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쪽지에는 휘갈겨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마니아어인가?’
루크의 특성이 글자까지 통역해 주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각성자가 죽기 직전 전해준 쪽지라면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을 터.
나는 도린에게 그것을 확인받기위해 성 밖으로 이동했다.
“아, 나오셨어요.”
성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루크가 말했다.
도린과 루크는 계단 위의 주민들을 하나씩 바닥으로 옮기고 있었다.
숨이 끊긴 지 오래인 주민들은 차가운 돌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도린, 이거 뭐라고 쓰인 건가요?”
내가 받아온 쪽지를 도린에게 내밀었다.
도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쪽지를 받아 들었다.
“뭡니까? 이건….”
쪽지를 바라보던 도린의 미간이 구겨졌다.
“…디나의…! 디나를 보셨습니까?”
필체를 알아본 건지 도린이 희망을 품은 얼굴로 물었다.
쪽지를 주었으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맨정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감염자가 준 거예요.”
내 말에 순식간에 도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머리가 짧고 단검을 쓰는?”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디나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도린은 한층 우울해진 눈빛으로 내가 건넨 쪽지를 바라보았다.
도린이 조용히 글을 읽었다.
“…밤의 성에는 주인이 없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네?”
도린 역시 의아한지 종이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하지만 종이에 적힌 문구는 단 한 개뿐이었다.
“이게 끝입니다.”
나는 잠시 성을 바라보았다.
밤의 성이라면 분명 브란 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없다….’
그때 문득 무언가 뇌리를 스쳤다.
문구는 굉장히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밤의 성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브란 성의 주인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주인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거나 아니면 자리를 비웠다는 의미거나.
감염자 디나의 입장에서는 주인이라는 것이 자신을 조종하는 몬스터, 즉 보스 몬스터인 드라큘라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밤의 성에는 주인이 없다는 뜻은.
‘브란 성에 드라큘라가 없다는 것.’
나는 다시 탐지로 성을 살폈다.
성의 지하에 모여 있던 뱀파이어들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드라큘라가 저곳에 없었다면?
해가 지고 바로 움직여 성을 떠났다면.
“혹시 여기 오기 전에 뱀파이어랑 마주쳤나요?”
“여기 정원에서 열 마리 정도 잡았습니다만….”
도린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어떻게 생겼던가요?”
내 질문에 도린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시커먼 놈들이었습니다. 송곳니가 뾰족하고 다 비슷하게 생겼고요. 근데 그건 왜….”
가만히 듣고 있던 루크가 물었다.
“밤의 성의 주인이라면 드라큘라를 말하는 건가요?”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그런 것 같아요.”
“주인이 없다는 건, 그럼 드라큘라가 이곳에 없다?”
루크 역시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럼 이곳에 없다면 어디에…? 설마 다른 마을로 향했다거나 하지는….”
도린은 뱀파이어가 루마니아 전역에 퍼지는 상상을 했으리라.
당연한 생각이었다.
각성 기관장으로 게이트 브레이크 해결을 위해 이곳에 왔는데 드라큘라를 놓치고, 게다가 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면.
그로 인한 자괴감과 죄책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예요.”
“…그런 이유라도 있습니까?”
도린이 불안한 듯 물었다.
“이 근처에는 집안에 숨어있는 마을 사람들이나 마을을 통제하는 경찰도 있어요. 놈이 그런 먹잇감을 두고 다른 마을로 이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나와 루크가 경찰들을 지나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탐지로 주변을 계속 살피지는 않았지만, 만약 드라큘라가 우리와 스쳐지나갔다면 분명 경찰에게 가는 대신 우리를 공격했을 것이다.
‘굶주린 드라큘라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은 각성자들이지.’
조금 전 성안에서 죽었던 디나처럼, 각성자들은 감염자들을 늘릴 굉장히 귀중한 수단이었다.
각성자는 대부분 비각성자에 비해 신체적인 능력이 좋았고 전투에 탁월했다.
초반에 발 빠르게 각성자들을 감염시켜둔다면, 나중에는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그들이 잡아오는 먹잇감을 포식하기만 하면 되니까.
나는 탐지로 주변을 살폈다.
‘탐지에는 잡히지 않지만.’
“어쩌면 근처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조금 오싹해졌는지 살짝 몸을 떤 루크가 주변을 살폈다.
“…그럼 그놈을 어떻게 찾습니까? 찾지 못한다면 그것도 큰일 아닌가요?”
도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찾을 수 없다면 찾아오게 만들면 돼요.”
내 말에 도린과 루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둘을 데리고 성 아래쪽의 정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심연의 불꽃을 뽑아 레부를 불렀다.
“레부.”
“쿄!”
레부는 내가 명령을 하기도 전에 이미 도린과 루크의 옆으로 이동했다.
‘눈치가 꽤 빨라졌단 말이야.’
피식 웃은 나는 심연의 불꽃을 넣고는 그림자 단검을 꺼내 들었다.
“두 분은 레부랑 계세요.”
“뭘 어떻게….”
도린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
“유인할 거예요.”
“유인이요?”
나는 대답 대신 정원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수십 미터 밖에서 피 한 방울의 냄새를 맡고 나타나는 것이 뱀파이어들이었다.
드라큘라를 유인하면서 남은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소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 냄새를 풍기는 것.’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림자 단검으로 내 왼쪽 손바닥을 죽 그었다.
서걱.
손바닥에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림자 속에서 절삭력을 더해주는 그림자 단검이었기에, 가볍게 손을 그었음에도 상당한 양의 피가 흘러내렸다.
주르륵.
‘확실하게 모조리 끌어내야해.’
나는 피가 흐르는 손을 내밀어 주먹을 꽉 쥐었다.
핏줄기가 바닥에 툭툭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금세 손바닥의 피가 멎어버렸다.
‘뭐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펴보는데 바닥에 알림글이 스륵 떠올랐다.
[돌고래 신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감각차단 발동]
[혈액차단 발동]
[회복 발동]
‘돌고래 신의 가호…!’
어느새 왼손의 상처 주변에 돌고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통증은 어느새 사라졌고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았다.
돌고래가 손바닥을 유영하자, 찢어졌던 살갗이 빠르게 붙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성능이 좋았어?’
돌고래 신의 가호를 얻은 후로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어서 거의 잊고 있던 가호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능에 역시 레부에게서 이 가호를 얻어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중요한 급소를 찔리지 않는 한 웬만한 상처는 충분히 커버될 것 같았다.
‘역시 돌고래 신의 가호도 성장시키긴 해야겠네.’
나는 말끔해진 내 손바닥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뜻밖의 상황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내 계획이 틀어지는 일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소량의 피로도 뱀파이어들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사사사삭.
브란 성의 지하에 숨어 있던 놈들이 성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대장이 처음부터 바로 나오지는 않겠다 이건가.’
수는 서른 남짓.
하지만 셋은 성의 언덕길에서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각성자.’
뱀파이어들과는 다르게 검과 같은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무래기들을 먼저 보내 우리를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단숨에 끝내주지.’
바짝 엎드린 채 바위 절벽을 내려오는 놈들이 보였다.
사사사삭!
새까만 옷을 입고 가느다란 팔 다리를 휘적거리며 빠르게 기어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비슷한 종류의 벌레가 생각나 혐오감이 일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린 나는 염력을 이용해 마나막을 만들었다.
“마나막.”
주변의 마나가 소리 없이 움직이며 투명한 마나막이 나타났다.
나는 정원에 내려선 조무래기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마나막을 쏟아 부었다.
서걱.
서걱. 서걱!
내리쳐진 마나막이 조무래기들을 동강냈다.
동강난 뱀파이어의 시체들은 빠르게 먼지로 사라졌지만 그 사이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놈들이 있었다.
사사삭!
놈들은 자신의 동료가 재로 사라진 것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안광을 번뜩이며 오직 나만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피 냄새의 효과가 굉장하네.’
나는 아직 살아남은 놈들에게 마나막을 두어 번 정도 내리쳤다.
서걱!
서걱!
정원에 잿빛의 먼지가 흩어졌다.
더 이상 바닥을 기어오는 뱀파이어는 남아있지 않았다.
‘조무래기 정리 끝.’
마나막들을 해제시키며 언덕길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무래기들이 모두 죽자, 이번에는 감염자 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탓!
언덕길을 박차고 두 감염자가 뛰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두 감염자 대신 움직이지 않는 한 감염자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질끈 올려 묶은 여자는 커다란 활을 들고 있었다.
생전에 익숙하게 사용하던 무기 같았다.
여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등에 맨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낸 후, 활의 시위에 걸어 당겼다.
그리고는 툭.
시위를 놓았다.
쇄액!
날카로운 화살이 빠르게 내게로 날아왔다.
“마나 방패.”
나는 정면을 바라보며 마나 방패를 시전했다.
촤륵!
순식간에 앞을 막아선 마나 방패에 화살이 꽂혔다.
콱!
쩌적!
꽤 능력치가 높은 각성자였는지, 내 3레벨의 마나 방패에 금이 갔다.
‘하지만 뱀파이어를 상대하기에 좋은 무기는 아니야.’
뱀파이어들은 화살을 피해낼 정도로 민첩했다.
그렇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을 터.
그 틈에 감염자 둘이 내 근처까지 내려왔다.
모두 뱀파이어의 조무래기와 비슷할 정도로 말라있었다.
드라큘라가 온몸의 피를 빨아내고 저들을 조종할 최소한의 혈액만을 넣어뒀으리라.
얼굴 역시 창백했고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하지, 조시프!”
도린이 그 둘을 알아보고는 발걸음을 떼었다.
“오지 마세요.”
나는 다가오려는 도린에게 단호히 말했다.
도린이 흠칫하며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괜히 놈들의 주의가 다른 사람에게 쏠리면 성가셔졌다.
다행히 둘의 탁한 눈동자는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 명은 방망이 같은 둔기를 들어 올렸고 다른 한 명은 허리 뒤에 메어뒀던 채찍을 꺼내 들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채찍과 뭉툭한 둔기가 내게 날아들었다.
휘릭!
부우웅!
나는 제자리에서 도약해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훅!
내 발 밑으로 채찍이 내리쳐지고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간격 조절과 타이밍이 절묘한 것이 생전에 합을 많이 맞추었던 각성자들이었던 것 같았다.
안타깝지만 다시 살려낼 방법은 없었다.
‘디나처럼 다른 희생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죽이는 것이 최선.’
순식간에 목표를 놓친 감염자 둘이 무기를 거두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약의 정점에 머무는 사이 나는 아래쪽으로 마나 방패를 만들었다.
“마나 방패.”
촤륵!
사뿐히 그 위로 착지한 나는 레부를 돌아보았다.
“레부!”
“쿄아!”
레부가 눈치 빠르게 불꽃을 내뱉었다.
화르르륵!
나는 레부가 내뱉은 불꽃을 받아내어 길쭉하게 늘렸다.
채찍을 든 감염자가 위에 떠 있는 나를 향해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휘릭!
공기의 파열음과 함께 채찍이 날아왔다.
나는 레부의 불꽃을 뱀처럼 길게 늘려 빠르게 움직였다.
자유롭게 허공을 기어간 불꽃의 뱀이 채찍을 휘두른 감염자에게 향했다.
콰득!
채찍이 마나 방패에 닿기 직전, 불꽃의 뱀이 감염자의 심장을 물어뜯으며 지나갔다.
순식간에 가슴이 뻥 뚫려버린 감염자가 채찍을 놓치며 털썩 쓰러졌다.
나는 불꽃의 뱀을 그대로 움직여 이번에는 몽둥이를 휘두르던 감염자의 심장을 불태웠다.
촤악!
역시 힘없이 몽둥이를 떨어트린 감염자가 풀밭 위로 넘어갔다.
그때 앞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나는 즉시 마나 방패를 없애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쇄액!
바람을 가르는 화살 소리가 머리 위를 스쳤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나는 불꽃의 뱀을 활을 쏘는 감염자에게 날려보냈다.
콰득.
불꽃의 뱀이 마지막 감염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나는 손을 까닥여 할 일을 모두 마친 불꽃의 뱀을 불러들였다.
세 감염자가 모두 쓰러지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불꽃의 뱀을 스르륵 돌리며 탐지로 주변을 살폈다.
‘이제 네가 나올 차례다.’
그리고 곧.
뒤쪽의 하늘에서 무언가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나는 뒤를 돌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게 뜬 달을 배경으로 새까만 박쥐 한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드라큘라.’
드디어 밤의 성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