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모부.”
내 부름에 모래를 흩뿌려 레부의 불길을 잡고 있던 모부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내가 손을 까닥이자 모부가 잔뜩 한숨을 내뱉으며 바닥을 스슥 미끄러져 내게 다가왔다.
뒤에서 불을 활활 태우고 있던 레부가 슬쩍 불을 죽였다.
“공격해 봐.”
“휴? 갑자기요? 주인을요? 공격하라고 해놓고 또 저 죽어라 패려구요?”
모부가 삐딱하게 물었다.
“진짜 패기 전에 빨리.”
“흇!”
모부가 속에서 무언가를 훅 끌어올려 내게 뱉어냈다.
레부가 불꽃을 쏘아내던 것과 비슷했는데, 모부가 뱉어낸 것은 야구공 크기의 모래공이었다.
부웅!
묵직한 모래공이 빠르게 날아왔다.
“마나 방패.”
촤르륵.
악마의 고양이 특성 레벨이 오른 덕에 마나 방패의 시전 속도가 빨라졌다.
일반 가정집의 미서기창만 한 크기의 마나막 30장이 순식간에 겹쳐졌다.
‘이게 레벨 3 마나 방패.’
쿠웅!
모부의 모래공이 마나 방패에 부딪혔다.
야구공만한 모래 덩어리라 무게가 꽤 나갔기 때문에 마나 방패에 금이 갔다.
공을 직접 맞은 앞쪽에만.
뒤쪽까지 그 금이 이어져 마나 방패가 깨지지는 않았다.
‘이정도 강도라면 그때 상급 놀의 도끼도 한 번 정도는 버티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나 방패를 해제했다.
“흇!”
그때 모부가 또 한 번 모래공을 뱉어냈다.
레부와는 다르게 공격을 해 보랬더니 아주 연속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블링크.”
이번에는 레벨 1의 블링크를 사용해 모부의 모래공을 피해 모부의 뒤로 이동했다.
훅!
“휴? 뭐죠? 또 사라졌어?”
마지막으로 테스트해 볼 건 레벨 5의 염력.
레벨 5의 염력은 동시에 120곳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제는 개수에 일일이 연연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다.
‘120개를 일일이 셀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염력을 이용해 마나들을 움직여, 바늘을 닮은 형태의 창들을 만들어냈다.
“마나창.”
대신 바늘보다 더 길쭉하게.
기다란 꼬챙이 같은 120개의 마나창을 떠올리긴 했지만, 갯수가 맞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냥 내 옆에 빽빽하게 생성된 마나창들을 모부의 등으로 날려 보냈다.
촤아악!
수십 개의 마나창이 모부의 등을 향해 쏘아져 나갔고, 곧 모부의 몸에 수십의 바늘구멍들이 펑펑 뚫렸다.
“휴, 흇! 휴웃!”
모든 마나창이 모부를 통과하자, 온몸에 구멍이 송송 뚫린 모부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르륵.
바닥에 쌓인 모래 더미에 모부의 얼굴인 직선 세 개가 그려졌다.
두 눈이 확 치켜떠지더니 모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휴, 정말! 악마네요, 주인은. 공격해보라고 할 땐 언제고 공격하니까 또 이렇게 벌집을 만들어 놓네요? 이건 제가 너무 손해 아닌가요?”
나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모래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오, 어떻게 알았어? 내 전용 특성이 악마거든.”
전용 특성 악마의 고양이.
모부가 사람을 볼 줄 아는 모양이다.
모부는 부들부들 떨며 잔뜩 치켜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식 웃은 나는 벽에 꽂혀 있던 두 단검을 거둬들였다.
“도토리들. 집에 가자.”
“쿄?”
내 말에 멀찍이서 모부가 터져나가는 것을 구경하던 레부가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와.”
염력으로 거둬들인 심연의 불꽃을 손에 쥐어 보이자.
“쿄.”
레부가 스르륵 다가와 불꽃 속으로 이동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모부에게 나는 모래의 심장을 내밀었다.
“너도 들어와.”
“…휴.”
한숨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은 모부가 모래의 심장 속으로 스르륵 흡수되었다.
나는 두 슬라임을 데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 * *
독일 뮌헨의 마리엔 광장.
노란색 연기로 덮여 있던 구체가 크게 확장되더니, 곧 밝은 빛이 번쩍였다.
광장의 통제된 게이트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마구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 또 클리어!”
“멋있다!”
“니엘 최고!”
그리고 그 환호성 속에서, 게이트의 하얀빛을 뚫고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금색의 긴 머리카락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상의의 오른쪽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여자의 팔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여자가 신고 있는 그리브 부츠에도 피가 흥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강이 부분에 세로로 길게 뻗쳐 무릎 위까지 솟아 있는 날과 발의 앞뒤로 튀어나온 비죽한 칼날들에서도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그런 여자의 모습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조금 잦아들었다.
그때 여자가 주먹 쥔 왼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확 쳐들며 크게 외쳤다.
“이예! 니엘이 또 클리어해냈습니다!”
“이야아아아!”
“와아아!”
다시 한 번 사람들의 환호성이 마리엔 광장을 뒤흔들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온 여자, 니엘 켈러는 신나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니엘!”
뒤쪽에서 안경을 낀 한 남자가 니엘에게 다가왔다.
니엘의 개인 비서인 루이스였다.
루이스는 들고 있던 얇은 담요를 니엘에게 걸쳐주었다.
“팔 다친 거야?”
“응. 살짝. 근데 대부분은 그놈 피.”
니엘이 담요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참, 세계 랭킹 나왔어?”
니엘이 반짝이는 녹빛 눈으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나왔어. 근데 다친 팔 치료가 먼저야.”
“심하게 안 다쳤다니까? 그리고 어차피 가는 길에 할 거 없잖아.”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고, 니엘은 여전히 자신에게 환호성을 보내오는 사람들에게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인사를 마친 니엘은 루이스를 따라 근처에 세워두었던 차로 향했다.
니엘이 뒷좌석의 문을 열고 의자에 걸터앉더니 다리에 차고 있던 피 묻은 그리브를 벗었다.
절그럭. 절그럭.
“어우, 답답해! 이거 너무 무거워, 진짜.”
니엘이 잔뜩 투덜거렸다. 그 사이 운전석에 올라탄 루이스가 시동을 걸며 잔소리를 했다.
“잘 놔둬. 또 시트 찢게 두지 말고.”
입을 비죽인 니엘이 정강이 쪽에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그리브를 차 바닥에 조심스레 눕혀두었다.
그리고는 가벼워진 양발을 뒷좌석에 끌어올리며 문을 닫았다.
“흐아, 살겠다!”
니엘은 의자에 푹 기대며 옆좌석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끌어다가 무릎 위에 놓았다.
“어디 한 번 볼까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트북을 연 니엘은 바로 한국의 각성 기관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세계 각성자들의 랭킹표를 살폈다.
이내 니엘의 표정이 실망으로 가득 찼다.
“뭐야아? 나 3위밖에 안 돼?”
니엘의 말에 운전 중이던 루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3위밖에라니? 너 그것도 대단한 거야.”
“그래도 2위는 할 줄 알았는데!”
니엘이 입술을 비죽이며 다시 랭킹을 살폈다.
자신의 위에 있는 1, 2위 모두 한국의 각성자들이었다.
윤도아와 주선오.
윤도아의 활약상이야 워낙 유명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게이트 브레이크 영상도 보았다.
상급 푸른 놀을 단번에 잡는 모습은 니엘이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최근 캐나다의 공원 속 무덤 게이트까지 성공적으로 닫았다.
그리고 그때 함께 했던 주선오 역시 알고 있었다.
세계 최초 각성자로 진작부터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 유명세에 외모도 한몫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둘의 이름을 빤히 바라보던 니엘은 새 창을 띄워 둘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오는 것들이라고는 이미 다 니엘이 알고 있는 정보들뿐이었다.
니엘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노트북 화면을 지긋이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차분하게 루이스를 불렀다.
“루이스.”
급변한 니엘의 목소리에 루이스는 조금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역시나.
“내일 한국행 비행기 티켓 좀 끊어줄래? 만나보고 싶어졌어.”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우려되는 사항들을 이야기하려 입을 여는데, 니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잠깐! 그만! 좀 전에 닫은 A급으로 일단 브레이크 위험성 있는 게이트들은 다 마무리됐잖아? 남은 게이트들은 내가 아니더라도 샐러맨더 무리가 알아서 정리해 줄 거고. 맞지? 그리고 나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좋은 실력을 가진 랭커들을 만나봐야 하지 않겠어? 맞지?”
빠르게 말을 쏟아붓는 니엘을 보며, 루이스는 잔소리 시전을 포기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이예!”
니엘이 신이 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번쩍 들어보였다.
노트북을 닫아 내려두고는 즐거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국의 랭커들이라.’
둘을 만나볼 생각에 니엘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 *
[잔액 18,004,070,540원]
통장의 잔액을 확인한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수를 세는 것조차 힘들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을 해본 결과, 잔액은 확실히 100억을 넘어선 상태였다.
“…미쳤네.”
며칠 전 각성 기관으로부터 캐나다의 게이트 지원금이 들어왔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잔액을 확인하니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회귀 전의 기본 단위인 조 보다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렇다고 100억이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지원 금액이 이렇게 높은 단위로 올라가는 이유는 각성자의 목숨값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겠다고 우겨서 간 것도 아니었고, 그곳에서 먼저 요청을 해왔다.
더구나 평범한 게이트도 아니고 자국의 각성자들이 수없이 죽어 나간 게이트를 닫아달라고 부른 것.
대체 어떤 각성자가 속 편하게 그 요청을 수락하겠냐는 말이다.
‘나야 뭐 별개로 치고.’
게이트는 아주 작은 실수도 죽음과 연결되는 무서운 곳이다.
그러니 그만큼의 위험부담금이 따르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사실 누구든 솔깃할 법하지 않은가.
사실 주선오는 그닥 내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회귀 전 주선오는 캐나다 정부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었다.
그 당시 국내에서 일어났던 게이트 브레이크 수습 건으로 바쁜 탓도 있었지만, 깰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돈이 모자란 놈도 아니고.
하지만 이번에는 군소리 없이 나를 따라 캐나다로 향한 걸 보면, 아무래도 어지간히 나를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 따라와 줘서 나쁠 건 없지.’
“어! 누나, 누나, 누나!”
뒤에서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신교진이었다. 금세 내 옆으로 다가온 신교진이 물었다.
“웬일이에요?”
“왜. 오면 안 돼?”
“아뇨, 오랜만에 오셨길래요?”
“내가 개의 이빨 무리도 아닌데 자주 올 필요는 없지?”
“그럼 오늘은 왜요?”
신교진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신교진을 바라보았다.
신교진이 슬쩍 눈치를 보며 한발 물러섰다.
“선오가 와 달래서. 누가 찾아온 모양이던데.”
“아, 그래요? 누구지? 왜 기관으로 안 가고 여기로 왔대요?”
신교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요새 의뢰 연락이 없네, 넌?”
“딱 꽂히는 게 없어요. 그래서 그냥 다 선오한테 넘기거나 시언이나 도빈이한테 넘기고 있어요.”
사실 신교진을 부려먹을 수 있는 한 달하고 3일의 기간이 지났기에 신교진이 내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신교진은 군말 없이 계속 내 말을 따랐다.
우리는 개의 이빨 사무실로 올라갔다.
“개선오, 나 왔다.”
신교진이 단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다가 멈칫했다.
“어, 손님 있네. 도아 누나 같이 왔으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나는 앞길을 막아선 신교진을 단장실로 밀어 넣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곱슬진 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사람이 앉아 있었다.
‘외국인?’
맞은편에 앉아있던 주선오가 일어나 내게 고개를 꾸벅였다.
“오셨어요?”
그러자 금발의 사람이 슥 나를 돌아보았다.
‘…어?’
왠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
높은 코 아래에 위치한 커다란 입술.
여자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누구더라…?’
나는 여우 구슬로 여자의 정보를 살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마터면 허리 뒤의 단검을 뽑아 들 뻔했다.
‘저 여자가 왜 여기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