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모체의 나무 기둥에 기다란 자상을 남기며 바닥 가까이 내려온 내게 드라이어드의 뿌리들이 달려들었다.
<미개한 인간이 심연의 불꽃을 들고 있다니. 이상한 일이구나.>
의아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그럴 법도 하지.’
심연의 불꽃은 난쟁이들의 보물.
난쟁이들은 자신들의 보물을 쉽게 나누지 않는다.
나 역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대가로 받아낸 것.
나는 심연의 불꽃을 뽑아내며 나무 기둥을 살짝 박차 도약했다.
모체의 뿌리가 나무 기둥을 스쳐 지나갔다.
뿌리들의 움직임은 가지보다 훨씬 둔했다.
나는 나를 공격하려던 뿌리 위로 사뿐히 내려섰다.
두어 번 정도 뿌리가 더 공격해 왔지만, 뿌리는 그저 내 발 받침이 되어 줄 뿐이었다.
<하지만 심연의 불꽃만 들었다고 모든 걸 태울 수는 없을 터.>
밟고 선 드라이어드의 뿌리가 위로 솟구쳤다.
나는 자세를 낮췄다가 뿌리를 박차며 도약했다.
드라이어드가 모든 뿌리를 바닥에 내리쳤다.
쾅!
얼마나 강하게 내리쳤는지, 밑의 나무가 흔들거렸다.
그 충격에 주선오와 니엘 역시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약으로 드라이어드의 꼭대기, 본체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체는 여전히 껍질 속에 숨어 있었다.
“사람이랑 얘기할 때는 얼굴을 보고 하는 게 예의야.”
나는 들고 있던 심연의 불꽃을 드라이어드 본체를 감싼 껍질에 푹 찔러 넣었다.
푹!
<…과연 심연의 불꽃이구나.>
드라이어드의 낮아진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계속 심연의 불꽃을 밀어 넣었다.
천천히, 깊숙하게.
콰드드득.
심연의 불꽃은 나무껍질을 뚫고 안에 숨어있던 모체에까지 닿았다.
<이런 미개한 인간이 심연의 불꽃을 다루다니.>
아래쪽에서 꿈틀거리던 뿌리들이 내게 솟구쳐 올랐다.
“마나막.”
나는 수십 개의 마나막을 만들어낸 후, 내게 달려드는 뿌리들을 모조리 잘라버렸다.
서걱. 서걱!
이제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나를 공격할 방법은 없었다.
<호호호.>
모든 가지와 뿌리를 잃은 상황임에도, 드라이어드는 웃었다.
모체의 고통을 대모가 느낄 수는 없을 터.
게다가 이 드라이어드의 모체는 곳곳에 퍼진 수많은 모체 중 하나일 뿐. 대모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깊숙이 밀어 넣은 심연의 불꽃을 이리저리 비틀며 모체의 본체에 깊은 구멍을 뚫었다.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나는 대모의 말을 무시한 채 심연의 불꽃을 뽑아냈다.
깊숙이 난 구멍 안에서, 심연의 불꽃에서 옮겨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염력으로 나무 기둥의 자상에 남아있던 불꽃을 모으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액체를 되감아 올리듯, 밑동에 있던 불꽃을 길게 이어진 자상을 따라 위로 끌어 올렸다.
불꽃이 감겨 올라온 자리에는 깊은 자상만이 남았고 기둥을 타고 올라온 불꽃의 크기는 내 상체만큼 컸다.
나는 앞으로 펼친 손바닥 위로 커다란 불꽃을 올렸다.
“화염구.”
나는 염력을 이용해 불꽃을 뭉치기 시작했다.
크게 타오르던 불꽃은 차곡차곡 뭉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종이를 구겨 작게 접는 것처럼, 불덩이가 작게 뭉쳐졌다.
불덩이는 곧 손바닥보다 작은 구슬의 크기까지 줄어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구슬이 내 손 위에 안착했다.
나는 그 구슬을 들어 올렸다. 타오르는 구멍 속으로 화염구를 떨어트렸다.
* * *
‘불부림….’
니엘은 윤도아의 불부림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물론 자신과 같은 불부림의 능력은 아니었다. 같은 특성이 다른 각성자에게 주어질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비슷했다.
윤도아는 기둥에 남아있던 불꽃을 끌어모아 그것을 작은 구슬 크기로 뭉쳤다.
처음에는 레부가 다시 나타나 불을 조정하는 줄 알았지만, 근처에 레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즉 저 불부림은 윤도아 본인의 능력이라는 뜻이었다.
‘…대단해. 저런 식의 운용이 가능하구나.’
니엘에게는 아직 불가능한 부림의 수준이었다. 저렇게 불을 부린다는 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었다.
그때 그 구슬을 드라이어드 모체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떨어트린 윤도아가 드라이어드를 박찼다.
후욱!
순식간에 윤도아가 니엘과 주선오의 앞까지 날아왔다.
윤도아가 두어 바퀴 바닥을 굴러 몸을 일으켰을 때.
콰광!
드라이어드의 본체가 있던 꼭대기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윤도아가 떨어트린 화염의 구슬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
니엘은 넋을 놓고 그 폭발을 바라보았다.
본체를 감쌌던 나무껍질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새빨간 화염이 본체를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뒤로.”
윤도아가 니엘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니엘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선오와 함께 윤도아의 뒤에 서자.
윤도아가 스킬을 발동했다.
“마나 방패.”
촤르륵!
윤도아의 앞에 반투명한 방패가 생성되었다.
셋을 향해 날아오던 나무의 파편들이 마나 방패에 부딪혔다.
캉! 카앙!
파편을 막아낸 윤도아는 곧바로 마나 방패를 없앴다.
사라진 마나 방패 너머의 광경은 처참했다.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감쌌던 나무껍질들이 모조리 터져간 상태였고, 그 안의 모체 역시 반절이 날아간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호호호…. 이곳에서는 이만 물러나야겠구나.>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반절 남은 얼굴로 윤도아를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한 번 드라이어드의 몸에 붙은 불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니엘은 앞에 선 윤도아와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한눈에 담았다.
윤도아의 손짓에 따라 나무를 태우던 불꽃이 모두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흐음?>
윤도아는 아무런 대답 없이 허공의 불꽃을 수십 개의 덩어리로 나누었다.
‘또 다른 기술…!’
니엘은 윤도아의 불부림을 눈에 새기기 위해 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수십 개로 나뉜 불꽃의 덩어리들은 곧 길쭉한 막대의 모양을 취했다.
수십 개의 기다란 불의 막대가 나타났고, 막대의 양 끝이 날카롭겨 벼려졌다.
‘불꽃 창!’
불꽃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창이었다.
윤도아가 가볍게 손짓했다.
허공에 제멋대로 떠 있던 불꽃 창들이 윤도아의 손짓 한 번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수십 개의 창끝이 순식간에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향했다.
윤도아가 다시 한번 손을 까닥였다.
허공에서 대기 중이던 수십 개의 불꽃 창이 드라이어드를 향해 내리꽂혔다.
펑!
콰앙!
퍼엉!
불꽃창의 폭격은 모체의 본체와 잘려 나간 가지, 두꺼운 기둥, 더 이상 나무를 고정할 수 없는 뿌리에까지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호호호호호.>
드라이어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웃음과는 다르게 직접 폭격을 맞는 모체는 거세게 꿈틀거렸다.
나무의 일부분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투둑.
툭.
두꺼웠던 기둥 역시 여기저기가 터져나가 커다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었다.
모체가 화염의 고통에 움직일 때마다 나무는 점점 분리되었고 곧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렸다.
<재미있었다, 인간. 이번 일은 확실히 기억해두도록 하마.>
무너져가는 드라이어드의 모체에서 한층 낮아진 대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도아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붉게 물든 채 불타오르는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바라보는 주선오에게 말했다.
“선오, 베어.”
주선오가 즉시 움직였다.
레부에게 받아든 칼을 들고 불타오르는 드라이어드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이빨벼림. 검격증폭.”
두 개의 스킬을 사용하며 칼을 뽑아 그었다.
서걱!
깔끔한 검격이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베었다.
<호호호호….>
대모의 웃음이 가늘게 이어졌고.
스스스.
서서히 기울던 드라이어드의 몸체가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쿠궁!
바닥에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드라이어드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주선오가 칼을 돌려 칼집에 넣었다.
철컥.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장작 삼아 크게 타오르는 불꽃의 앞으로, 게이트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제거했습니다. 1/1]
[게이트 클리어 보상이 상향됩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성적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게이트를 나가기 전 보상을 확인하십시오.]
“찍! 찍찍!”
뒤에서 다람쥐들의 환호가 들렸다.
다람쥐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윤도아와 주선오를 바라보았다. 니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굉장해!’
윤도아는 아무런 부상 없이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박살 냈고, 주선오는 윤도아의 뒤를 이어 모체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 과정을 보며 니엘은 둘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두터운지를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니엘 역시, 그런 신뢰를 받고 싶었다.
니엘의 반짝이는 시선이 윤도아에게 꽂혔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낀 윤도아가 니엘을 바라보았다.
“혹시, 나랑 본인의 차이점 알겠어요?”
니엘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너무 많아서 짚어내기가 힘드네요.”
하지만 그걸 봤다는 것 자체에서 니엘은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마 윤도아도 그것을 노린 것이리라.
니엘의 불부림은 정말 단순하게 불을 지르던 것뿐.
하지만 불부림의 진짜 가치는 윤도아가 보여준 것들이었다.
그것을 본뜬다면 니엘도 진짜 불부림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그쪽이 저를 따라 할 수는 없어요. 가호나 특성 자체가 다르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어떤 식으로 싸울지는 본인 스타일에 맞게 참고만 해요. 일단은 보상부터 확인하고요.”
윤도아가 가볍게 니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니엘은 자신에게 힘을 복돋아 주는 윤도아를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 1위님…!”
* * *
나는 반짝이는 니엘의 시선을 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주선오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눈빛이었다.
아마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잡는 모습을 보며 자신과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을 터.
계속해서 내게 따라붙는 시선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니엘의 전력은 손에 쥐었으니.’
이번 게이트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나는 니엘의 시선을 등진 채 보상을 확인했다. 사실 A급 아이템 게이트라서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보상 확인.”
[드라이어드의 씨앗]
역시나 그다지 쓸모없는 아이템이 나타났다.
드라이어드의 씨앗.
저런 나무 정령을 키워봤자 뭐에 쓴단 말인가.
게다가 이 모체를 키워내 봤자 대모가 연결되면 아무런 소용없을 텐데.
가볍게 혀를 찬 나는 정보라도 확인해두자 싶어 여우 구슬로 정보를 살폈다.
[드라이어드의 씨앗]
[드라이어드의 모체를 키워낼 수 있는 씨앗입니다.]
[키워낸 드라이어드의 모체는 키워낸 주인의 명령을 듣습니다.]
‘키워낸 주인의 명령?’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대모와 연결되지 않는 모체라는 건가 싶었지만, 역시나 그닥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드라이어드에게 명령해서 뭔가를 하게 하느니 직접 하는 게 훨씬 빠를 테니까.
나는 레부를 불러 드라이어드의 씨앗을 맡겼다.
그때 주선오가 걸어오더니 레부에게 빌렸던 칼을 내밀었다.
“잘 썼어.”
“쿄.”
레부가 칼을 받아들어 삼켰다.
주선오의 다른 손에는 백색의 칼이 들려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주선오가 그 칼을 들어 보였다.
“다행히 보상으로 칼이 나왔어요.”
주선오는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정보를 살펴보니 A급 아이템이었다. 이전에 쓰던 칼은 B급 아이템이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모부를 가만둘 수는 없지.’
나는 모래의 심장을 꺼내 그것을 탈탈 털었다.
그러자 모래 덩어리가 나무 위로 철퍽 떨어져 내렸다.
“휴!”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쉰 모부가 팔짱을 낀 형태를 나타냈다.
“모부야. 면담 좀 할까.”
“쿄쿄쿄쿄.”
레부가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모부는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 할 말 없어요!”
“응. 넌 그냥 맞기만 하면 되거든.”
나는 가벼운 손짓과 함께 염력으로 모부의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뜯었다.
“흇!”
모부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고통을 토로했다.
그렇게 모부의 양팔을 한 움큼, 양다리를 한 움큼, 몸통을 한 움큼 떼어내자, 모부는 어린 아이 같은 크기로 줄어들었다.
“휴…. 휴….”
모부가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그쯤 해도 되지 않을까요?”
옆에서 보고 있던 주선오가 오히려 나를 말렸다.
그러자 모부가 쓱 주선오를 돌아보았다.
“…저한테도 많이 베였고.”
아무래도 측은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나는 떼어낸 모래들을 뭉쳐 모부가 흡수하지 못하도록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모래의 심장을 꺼내는 대신 레부에게 말했다.
“레부야, 삼켜.”
“…쿄?”
레부와 모부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모부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삼켜. 당분간 모래를 채워 줄 생각 없거든.”
“…휴? 뭐라고요?”
“뭘 뭐야. 들은 대로지.”
나는 더 말하지 않고 레부에게 손을 까닥였다.
레부는 한참 작아진 모부를 보며 쿄쿄거리고는 곧 모부를 꿀꺽 삼켰다.
“…슬라임끼리도 삼키기가 가능하네요?”
지켜보던 주선오가 물었다.
“그럼. 지금 모부는 약해진 상태라 더 쉽고.”
“근데 왜 레부한테…?”
“모래의 심장에 넣으면 회복이 되니까. 반성할 때까지 저렇게 둘 거거든.”
내 말에 레부가 쿄쿄쿄 웃었다.
나는 레부를 마저 심연의 불꽃에 넣었다.
“결심했어요.”
어느새 우리의 뒤로 다가온 니엘이 말했다.
우리는 니엘을 돌아보았다.
“뭘요?”
보상으로 얻은 새 그리브를 신고 나타난 니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한국에 남기로요!”
나와 주선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다시 니엘을 바라보았다.
“…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