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루마니아의 각성 기관에서 온 연락을 받은 김지석은 당황했다.
브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및 실종 사건은 게이트 브레이크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 루마니아 정부에서 각성자 협회를 통해 한국의 랭커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루마니아가 원한 랭커는 역시 세계 1위인 윤도아였지만.
윤도아는 한국에 없었다.
이틀 전, 갑자기 볼일이 있다며 며칠 동안 한국에 없을 것이라는 연락을 해 왔다.
중요한 일은 주선오에게 위임하겠다며.
조금 불안하기야 했지만 설마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길까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헌데 정말로 이런 일이 터질 줄이야.
김지석은 윤도아의 말에 따라 랭킹 2위인 주선오를 찾아갔다.
늦은 저녁이었기에 주선오는 집에 있었다.
문을 열어준 주선오는 상당히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다.
“들어와.”
조금 전 게이트를 다녀왔는지 옷 군데군데가 헤져 있었고 검붉은 얼룩이 진 곳도 있었다.
“…괜찮아?”
김지석이 주선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괜찮아. 리나가 치료해줬어.”
거실에는 신교진과 윤도빈, 이리나, 그리고 권나라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지석은 자신에게 꾸벅 인사하는 권나라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라?”
“아, 제가 데려왔어요. 아저씨가 게이트 가신 동안 돌봐주고 있었는데 선오 오빠가 다쳤다고 해서요.”
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라의 손을 붙잡았다.
“나라, 이제 갈까?”
“응.”
“치료 다 했으니까 가 볼게요. 다음에 봬요.”
이리나가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나라와 함께 주선오의 집을 나섰다.
이리나를 보낸 주선오가 잠시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신교진이 주선오가 들어간 방을 흘긋흘긋 바라보며 물었다.
“형, 형. 쟤 화난 것 같죠?”
“…뭐 잘못했어?”
김지석의 물음에 신교진이 울상을 지었다.
“아니, 그게….”
신교진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윤도빈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장난치다가 큰일 날 뻔했는데 교진 형은 운 좋아서 피하고 대신 선오 형이 맞았거든요.”
“…….”
신교진이 입을 다물었다.
김지석이 가볍게 혀를 찼다.
“화날 법 하네요.”
“아, 형….”
그때 주선오가 방에서 나왔다. 신교진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근데 형은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집까지 찾아온 거 보면 좀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주선오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아, 혹시 저희가 있으면 안 되나요?”
윤도빈이 김지석을 보며 눈치껏 물었다.
“음….”
김지석이 잠깐 망설였다.
어차피 루마니아의 소식은 기사로 이미 퍼진 상태였고 각성자들이라면 다 알 터.
그리고 신교진과 윤도빈 모두 한국의 랭커였다.
랭킹 6위의 신교진, 그리고 새롭게 7위로 올라선 윤도빈.
신교진이 자신도 듣고 싶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차마 주선오의 눈치를 보느라 말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김지석은 간절한 신교진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뇨, 괜찮습니다. 계셔도 돼요.”
신교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루마니아 얘기는 봤죠, 다들?”
“브란?”
주선오가 되물었다.
신교진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김지석에게 물었다.
“어, 그거 봤어요. 그거 게이트 브레이크 맞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하필 루마니아에 그런 게이트라니….”
윤도빈이 중얼거렸다.
“요청 왔어?”
주선오의 물음에 김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루마니아 각성자들조차 피해를 입는 상황이라. 한국 랭커한테 지원 요청이 왔어.”
“어…. 혹시 그거 저희 누나한테 온 거예요?”
윤도빈이 물었다.
“네.”
김지석의 대답에 신교진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아…. 근데 도아 누나 지금 없잖아요.”
“네. 그래서 선오한테 온 거에요.”
조금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주선오에게서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선오는 걱정을 앞세웠다.
“내가 가도 괜찮은 거야? 루마니아 쪽에서 원한 건 내가 아닌데.”
“어쩔 수 없지. 랭킹 1위 상황이 안 되면. 너도 안 된다면, 여기 모인 랭커들의 의견도 여쭤보고 싶네요.”
김지석이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 윤도빈이 슬쩍 손을 들며 말했다.
“저기, 김 이사님.”
“네, 말씀하세요.”
윤도빈이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일단.”
윤도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누나, 거기 갔거든요.”
* * *
도린은 세 시간 만에 브란에 도착했다.
마을을 통제하는 경찰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텅 빈 마을이 도린을 맞이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브란을 방문한 도린은 차에서 내려 조용한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을 통제했기에 마을 안에 관광객들은 없었다.
마을 주민들 역시 해가 질 무렵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불이 켜진 집도 몇 없었다.
‘다들 정부에서 마련해준 임시 거처로 피신한 거겠지.’
사람이 그렇게 실종되고 죽어나가는데 이곳에 남아있고 싶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도린이 마을 주민이었어도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마을을 떠나있고 싶으리라.
결국 거리에 있는 사람은 도린뿐이었다.
‘디나가 나온다고 했는데.’
어제 브란에 파견된 각성자 셋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각성자였다.
도린이 이곳으로 오겠다는 연락을 보내자 해가 지고 마을에서 보자는 간단한 답장이 왔었다.
하지만 해가 지고 어스름이 지기 시작할 때 모습을 드러낸 디나는 도린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창백하고 수척해진 얼굴. 잔뜩 겁먹어 커진 동공이 이리저리 거리를 살피고 있었다.
게다가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도린은 그런 디나의 모습을 마주하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조차 몰랐다.
“…디나?”
디나가 창백한 얼굴로 도린을 바라보았다.
디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깨문 채 떨리는 양손을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도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린이 알던 디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잘 웃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브란에 파견을 오기 직전, 어제 아침에 만났을 때만 해도 디나는 웃고 있었다.
확실히 정체를 파헤치고 오겠노라고 말했지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도린이 디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하지만 디나는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다가 갑자기 텅 빈 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디나!”
도린은 디나를 쫓으려다가 멈칫했다.
이미 주변은 어두워졌고 맨몸으로 디나를 쫓았다가는 동반 자살을 하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도린은 빠르게 차의 뒤로 걸어가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살짝 휘어진 커다란 부메랑이 들어 있었다.
도린은 조심스레 부메랑을 꺼내 들었다.
도린의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크기의 부메랑이었다.
바닥에 닿는 부분은 흠투성이에 꽤 닳아 있었다.
휘어진 바깥날은 날카롭게 벼려 있었다.
한쪽 면에는 위아래로 손잡이가 붙어 있었고 그 사이에는 작은 부메랑들이 여러 개 고정되어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부메랑을 들어 어깨에 걸친 도린은 트렁크를 닫고는 디나가 달려간 길을 따라 걸었다.
조용한 마을이 이제는 오싹하게 느껴졌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도린의 귓가에 크게 울렸다.
언제 뱀파이어가 튀어나올지 몰랐다.
도린은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계속 길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브란 성의 입구 앞에 도착할 때까지, 뱀파이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물론 먼저 뛰어갔던 디나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도린은 고개를 들어 브란 성을 올려다보았다.
밤의 브란 성은 진짜 드라큘라의 성처럼 느껴졌다.
바스락.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도린은 들고 있던 부메랑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길고양이가 지나간 건지 이어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젠장.’
도린은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쥐어 부메랑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무리 게이트를 많이 돌아봤다고는 하지만, 게이트 브레이크를 겪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일어났던 게이트 브레이크의 영상이 자꾸 떠올라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섭더라도 이곳에 온 이상,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때 브란 성으로 통하는 매표소의 창살문 뒤로 까만 그림자가 나타났다.
“!”
도린이 반사적으로 한쪽 발을 뒤로 빼며 부메랑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먼저 뛰어갔던 디나였다.
“…하아. 디나, 잠깐만. 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까, 일단 같이 돌아가자.”
하지만 디나는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정원을 가로질러 브란 성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은 도린은 기념품 가게들을 지나쳐 매표소로 달려갔다.
하지만 창살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덜컹!
도린이 입구를 잡고 흔들었지만 입구는 전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 들어간 거야?’
잠시 주변을 살핀 도린은 입구 옆 매표소에 부메랑을 세운 후, 부메랑을 밟고 매표소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그 사이, 디나는 정원을 지나 성으로 연결된 언덕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왠지 무서웠다.
오싹한 브란 성, 평소와는 다른 디나의 행동.
“거 참, 빠르기도 하네!”
도린이 애써 긴장을 풀기 위해 중얼거렸다.
도린은 부메랑을 들어올린 후 매표소 지붕을 넘어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성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것 같군.’
사사삭.
도린의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무언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나의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도린은 부메랑을 꽉 움켜쥔 채 앞을 바라보았다.
정원 안의 기념품 판매소 지붕 위에 무언가 나타났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가느다란 형체.
꼭 까만 옷을 입은 해골이 서 있는 것 같았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도 다를 바 없었다.
남아있는 지방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눈썹뼈와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휘날려 움푹 파인 놈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크크크크.”
그것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양쪽에 위치한 두 개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놈의 희번뜩한 시선은 도린에게 꽂혀 있었다.
‘…뱀파이어…!’
도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껏 많은 게이트를 돌아왔지만, 뱀파이어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도린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마른 것 좀 봐라. 불쌍할 정도네.”
아마 디나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불쌍하면 수혈이라도 해주지 그래요?’
그러면서 웃음을 터트렸겠지.
그런 생각을 떠올린 도린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수혈은 좀 그렇지만.”
그때 뱀파이어가 지붕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두 발과 양손을 이용해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을 기어서 도린에게 돌진했다.
사사사삭!
놈의 네 발이 빠르게 바닥을 박찼다.
“크아아!”
조금 긴장이 풀린 도린이 잡고 있던 부메랑을 휘둘렀다.
“흡!”
부웅—!
쿵!
묵직한 부메랑이 바닥을 내리쳤다.
하지만 놈은 어느새 뒤로 빠져 도린의 부메랑을 피했다.
“어라? 이걸 피하네.”
뱀파이어가 곧바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공의 뱀파이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도린에게 내리꽂혔다.
‘저기에 물리면 죽는다!’
지금껏 사망한 사람들의 목에는 모두 두 개의 송곳니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도린은 황급히 부메랑을 들어올렸다.
쿵!
도린에게 달려들던 뱀파이어가 도린의 부메랑에 부딪혔다.
도린은 그대로 다시 한번 부메랑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부메랑에 붙어있던 뱀파이어가 바닥에 내팽개쳐 떨어졌다.
철퍽!
“크아아!”
뱀파이어가 바닥에서 기괴하게 허리를 뒤틀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도린은 바닥에 꽂힌 부메랑을 붙잡은채 뱀파이어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는 부메랑의 날카로운 면을 그대로 바닥으로 찍어눌렀다.
퍽!
작두의 칼날처럼 바닥에 내리찍힌 부메랑은 뱀파이어의 허리를 잘랐다.
“크크크….”
두 동강이 난 뱀파이어가 웃음을 흘리더니 금세 재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도린이 내리찍었던 부메랑을 다시 들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숨이 가늘게 떨렸다.
“…별 거 아니네.”
도린이 애써 중얼거렸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한 놈으로 끝일 리 없었다.
어느새 정원 주위에 검은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그림자들을 둘러본 도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하. 젠장, 랭커가 뭐가 대수라고 내가 여길 와서는.”
“크크크크.”
도린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뱀파이어들의 웃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게 출발 신호라도 된 듯, 뱀파이어들이 도린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