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당당하게 한국에 남겠다고 외쳤던 니엘은 이틀 후.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한국에 찾아온 비서 루이스에게 잡혀 독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실례했습니다. 니엘이 아직 철이 덜 들어서요.”
루이스가 다크서클이 깊게 패인 눈으로 우리를 돌아보며 사과했다.
아마도 그 다크서클의 원흉일 것 같은 사람은 단장실 밖에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아닙니다.”
주선오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이틀간, 니엘은 개의 이빨 사무실에 눌러붙어 있었다.
다행히 신교진과 죽이 잘 맞아 딱히 주선오에게 말을 붙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사무실에 손님이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주선오에게는 스트레스였나 보다.
그 잘난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지쳐보였다.
루이스 역시 주선오의 얼굴에서 그걸 느꼈는지 빠르게 말했다.
“두 분도 피곤하실 테니 바로 협약을 맺도록 하죠.”
루이스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니엘을 불렀다.
“니엘.”
하지만 니엘은 신교진과 신나게 수다를 떠느라 루이스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하아…. 죄송합니다, 잠시….”
루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문에 가까이 있던 내가 니엘을 내다보며 말했다.
“니엘.”
“네!”
니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쪼르르 내게 달려왔다.
“네, 부르셨어요?”
“…….”
니엘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한층 짙어 보였다.
“협약 맺어야지.”
“아, 네. 맺어야죠.”
니엘이 곧바로 내 옆의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자, 어떻게 할까요?”
“…일단…. 네가 거기에 있으면 안 되지.”
루이스의 피곤한 목소리에 니엘이 입을 비죽였다.
그러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루이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볍게 웃음을 흘린 주선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진행해볼까요.”
협약의 내용은 간단했다.
상호간의 정보공유 및 지원.
하지만 이 협약이 가진 의미는 굉장히 컸다.
니엘의, 더 나아가 샐러맨더와 독일의 전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니까.
1시간여의 대화 끝에, 주선오의 개의 이빨 무리와 니엘의 샐러맨더 무리의 협약은 무사히 체결되었다.
루이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완성된 협약서를 정리하며 말했다.
“협약도 완료했으니, 저희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니엘, 가자.”
“어어? 벌써?”
니엘이 잔뜩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 있는 건 실례야.”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니엘이 서운한 표정으로 루이스를 따라 일어섰다.
루이스는 니엘을 데리고 개의 이빨 사무실을 나섰다.
나와 주선오, 신교진은 그들을 건물 앞까지 배웅했다.
공항까지 이동할 차를 타기 전, 니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샐러맨더가 맺은 협약은 개의 무리와의 협약이지만, 그래도 저는 1위님을 따를 거예요.”
나는 그제야 니엘에게 살짝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신교진이 그런 니엘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니죠. 1위님 말고 도아 언니라고 해야지.”
“아, 도아 언니!”
서툰 한국어였다.
신교진과 잡담 중 흘긋흘긋 나를 보며 했던 이야기가 이거였나 싶었다.
내가 피식 웃자 니엘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어 말했다.
“혹시라도 2위님….”
“2위님 말고 개선오요.”
신교진이 또 옆에서 속삭였다.
주선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 개서노 님이 도아 언니를 배신하더라도 전 도아 언니 편이에요!”
주선오가 미간을 구긴 채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주선오가 슥 내 눈치를 살폈다. 혹여나 내가 니엘의 말을 담아둘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되면 협약이 깨지는 건데요?”
내 말에 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음, 뭐, 물론 설마 개서노 님이 도아 언니를 배신하지는 않겠죠!”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뜬 채 주선오를 쏘아보았다.
“혹시라도 그럴 생각이면 그때는 저한테 먼저 혼날 줄 알아요.”
겉모습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세계 랭킹 3위인 니엘이 2위인 주선오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니엘의 헛소리에 주선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루이스가 니엘 대신 사과했다.
“아뇨, 아닙니다.”
주선오가 측은한 눈빛으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저 천방지축을 관리하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싶은 눈빛.
그런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엘이 다시 한번 당당히 말했다.
“어쨌든! 다음에 만날 땐 도아 언니 옆자리는 제 차지에요!”
마치 도전장을 내미는 듯한 말이었다.
딱히 내 옆자리를 누구한테 내준 기억은 없었는데 니엘의 눈에는 주선오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네?”
“도아 언니의 신뢰를 받을 사람은 제가 될 거라고요!”
선전포고를 당한 주선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니엘을 바라보았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루이스가 니엘의 뒷덜미를 잡아당겨 상황을 수습했다.
니엘과 루이스는 차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신교진 역시 둘을 배웅하겠다며 공항으로 떠난 덕분인지, 주선오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선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실 니엘이 이틀간 들러붙어 있던 곳은 개의 이빨 사무실이었기에 내가 고생이랄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무리가 잘 된 것 같네요.”
협약이 잘 맺어졌으니 나도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너도 고생했어. 나도 그만 가볼게.”
“집으로 가세요? 태워다 드릴게요.”
주선오가 주머니를 뒤적여 차키를 찾기 시작했다.
“아냐. 오토바이 타고 왔어.”
나는 주머니에서 오토바이 키를 꺼내보였다.
“아,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나는 주선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 * *
[안녕하세요. 연구소장 박효진입니다. 진행 중이던 연구의 결과를 오늘 5시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참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각성 기관 연구소장 박효진에게 온 연락이었다.
아무래도 지난 번 대전에서 일어났던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얻은 푸른 놀의 사체를 연구한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연구소는 역삼에 있는 각성 기관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 안전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외진 곳이었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기에도 애매한 곳이었다.
어떻게 가야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김지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아 씨. 오늘 연구소에 가실 수 있으신가요?]
“네. 가 보려고요.”
[그럼 제가 시간 맞춰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잘 됐네.’
김지석은 정확히 4시에 집 앞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고 내려가 보니 아파트 입구 앞에서 보안 요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지석이 보였다.
항상 입고 있던 정장 대신 오늘은 조금 편한 차림새였다.
운동화에 짙은 청색 바지, 하얀 셔츠에 캐주얼한 자켓.
‘저것도 잘 어울리네.’
정장을 입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어떤 옷을 입으셔도 잘 받으시네요.”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보안 요원의 감탄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그냥 평범합니다.”
사심 없는 칭찬에 김지석이 조금 민망했는지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밝게 웃어보였다.
“아, 도아 씨. 오셨어요?”
나는 김지석과 보안 요원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나오셨습니까? 오늘은 혹시 데이트라도 가시는 겁니까?”
보안 요원이 웃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김지석의 편한 차림을 보고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기엔 내 옷차림이 좀 아니지 않나?’
나는 모자에 후드까지 뒤집어 쓴 차림새였다.
“아뇨. 일이 있어서요.”
내가 딱 잘라 대답했다.
조금 민망할 법도 했지만 보안 요원은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서글서글 웃었다.
“아, 그렇습니까?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우리는 바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잠시 조용히 운전에 집중하던 김지석이 가볍게 말을 꺼냈다.
“참, 며칠 전에 가호를 받았습니다.”
‘아, 받았구나.’
나도 김지석이 가호를 받는 정확한 시기는 몰랐었다.
“축하드려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이야기였지만 김지석은 가호를 받기를 바라던 사람이었다.
김지석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김지석의 정보를 살폈다.
[김지석]
[토끼 신의 가호]
[교활한 토끼는 굴이 셋]
[전용 스탯 : 가속 8/민첩 9/시야 11/청력 13]
김지석의 가호는 전투와는 무관해보였다.
‘그래서 보호할 힘이 부족한 거겠지만.’
가호를 받았다면 곧바로 게이트에 갔을 법도 한데 전용 특성이 없는 것이 의아했다.
나는 모른 척 물었다.
“게이트는 다녀오셨어요?”
“아직이요. 권 선생님이랑 시간이 좀 안 맞아서요.”
둘 다 바쁜 사람들이라 시간 맞추기가 힘든 것 같았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선오가 돌아주겠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기관 소속이니까요, 전.”
‘선오?’
“아, 주선오요?”
항상 주선오와 격식을 차려 대하던 김지석이었기에 잠깐 혼동이 생겼다.
그제야 김지석도 자신이 한 말을 되짚어보고는 웃었다.
“…아. 정장을 안 입고 있으니까 일하는 시간 같지가 않아서 말을 놓아버렸네요. 선오랑은 기관 만들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거든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지석은 기관을 만들 때부터 이사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주선오와 친분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위치였다.
“사실 각성 기관의 이사 자리에 있으면서 각성자가 아니라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제 한시름 놓았습니다.”
김지석이 웃었다.
나야 김지석이 가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는 본인은 속이 꽤 탔던 것 같았다.
“벚꽃이 폈네요.”
김지석의 말에 나는 길가를 바라보았다.
차도 옆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회귀 전, 게이트를 돌기 시작한 이후로는 게이트 바깥 세상의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벚꽃은 연구소 앞까지 쭉 이어져 있었기에 덕분에 마음 편히 꽃구경을 하며 올 수 있었다.
연구소 앞에 차를 댄 우리는 연구소로 들어갔다.
로비에는 주선오와 권재경이 도착해 있었다.
“두 분 일찍 오셨네요.”
김지석이 둘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주선오에게 눈인사를 한 후 권재경에게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권재경은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분위기가 회귀 전과 조금 비슷해져 있었다.
“나라는 잘 있나요?”
“네. 오늘도 따라오겠다는 걸 겨우 떼어놓고 왔습니다.”
권재경이 쓰게 웃었다.
“이리나 씨가 고생이 많아요. 나라가 리나 씨를 잘 따라서.”
나라는 이리나가 돌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권재경이 주선오에게 말했다.
“괜히 나라 때문에 리나 씨가 게이트를 못 가는 게 아닌가 싶네요.”
아무래도 이리나는 개의 이빨 무리 소속이었기에 주선오에게도 조금 미안한 모양이었다.
주선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나라를 데리고 같이 보너스 게이트에 몇 번 다녀왔다고 하던데요.”
확실히 치유 특성을 가진 이리나에게도 일반 게이트보다는 보너스 게이트가 마음이 편할 터.
그렇게 잠시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건물 안쪽에서 안세인과 연구팀장 박효진이 나타났다.
박효진은 흔히 연구소 직원들이 입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아, 다들 왔네.”
“어서들 오세요.”
박효진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는 박효진을 따라 연구소 안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이렇게 기관의 연구소에 모이게 된 것은 기관의 요청 때문이었다.
지난번 게이트 브레이크 때 얻었던 푸른 놀의 사체에 대한 연구 결과의 공유를 위해.
회귀 전에도 이런 과정은 진행이 되어 었었다.
다만 대전과 목포의 게이트 브레이크가 조금 길게 이어졌기 때문에 그 피해를 수습하고 정리하는 과정 이후에야 사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기에 결과 공유 시기가 늦어졌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4월 초.
그때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성과 발표였다.
“자,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박효진이 안내한 곳은 넓은 방이었다.
내가 단련실로 쓰고 있는 지하 벙커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단련실로 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벽과 바닥에는 여러 흠집들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이곳에서 뭔가를 시험해본 모양이었다.
한쪽 벽면에는 의자가 여러개 놓여있었고 그 앞에 기다란 탁자가 있었다.
그 위에는 노트북과 서류 가방, 커다란 박스 등이 놓여 있었다.
“일단 앉아 주시겠어요?”
박효진이 경쾌한 목소리로 우리를 의자로 안내했다.
우리는 박효진의 안내대로 의자에 나란히 앉았고 곧 탁자 앞에 선 박효진이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이곳까지 모신 이유는. 짐작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지난 번 대전의 게이트 브레이크, 기억하시죠?”
박효진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네. 그때 가져왔던 푸른 놀의 사체에 대한 연구를 끝냈거든요.”
아마 안세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김지석도 마찬가지.
권재경도 얼핏은 알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회귀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고, 이 사실을 처음 듣는 주선오만이 박효진이 원하는 반응을 보였다.
“뭔가 나왔습니까?”
박효진이 조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게이트가 왜 생겨나는지 같은 거에 대한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어요. 뭐, 몬스터 사체를 분석한다고 그런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요.”
박효진이 말을 이었다.
“대신, 꽤 중요한 것들을 많이 알아냈죠.”
“어떤?”
안세인이 물었다. 아마도 상세한 내용까지는 전해주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원하던 반응이었는지 박효진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탁자의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총이 들어 있었다.
박효진은 총을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말릴 틈도 없이.
총구를 자신의 가슴에 향한 채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