나는 바닷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