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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54화 (55/201)

제54화

“…2위님?”

니엘이 중얼거렸다.

“쿄!”

레부가 바닥에서 퐁 튀어 오르더니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레부는 주변의 불길을 흡수한 후 다른 불길을 따라 이동했고 레부가 지나간 자리에는 타다 만 나무들만 남아 있었다.

곧 마지막 남은 불꽃인 레부가 다시 사람의 형체를 취했다.

나무의 탄내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주선오가 숯검댕이가 된 드라이어드들을 지나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니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어…. 네….”

니엘이 멍한 표정으로 주선오를 바라보았다.

‘이것들을 한 번에 베어냈다고?’

척 보기에도 주선오가 베어낸 드라이어드의 숲은 10여 미터는 되어 보였다.

보통의 칼이라면 나무 하나를 베어내기도 힘들 텐데, 이 넓은 공간의 나무들을 단번에 베어냈다니.

게다가 주선오의 손에 들린 것은 칼도 아니었다.

‘…칼집?’

니엘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주선오를 바라보았다.

주선오가 일어나지 않는 니엘을 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니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니엘은 주선오가 내민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근데 왜 여기에?”

주선오가 칼집으로 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합류 지점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쪽 길에 드라이어드들의 본체가 보이더군요. 가까이 다가가도 분신들이 나타나지 않길래 다른 곳에서 전투 중일 거라 판단하고 본체를 베었습니다.”

주선오가 설명했다.

“흐아아….”

니엘이 진이 빠진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 그것도 모르고 죽어라 분신만 베고 있었네요….”

아마 불꽃 슬라임 레부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계속 나타나는 나무껍질만 상대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주선오가 조금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초반에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모래 슬라임인 모부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요.”

주선오가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주선오를 안내했던 다람쥐와 함께 이상한 모래색의 젤리가 서 있었다.

불꽃 슬라임 레부와 닮아 있었다. 원뿔형의 모자에 구불거리는 지팡이까지 짚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다람쥐의 반만한 크기였다.

“쿄? 쿄쿄쿄쿄! 모부! 쿄쿄쿄쿄! 꼴이 그게 뭡니까?”

레부가 작아진 모부를 보며 마구 비웃기 시작했다.

주선오와 니엘을 안내하던 두 다람쥐가 찍찍거리며 자신들보다 작은 모부를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휴! 이것들이 뭐 하는 건가요! 작아졌다고 지금 당신들까지 절 무시하나요?”

모부가 버럭 외치며 형체를 무너트리며 다람쥐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람쥐들은 잽싸게 모부의 모래를 피해내고 찍찍거리며 웃어댔다.

“슬라임…. 슬라임들이 왜 여기에 있나요?”

니엘이 신기한 듯 물었다.

“도아 누나가 사로잡은 놈들입니다. 아마 저희가 헤맬 것을 예상하고 붙여놓은 것 같아요.”

주선오의 물음에 니엘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1위님 애완 슬라임? 1위님이 붙잡았다고요?”

“네.”

“슬라임을?”

니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주선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은 올라가시죠.”

니엘은 뭔가 묘한 기분으로 주선오의 뒤를 따랐다.

슬라임을 잡아서 키우고 있는 각성자라니.

니엘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몬스터라면 무조건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윤도아는 그런 놈들을 보내서 각성자들을 돕게 했다.

잡아둔 슬라임들에 대한 신용이 그만큼 굉장한 걸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저 레부는 날 돕긴 했지?’

니엘이 모래 슬라임과 투닥거리는 레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주선오가 걸음을 멈췄다.

니엘이 생각에서 벗어나 앞을 바라보자 앞에 또 다른 드라이어드의 숲이 나타났다.

니엘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주선오가 칼집을 바로 잡았다.

“이빨벼림. 검격증폭. 물어뜯기.”

세 개의 스킬이 연속으로 사용되었다.

검집의 좁은 단면이 날카롭게 빛났다.

주선오가 날이 선 칼집을 횡으로 그었고, 순식간에 빛나는 날이 수미터 확장되어 뻗어 나갔다.

그리고 다섯 갈래로 나뉜 칼이 드라이어드의 무리를 순식간에 베어냈다.

콰드드드득!

쿠웅!

순식간에 길이 뚫렸다.

“…와.”

니엘이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니엘에게는 저 많은 드라이어드의 무리를 단번에 제압할만한 화력이 없었다.

니엘이 드라이어드의 무리를 제압하려면 아까처럼 불을 붙인 후 모두 타오를 때까지 나무들을 베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불꽃 운용 스탯과 불부림의 레벨이 더 높았다면 단번에 재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 자신이 2위에 오르지 못했는지, 직접 2위를 만나보니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의 니엘은 세계 2위조차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독일에서는 랭킹 1위로 추앙받기만 하던 니엘이었다.

하지만 니엘은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세상 밖으로 나오니 자신보다 뛰어난 각성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엘은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역시 오길 잘했어!’

니엘의 눈빛이 반짝였다.

게다가 2위가 저 정도라면.

‘1위는….’

그때 둘의 앞에 윤도아가 나타났다.

* * *

나는 옆에 드러눕다시피 한 다람쥐의 머리를 살살 긁어주며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

‘늦네.’

슬슬 지겨워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선오와 니엘이 올라올 길목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다람쥐가 빠릿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졸졸 쫓아왔다.

“찍? 찍!”

다람쥐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드라이어드를 가리켰다.

저걸 마저 잡지 않고 어딜 가냐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비켜. 애들 데려오게.”

내가 손짓하자 시무룩해진 다람쥐가 옆으로 비켜섰다.

길목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아래쪽에 드라이어드의 숲이 보였다.

건너편이 조금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아마 앞까지 다 온 모양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드라이어드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주선오의 스킬이 드라이어드의 숲을 휩쓸었다.

‘아, 저거.’

기본 이빨벼림 스킬에 검격증폭과 물어뜯기까지 적용된 주선오의 칼날이었다.

회귀 전 가장 부러웠던 스킬 중 하나였다.

내게 있던 은밀한 고양이 전용 특성은 개인전에 강한 특성이었지 일대 다수에는 성가신 편이었다.

반면 주선오의 저 스킬은 한 명이든 여럿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검격의 범위가 닿는 한, 그 안의 모든 적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파스스스—.

반으로 갈린 드라이어드들이 말라붙으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 너머에 주선오와 니엘의 모습이 나타났다.

“늦어.”

내가 둘을 보며 한 마디 던졌다.

나를 발견한 주선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가 나타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주선오의 손에 들린 것은 칼이 아니라 칼집이었다.

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걸 보니 아무래도 모부가 주선오의 칼을 삼킨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주선오와 니엘의 뒤에 서 있던 모부는 반쯤 작아져 있는 상태였다.

‘괜히 덤볐다가 모래만 털렸나 보네.’

나는 혀를 차고는 말했다.

“모부, 뱉어.”

내 말에 모부는 쭉 찢어진 눈으로 팔짱을 끼더니.

“휴!”

뭔가를 훅 뱉어냈다.

주선오의 칼이었지만 이제는 너무 녹아버려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주선오가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떨어진 칼이었던 형체를 바라보았다.

모부는 아무런 사과 없이 삐딱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레부야.”

슬쩍 내 눈치를 보던 레부가 대답했다.

“…쿄?”

“칼 하나 꺼내 봐.”

레부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연대책임, 몰라? 모부가 칼을 없앴으니까 네가 책임지고 칼 줘야지.”

“…쿄…! 그런…!”

레부의 표정에 억울함이 가득 실렸다.

“빨리.”

조금 낮아진 내 목소리에 레부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그리고는 매섭게 모부를 쏘아보더니 칼을 하나 뱉어냈다.

“쿄!”

곧 주선오의 앞에 기다란 칼이 하나 턱 떨어졌다.

보잘것없는 C급 아이템이었지만 그냥 칼집만 들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할 터였다.

가벼운 칼집을 휘두르는 것과 묵직한 칼을 휘두르는 것 모두 장단점이 있다.

때문에 회귀 전의 주선오는 두 개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사용하곤 했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써.”

“네.”

주선오가 칼을 집어 들었다.

“모부는 이따 면담 좀 하자.”

“휴!”

모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일단 레부와 모부를 각각의 집으로 불러들인 후, 니엘을 살폈다.

아래층에서 봤을 때보다 지쳐 보이는 것이 역시나 드라이어드의 분신을 상대로 꽤 고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의 생기는 오히려 더 뚜렷해져 있었다.

조금 전 주선오의 스킬을 본 것이 좋은 자극이 된 것 같았다.

“올라가죠.”

내가 먼저 앞장을 서기 시작했고 곧 다람쥐 세 마리가 나를 지나쳐 앞으로 다다다 달려갔다.

“올라오면서 드라이어드들을 다 정리해서 이제 남은 건 저거 하나일 거예요.”

내가 앞에 보이는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가리켰다.

“…저것도 드라이어드예요?”

니엘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어왔다.

“저게 모체예요. 저기 매달린 알에서 드라이어드들이 태어나는 거고요.”

“…와….”

니엘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걸 없애면 되겠네요.”

우리가 드라이어드의 모체로 다가서자 모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다람쥐들이 다시 뒤로 빠르게 물러나서는 찍찍거렸다.

까드득.

모체의 가지에 매달려있던 드라이어드의 열매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열매가 반으로 쪼개졌다.

쩌적!

반으로 갈라진 열매의 사이에서 갈색의 덩어리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철퍽!

투명하지만 진득해 보이는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의 몸부림처럼 양수와 함께 떨어진 갈색 덩어리가 꿈틀거리더니.

곧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위층으로 올라오면서 만났던 드라이어드의 인간형 분신을 닮은 모습.

하지만 조금 전까지 베어냈던 드라이어드와는 달랐다.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임시로 뱉어내는 드라이어드의 정예병으로, 저 모습 자체가 본체였다

철퍽! 철퍽!

모체의 주변으로 갓 태어난 정예병들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예병들은 우리의 앞을 막아서며 양팔을 날카롭게 벼렸다.

“와. 변신도 하네.”

니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나와 주선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분, 괜찮으면 저 좀 가르쳐주시지 않을래요?”

니엘의 말에 주선오가 나를 바라보았다.

“좀 전에 2위님 보고 확실하게 비빌 언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의 제 상태를 평가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니엘은 자신의 실력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력에 자만하지 않고 배움의 노력을 이어가는 사람.

이런 점 때문에 회귀 전의 니엘이 그만큼 강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니엘이 활짝 웃고는 몸을 돌려 드라이어드 정예병들을 바라보았다.

“불부림.”

니엘의 양손에 커다란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니엘이 손의 화염구를 정예병들을 향해 던졌다.

니엘이 던진 화염구는 마른 나무에 불씨가 옮겨붙듯 정예병들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전 니엘의 불부림이라면 저 정도쯤은 단번에 재로 만들었을 텐데 지금의 화력은 아직 약했다.

드라이어드의 정예병들을 모두 태우려면 반나절은 걸릴 것 같았다.

“캬아악!”

불타오르는 정예병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니엘에게 달려들었다.

니엘이 앞으로 재주를 넘더니 그리브의 칼날로 정예병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브로 옮겨 붙은 불꽃은 니엘의 발짓에 따라 다시 정예병들의 몸으로 옮겨 붙었고 정예병들은 순식간에 전신이 불로 감싸였다.

하지만 정예병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니엘은 정예병들의 사이를 춤추듯 날아다니며 그리브를 휘둘렀다.

니엘의 그리브에 절단이 난 나무들은 바닥에 쏟아져 활활 타올랐다.

그런 불바닥을 누비는 니엘은 꼭 불과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각성 3개월 차 치고는 나쁘지 않지만….’

전성기의 니엘에 비하면 다리에 온전히 힘을 쓰지 못했고 쓸데없는 잔 동작들이 많았다.

게다가 아직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할 뿐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한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불바다의 중앙에 있던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열매를 맺은 가지들의 위, 기둥 꼭대기의 껍질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무껍질이 한 겹 한 겹 벗겨지더니 그 안에서 여인의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를 깎아 조각해놓은 여인의 모습 같았다.

곧 드라이어드 모체가 눈을 떴다.

그녀가 불타고 있는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모체의 굵은 가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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