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머리 위를 덮을 정도로 가득했던 가지들이 바닥을 내리쳤다.
쿠웅!
쿵!
자신의 주변으로 번지는 불을 진화하기 위함이리라.
그제야 모체의 등장을 알아차린 니엘이 빠르게 모체의 가지들을 피해냈다.
옆에 있던 주선오의 칼을 든 손이 움찔거렸다.
“아직은 괜찮아.”
내 말에 주선오가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체의 가지는 사정없이 바닥을 내리쳤고, 니엘은 그것을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사실 저렇게 피해낼 수 있는 것도 니엘이 조그맣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키가 큰 주선오나 나였다면 저렇게 피하는 것도 힘들었을 터.
‘물론 우리였다면 피하기보다 베어내는 쪽을 택했겠지만.’
아직 니엘에게는 그만한 화력이 없었다.
모체의 가지는 아직 살아 움직이던 자신의 정예병들까지 모조리 부수었다.
콰직!
카각!
잠시 후, 모체에 붙었던 불이 모두 진압되었다.
불이 꺼진 모체의 가지에서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불부림!”
연기 속에서 니엘이 만들어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때 연기 안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가신 인간이구나.>
“엥…? 누, 누가….”
니엘이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선오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반사적으로 칼을 앞으로 내밀며 연기 속을 경계했다.
<그런 불로 나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라이어드 모체의 목소리였다.
‘말하는 몬스터.’
안내자 이외의 말하는 몬스터라면 상당히 위험한 몬스터일 확률이 컸다.
하지만 그런 몬스터가 A급인 이 게이트에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의 이런 상황은 드라이어드의 특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드라이어드는 씨앗을 퍼트려 다른 나무에 정착한 후 그 나무를 양분으로 삼아 뿌리를 박고 영역을 넓히는 몬스터이다.
그리고 모든 드라이어드의 모체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 모체들을 통솔하는 것이 바로 드라이어드의 대모, 최초의 드라이어드였다.
이 게이트가 A급의 게이트라는 것은 저 드라이어드의 모체는 대모가 아니라는 뜻.
그저 흩날려온 씨앗에서 자란 드라이어드의 모체라는 것이다.
말을 하는 것도 단순히 대모가 연결된 모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고.
그리고 대모가 아닌 모체는 사실 별 볼 일 없는 몬스터였다.
“…말을 하네요.”
주선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무덤덤한 반응을 보더니 금세 당혹감을 감추었다.
니엘은 모든 동작을 멈춘 채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리를 내리기에 아주 좋은 곳을 찾았는데, 고작 인간에게 당하게 둘 수는 없지.>
모체가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모체의 다른 가지들이 뾰족하게 끝을 세운 채 니엘에게 꽂혀들었다.
푹! 푹! 푹!
“으악!”
니엘이 불을 내던지고는 가지를 피해 달렸다.
한 가지가 니엘의 불을 막아내더니 바닥을 내리쳐 불을 꺼트렸다.
그 사이 다른 가지들은 계속해서 바닥을 내리찍으며 니엘의 뒤를 쫓았다.
나뭇가지 하나가 니엘이 달려가던 방향 앞에서 튀어나왔다.
니엘이 흠칫 놀라며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빠른 속도로 니엘에게 달려들던 나뭇가지는 니엘을 뒤쫓으며 바닥을 찍던 나뭇가지에 부딪혔다.
콰드득!
니엘이 자신을 찌르려 들었던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더니 그 가지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벽을 타는 도마뱀의 특징이 녹아있는 신의 가호 반데르발스 덕이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모체가 아니었다.
모체가 니엘을 털어내기 위해 나뭇가지를 거칠게 흔들었다.
주선오가 흠칫하며 다시 한 번 칼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 기다려.”
내 말에 주선오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손에 힘을 풀었다.
니엘은 가지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꼭 쥐새끼 같구나.>
모체는 니엘을 털어내기를 포기하고 다른 가지들을 이용해 니엘이 오르는 가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푹!
콰득!
니엘은 가지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내며 빠르게 가지를 타고 올랐다.
그리고 수많은 가지의 공격을 헤치고 모체의 본체 앞에 도달했다.
“불부림!”
니엘이 다시 한 번 불을 생성해 그리브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가지를 굳게 디딘 후, 몸을 거꾸로 세워 한 바퀴 돌며 그리브의 날로 모체를 공격했다.
<호호호.>
모체의 웃음이 들려왔다.
촤륵!
벗겨졌던 모체의 나무껍질이 순식간에 솟아올라 본체를 감추었다.
“앗!”
니엘이 휘두르던 그리브가 본체를 감춘 나무껍질에 막혔다.
콰득!
설상가상으로 얼마나 세게 박혔는지 니엘의 그리브는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잘라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나무껍질 안에서 모체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동시에 니엘에게 수많은 가지가 날을 세우며 꽂혀 들기 시작했다.
“누나!”
주선오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살짝 한숨을 내쉰 나는 니엘의 앞을 바라보며 스킬을 사용했다.
“블링크.”
* * *
“젠장!”
니엘이 나무껍질에 박힌 그리브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어찌나 단단히 박혔는지 빠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런 니엘을 노리고 날을 세운 나뭇가지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니엘은 결국 그리브를 벗을 수밖에 없었다.
철컥!
니엘이 빠르게 뒤로 몸을 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후욱!
뾰족하게 날을 세운 나뭇가지가 니엘의 청재킷을 찢고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늦게 그리브를 벗었다면 분명 찢어진 건 청재킷이 아니라 니엘일 터.
니엘은 급하게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뒤쪽에 디딜 곳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니엘의 몸이 휘청이며 뒤로 떨어지려는 찰나.
덥썩!
무언가가 니엘을 붙잡았다.
“으, 억?”
어느새 나타난 윤도아가 떨어질 뻔한 니엘을 붙잡은 것이었다.
니엘이 동그래진 눈으로 윤도아를 바라보았다.
“1위님?”
“조심해요.”
작게 혀를 찬 윤도아가 니엘의 팔을 확 끌어올렸다.
<호오.>
놀란 건 드라이어드의 모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나른해진 목소리로 모체가 말했다.
<쥐새끼가 둘이 됐다고 달라질 건 없지.>
“제 뒤로.”
윤도아가 니엘을 자신의 뒤로 당겼다.
“마나 방패.”
윤도아의 앞에 반투명한 마나 방패가 나타났다.
그리고.
쾅! 카각!
콰앙!
둘에게 날아들던 나뭇가지들이 반투명한 마나 방패에 막혔다.
방패에 튕겨 나간 나뭇가지는 방패를 피해 다시 둘에게 돌진해 들어왔다.
그와 더불어 사방에서 나뭇가지들이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호호호. 끝이구나.>
니엘이 어떻게 나뭇가지들의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윤도아가 말했다.
“그리브 벗어요.”
“네?”
당황한 니엘이 되물었다.
작게 혀를 찬 윤도아가 빠르게 자세를 낮추어 니엘의 남은 한쪽 그리브를 풀어냈다.
덜컥.
“엥? 아니, 그리브는 왜…!”
하지만 윤도아는 니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니엘의 발에서 그리브를 완전히 벗겨낸 후.
“꽉 잡아요.”
“으, 악!”
니엘을 들쳐메더니 위로 훅 뛰어올랐다.
니엘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윤도아의 등을 부여잡았다.
순식간에 드라이어드의 나무가 절반 크기로 줄어들었다.
까마득한 높이였다.
니엘은 높이에 대한 공포감보다 먼저, 윤도아의 특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마법 중에 신체 강화 능력이라도 있는 건지, 도저히 이 높이를 뛰어올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을 든 채로.
“어, 어떻게….”
니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재미있구나.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모체의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점에서 머무르는 찰나의 순간.
“마나 방패.”
윤도아의 발밑에 나뭇가지들을 막았던 반투명한 막이 나타났다.
윤도아가 마나 방패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마나 방패는 윤도아와 니엘의 무게를 버텨냈다.
“우, 와! 놀랐잖아요!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니엘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도아는 허리 뒤에 고정해뒀던 칼을 하나 뽑아 들며 대답했다.
“떨어질 거예요, 곧. 꽉 잡아요.”
“…네?”
니엘이 반사적으로 윤도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마나막.”
윤도아의 중얼거림에 니엘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혹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스킬이 있다거나 추락의 속도를 줄여준다거나 하는 스킬을 기대했지만.
주변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뭐지?’
그때 윤도아가 밟고 있던 마나 방패가 훅 사라졌다.
중력은 니엘에게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둘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니엘은 숨을 들이켜며 윤도아의 옷을 꽉 붙들었다.
다행히 윤도아가 어깨 위의 니엘을 꽉 붙잡고 있었기에 니엘의 몸이 붕 떠오르지는 않았다.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기다렸다는 듯 모체의 나뭇가지들이 둘에게 솟아올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니엘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갑자기 모체의 수많은 나뭇가지가 잘려 나갔다.
분명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뭇가지들은 기둥 가까이로 짧게 잘려버렸다.
<…호오…?>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은 빠르게 말라붙었다.
둘은 더 이상의 방해 없이 모체의 근처까지 떨어졌다.
콰드드드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낙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 틈에 니엘은 도마뱀처럼 몸을 움직여 윤도아의 등으로 이동했다.
윤도아의 등에 매달린 채 상황을 보아하니, 윤도아가 꺼내든 단검을 모체의 나무 기둥에 꽂아 넣어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단검이 나무를 가르며 지나온 자리에는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심연의 불꽃….>
모체의 중얼거림이 들린 후.
나무에 강하게 박혀 있던 뿌리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뿌리의 꿈틀거림에 뿌리가 박혀있던 거대한 나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뿌리들이 솟아올랐다.
나뭇가지처럼 날래고 자유로운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가진 힘 자체가 달라 보였다.
뿌리의 두께는 니엘의 허리를 한 방에 두 동강 내버릴 정도로 두꺼웠고, 그만큼 힘 역시 강력할 터.
윤도아가 뿌리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바닥을 보더니 니엘에게 물었다.
“뛰어내릴 수 있어요?”
그 말에 니엘 역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굵은 뿌리들이 꿈틀거리며 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아래로 갈라진 나무의 어두운 틈새가 보였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2층 정도의 높이.
“네, 될 것 같아요.”
“그럼 내려가요.”
윤도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니엘은 조금 울컥했다. 방해되니 내려가라는 말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니엘에게는 샐러맨더 외에는 공격을 행할 수단이 없었다.
샐러맨더로는 드라이어드를 빠르게 태울 수 없다.
‘…내가 이걸 죽이는 건 힘들어.’
그렇다면 윤도아의 말대로 이 사람이 모체를 죽일 수 있도록 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최선이었다.
“네!”
씩씩하게 대답한 니엘은 윤도아의 등에서 훅 뛰어내렸다.
<그냥 가게 둘 것 같으냐?>
그런 니엘을 공격하려 바닥의 뿌리들이 방향을 틀었다.
모체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것은 니엘에게 오히려 도움을 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니엘은 가까이 다가온 뿌리를 발판삼아 잠시 착지했다가 다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며 바닥에 착지한 니엘은 뿌리들을 피해 데굴데굴 구른 후 공중제비를 넘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다가온 주선오가 니엘에게 다가오는 뿌리들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물러나죠.”
주선오의 말에 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빠르게 물러나 뿌리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그리브를 잃은 바람에 맨발로 나무의 위를 거닐어야 했지만, 지금 니엘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니엘은 침을 꿀꺽 삼킨 채, 세계 랭킹 1위 윤도아의 싸움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