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머리 위를 가득 채운 수풀 사이사이로 달빛이 떨어져 내렸다.
수풀의 천장을 만들어내는 나무의 기둥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기둥들이 뿌리를 박은 바닥을 보아하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나무 위인 듯했다.
바닥 역시 결이 살아있는 나무였다.
나는 탐지로 주변을 살폈다.
10미터 정도는 돼 보이는 두께의 나무 기둥이 위로 높게 솟아 있었고, 세 개의 큰 가지가 위쪽을 향해 뻗쳐 있었다.
이 나무가 땅에서 얼마나 높이 솟아오른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육안으로는 그저 가지나 수풀밖에 보이지 않았고 탐지로도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나무 기둥밖에는 볼 수 없었다.
‘나무 위의 개미가 된 기분인데.’
나는 비추는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니엘을 피해 살짝 옆으로 걸어 나왔다.
“나무 위인가요?”
“그런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들어온 주선오를 확인한 나는 둘을 보며 말했다.
“마침 길이 세 개 같네요. 흩어져보는 건 어때요?”
내 제안에 니엘은 조금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같이 들어온 의미가 없잖아요?”
“아직 클리어 목표를 모르니까 잠깐 흩어져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주선오가 내 말에 동의했다.
때마침, 뒤쪽의 나무 기둥에서 무언가 스슥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선오가 빠르게 칼을 뽑아 들었고 니엘 역시 나무 기둥을 경계했다.
‘반응속도는 니엘도 뒤지지 않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기둥을 바라보았다.
다람쥐였다.
웅장한 나무의 크기에 비해서는 아주 작아 보였지만.
실상 그 다람쥐는 사람만한 크기였다.
“…저거 다람쥐 맞아요?”
자신보다 더 커 보이는 다람쥐의 모습에, 니엘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다람쥐를 쏘아보았다.
니엘과 다람쥐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나무 기둥에서 다람쥐 두 마리가 추가로 내려왔다.
총 세 마리의 다람쥐가 우리 앞에 섰다.
그러더니 곧 한 마리씩 셋의 앞으로 다가왔다.
개중 가장 작은 다람쥐가 니엘에게 다가갔는데 니엘이 조금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야! 뭔데? 싸우자는 거야?”
니엘이 작은 두 주먹을 움켜쥐며 다람쥐에게 물었다.
겉보기에는 오히려 니엘이 다람쥐의 한주먹감일 것 같았지만.
어쨌든 이 다람쥐들은 공격 대상이 아니었다.
“찍! 안내!”
“안내! 찍!”
다람쥐들이 시끄럽게 찍찍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각자 다른 세 갈래의 길로 다다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따로 이동해야겠는데요?”
내 말에 니엘이 입을 비죽이더니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하필 걸려도 이런 게이트가 걸렸네. 이따 봐요, 1위, 2위님.”
니엘이 잔뜩 실망한 얼굴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작은 다람쥐를 따라 걸어갔다.
주선오 역시 내게 고개를 꾸벅인 후 다람쥐를 따라 다른 길로 이동했다.
곧 둘은 다람쥐의 안내를 따라 가지와 연결된 수풀 위쪽으로 사라졌다.
남은 한 다람쥐만이 다른 줄기 앞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레부, 모부.”
내 부름에 레부가 심연의 불꽃에서 퐁 튀어나왔다.
하지만 모부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볍게 혀를 찬 나는 주머니에 있던 모래의 심장을 꺼내 그것을 탈탈 털었다.
“휴!”
짜증 가득한 한숨과 함께 모부가 튀어나왔다.
“어지럽잖아요!”
“그러게 한 번에 나왔어야지.”
“쿄쿄쿄.”
내게 한소리를 듣는 모부를 보며 레부가 쿄쿄 웃었다.
나는 둘에게 말했다.
“쟤들 둘 따라다니면서 주워 먹을 거 있으면 주워와.”
“쿄쿄, 알겠습니다.”
레부가 먼저 니엘이 향한 가지를 따라 빠릿하게 움직였다.
모부는 짙은 한숨을 내뱉고는 터벅터벅 걸어 주선오의 뒤를 따랐다.
나는 두 슬라임의 이동을 확인한 후 다람쥐를 따라 내 길을 걸었다.
* * *
“왜 하필 이렇게 나뉘냐고. 난 1, 2위님 실력을 보고 싶었던 건데!”
니엘이 나무를 오르며 잔뜩 투덜거렸다.
본 목적과는 다르게 이렇게 길이 나뉘어버리니 둘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런 니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람쥐는 그저 찍찍거리며 니엘을 안내할 뿐이었다.
“좀 천천히 가! 내가 너처럼 다람쥐인 줄 알아?”
니엘이 앞서가는 다람쥐에게 쏘아붙였지만, 다람쥐는 그저 찍? 하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니엘은 다시 입을 비죽이고는 다람쥐를 따라 나무를 올랐다.
수직으로 위로 곧게 서 있는 나무.
아무리 나무를 잘 타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르기 힘든 곳이었지만, 니엘에게는 도마뱀 신의 가호가 있었다.
반데르발스.
도마뱀이 벽을 탈 수 있는 인력이었다.
그에 따른 중력거부 스탯과 상호작용 스킬로, 니엘은 벽이나 천장을 마음껏 탈 수 있었다.
물론 어기적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남에게 보이기 조금 민망할 수도 있었지만, 니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폼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람.’
지금처럼 도움만 되면 그만.
니엘은 다람쥐를 따라 빠르게 나무를 올랐다.
하지만 위쪽에서 다람쥐 말고 다른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태를 한 나무껍질들이었다.
“우와, 저게 뭐람?”
그것들을 발견한 다람쥐가 후다닥 뒤로 물러서더니 니엘의 뒤로 숨어들었다.
“찍, 찍!”
그러면서 마치 저것들을 혼내달라는 듯 계속 찍찍거렸다.
“아우, 시끄러!”
니엘이 다람쥐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자 다람쥐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니엘의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사이 나무껍질들이 수직에 가까운 나무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폭포의 물결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나무껍질을 보며 니엘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불을 쓰면 올라가는 나무가 타버릴지도 모르니까.’
니엘은 샐러맨더의 특성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리고는 도마뱀에 빙의한 듯 내려오는 나무껍질들을 향해 다다다 돌진해 올라갔다.
나무껍질들 역시 그런 니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으드득. 으득.
나무껍질의 손가락들이 니엘을 향해 길게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가지들이 니엘에게 닿으려는 순간.
니엘이 오른손을 내려 허리 아래쪽의 나무를 잡더니 상체를 오른쪽 아래로 확 내렸다.
동시에 양다리가 왼쪽 위로 차올려졌고, 니엘의 그리브에 장착된 칼날이 나무껍질들을 베어냈다.
서걱!
부서진 나무껍질의 손가락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니엘은 차올렸던 양발을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 기둥을 오르던 원래 자세를 취했다.
니엘이 베어낸 나무껍질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위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니엘은 그 길을 따라 올라가 같은 방식으로 다리를 휘둘러 나무껍질들을 베어나갔다.
서걱!
서걱!
니엘이 날렵한 움직임으로 나무껍질들을 베어내며 길을 열었다.
뒤에서 찍찍거리던 다람쥐 역시 니엘이 뚫는 길을 따라 후다닥 뛰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수직의 가지가 끝나고, 이어진 가지로 올라서자.
많은 수의 나무껍질을 베어냈음에도, 비슷한 숫자의 나무껍질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가지로 올라선 니엘과 다람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본 다람쥐는 다시 나무를 내려갔다.
니엘이 입술을 비죽였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이제 기둥도 다 올라왔겠다, 나무가 조금 타더라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니엘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불부림!”
니엘의 양손 위의 공간이 뒤틀리며 작은 불씨가 생성되었다.
그 불씨는 곧 화르륵 타올라 주먹 크기의 불덩이를 만들었다.
니엘은 불덩이를 자신의 그리브 칼날에 슥 문질렀고, 그리브의 칼날 위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을 본 나무껍질들이 멈칫했다.
니엘은 그런 나무껍질들을 향해 돌진했다.
앞으로 공중제비를 넘은 니엘이 두 다리를 휘두르며 나무껍질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돌렸고 그에 따라 다리까지 함께 돌아가며 주변에 불의 원을 만들어냈다.
몇몇 나무껍질들이 불에 타 바스라졌다.
그 광경에 다른 나무껍질들은 섣불리 니엘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그 틈을 타 니엘은 빠르게 바닥을 누비며 나무껍질들을 정리했다.
마지막 나무껍질을 베어낸 후 똑바로 몸을 세운 니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흐아!”
나뭇가지 밑에서 비죽 고개를 내밀고 있던 다람쥐가 주변이 정리되자 슬쩍 기어 올라왔다.
니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는 다람쥐에게 앞을 가리켰다.
“다시 안내해.”
하지만 다람쥐가 또다시 찍찍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왜, 또!”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또다시 나타나 앞길을 막아선 나무껍질들을 보며 니엘은 기가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곧 투지에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무껍질들을 쏘아보았다.
“니들 다 태워버릴 거야.”
* * *
다람쥐의 뒤를 쫓던 주선오에게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어났다.
세 갈림길에서 헤어진 후부터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모래 슬라임 모부.
윤도아가 잡아둔 슬라임이니 주인의 명을 받고 자신을 쫓아온 것이긴 할 텐데.
‘왠지 불안한데.’
그런데다가 앞에는 사람을 닮은 나무껍질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무리 베어내도 수가 줄지 않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놈들은 일정 거리 이상이 멀어지면 달려들지 않았다.
아니, 오고 싶은데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나무껍질들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주선오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무껍질 피부를 가진 인간형 몬스터….’
현재 주선오의 후각 스탯 범위는 40미터.
나무껍질의 냄새는 바닥을 이루는 나무와 미묘하게 달랐다.
살짝의 악취가 섞인 나무의 향.
그 향은 놈들의 뒤쪽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우선은 돌파해야겠어.’
주선오가 칼을 고쳐 쥐는데.
“휴. 멍청한 사람이네요.”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던 모부가 한 마디 던졌다.
여간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멈칫한 주선오가 옆에 선 모부를 바라보았다.
모부가 쭉 찢어진 눈으로 주선오를 흘겨보며 물었다.
“드라이어드도 모르나요?”
“드라이어드?’
“휴.”
모부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이름을 듣고 나니 얼핏 예전에 신교진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무에 사는 요정으로 본체는 나무이며 본체로부터 일정거리 이상을 떨어질 수 없다고 했던.
“드라이어드구나.”
주선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강한 향이 풍기는 것이 놈들의 본체가 분명했다.
그래서 저 드라이어드들이 일정 범위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주선오가 모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고마워.”
모부의 눈이 가늘어졌다.
“휴? 저한테 고맙다고요?”
“덕분에 정체 파악을 했으니까.”
모부의 눈이 더더욱 가늘어지는 사이, 주선오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드라이어드들의 앞에 멈추어 선 후.
“검격증폭.”
들고 있던 칼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서걱!
주선오를 둘러싸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한 번에 잘려 나갔다.
그것들을 한 번에 베어내기에는 한참 모자란 길이의 칼이었지만, 주선오가 사용한 검격증폭 스킬이 검격의 길이를 증가시켜주었다.
스킬을 사용한 검격의 범위는 주선오가 가진 검격 스탯의 두 배 이상 증폭되었고 그 덕에 단번에 놈들을 베어낼 수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이 무너지는 사이, 주선오가 그들의 잔해를 밟고 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찍!”
뒤에서 지켜보던 다람쥐 역시 주선오를 따라 달렸다.
“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부 역시 나무 위를 미끄러지듯 주선오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본체를 베어야한다.’
본체인 나무를 베어내지 않는 한, 드라이어드들은 계속해서 주선오의 앞을 막아설 터.
그리고 곧 주선오의 앞에 길을 막아선 나무들이 보였다.
수풀 천장을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과는 다르게 바닥의 나무에 억지로 뿌리를 박은 듯한 모습.
악취 섞인 나무의 향이 강하게 풍겨왔다.
결정적으로 그 나무들에서 주선오가 베어냈던 인간형 나무껍질들이 스르륵 분리되어 나오고 있었다.
주선오가 달리기를 멈추지 않은 채 빼곡하게 붙어있는 나무, 드라이어드들의 본체를 향해 다시 한 번 칼을 휘둘렀다.
“이빨벼림. 검격증폭.”
서걱!
반짝이는 날의 빛이 수 배 이상 길어진 검격을 따라 잔상을 남긴 후 흩어졌다.
주선오의 칼에 드라이어드의 본체들이 깔끔하게 반으로 잘려 나갔다.
“꺄아아아….”
나무의 비명이 잦아들며 반 토막 난 나무들이 빠르게 말라비틀어졌다.
주선오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검집에 칼을 넣었다.
“휴휴휴. 탐나는 스킬이군요.”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주선오가 흠칫 놀라며 넣었던 칼을 꺼내며 휘둘렀다.
“휴!”
하지만 주선오의 칼은 모부의 몸에 덜컥 걸려버렸다.
모부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곧 바람 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휴휴휴휴….”
‘방심했다!’
주선오가 모부에게 스르륵 삼켜지는 자신의 칼을 놓고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모부를 바라보았다.
모부는 주선오의 칼을 모조리 삼킨 후 휴휴거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스킬을 주워 먹는 모부의 슬라임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