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나는 결국 국제 각성자 컨벤션의 개막식에 참여하기로 했다.
차에서 봤던 김지석의 눈빛과 주선오의 간청, 윤도빈의 끝없는 설득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조금의 이유는 되긴 했지만.
만나보고 싶은 랭커가 온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개막식은 3시.’
나는 벙커의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은 시간.
‘충분하네.’
나는 가볍게 풀던 몸을 일으켜 입구 쪽의 탁자로 향했다.
“후.”
탁자 위에 둔 물병을 들어올려 물을 마시는 중에.
“쿄오오오….”
옆에서 레부의 기운 빠진 소리가 들려왔다.
레부를 바라보니 양 어깨가 축 늘어져있었다.
게다가 눈과 입꼬리까지 아래로 축 처진 것이 금방이라도 땅으로 꺼질 것 같았다.
“레부야.”
“…쿄오오오….”
내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근 일주일 동안 이번 각성자 컨벤션에 내놓을 아이템들을 모조리 수거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다시 말했다.
“레부야. 대답.”
“…쿄오…. 쿄.”
레부가 그제야 시선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깟 C급, B급 아이템한테 집착해봤자 소용없어. A급이랑 S급을 먹어야지. 안 그래?”
레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는 주인까지 기운 빠지게 그러고 있을 거야?”
“…쿄오….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었다.
슬슬 달래는 것도 지쳤다.
“레부도 주인이 레부 때문에 짜증나는 건 바라지 않겠지?”
그제야 레부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입꼬리를 슥 올렸다.
그래봤자 이제야 일직선을 그렸지만.
일단은 저 정도로 봐주기로 했다.
나는 레부에게 손짓했다.
“모부 꺼내봐.”
“쿄.”
레부가 힘없이 대답했다.
녀석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원래 서 있던 자리에 레부의 반만 한 젤리의 잔상이 남았다.
레부는 그 잔상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잔상의 발끝부터 붉은 젤리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젤리는 빠르게 레부의 손으로 흡수되었다.
그 안에서 모부가 나타났다.
“…휴…. 저를 잊은 건 아닌가 했네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잘 지냈어?”
“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휴.”
울컥하려던 모부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성격이 좀 죽었군.’
예전 같았으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끝까지 할 말을 다 했을 텐데.
하긴 벌써 3달 이상 레부의 몸속에 갇혀있기만 한 모부였다.
약해진 몸으로는 레부의 불길을 뚫을 수 없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때와는 다르게 허락 없이는 절대 나올 수가 없었으니 꽤 답답했으리라.
“…휴. 그래요. 앞으로 주인 친구들은 건들지 않을게요.”
모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친구라는 기준이 조금 애매했다.
나는 모부의 말을 고쳤다.
“내가 허락하는 것들만 건드리도록.”
“휴. 알겠어요.”
모부가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모래의 심장을 꺼내 모부에게 툭 던졌다.
그러자 모부가 심장을 덥석 받아먹었다.
꿀꺽.
사사사삭.
금세 모부의 몸집이 커졌다.
레부와 같은 크기로 돌아온 모부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서 모래의 심장을 꺼냈다.
“여기요, 주인.”
확실히 순종적이었다.
나는 염력으로 모부가 내민 모래의 심장을 끌어당겨 품에 넣었다.
“그래. 가서 몸 좀 풀어.”
내 말에 모부는 옆의 레부를 슬쩍 바라보았다.
여전히 기운이 없는 레부.
“휴. 뭐죠? 왜 이러고 있어요?”
“쿄…. 아이템이…. 내 아이템이….”
레부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같은 아이템 보부상 슬라임에게 설움을 토로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휴! 겨우 그것 조금 털렸다고 그러고 있나요?”
모부는 여전히 레부에게는 가차 없었다.
“저는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이제 풀려났는데! 겨우 그거가지고 저한테 투정을 부린다고요? 용서할 수 없어요!”
“쿄, 쿄! 아, 아니, 잠깐…. 쿄!”
레부와 모부가 신나게 뛰어 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소란스러움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 배경음을 들으며 다시 몸을 풀기 시작했다.
* * *
아파트의 주차장에 차를 대놓은 주선오는 차에서 내려 윤도아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개막식 때 윤도아가 참석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정말 기뻤다.
‘그런 자리에 나란히 참여할 수 있다니.’
주선오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윤도아가 처음 나타나고 지금까지 6개월 동안 주선오는 윤도아를 뒤따르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게이트를 하나라도 더 닫으려고 했고, 이제 S급 게이트도 혼자서 클리어가 가능했다.
한 가지,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직 S급의 무기를 얻지 못했다는 것.
신교진이 A급 쌍둥이 게이트에서 S급 무기를 얻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서러운 상황이었다.
물론 신교진은 운빨이 좋아서 그렇지만.
‘나도 S급의 무기가 나오면 좋을 텐데….’
그때 주차장에 윤도아가 나타났다.
평소와 같이 단발의 머리를 묶어 올렸고, 딱히 화장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모습이었다.
‘옷 때문인가?’
검은색의 체크무늬 수트. 목 부분의 단추를 열어둔 하얀 셔츠. 무늬 없이 깔끔한 까만 단화까지.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윤도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주선오를 향한 순간.
‘!’
주선오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바로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괜한 긴장감에 주선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헛기침을 한 번 한 주선오가 윤도아에게 다가갔다.
“오셨어요?”
“응. 이거 뒤에 좀 실을게.”
윤도아가 들고 온 큰 쇼핑백을 들어보였다.
“네. 주세요.”
얼핏 보니 모자와 운동화, 편한 옷가지들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개막식 끝나고 어디 가세요?”
혹시 바로 게이트라도 가려는 건가 싶었다.
“아니. 얼굴 내놓고 돌아다니기 힘드니까.”
윤도아가 대답했다.
“아….”
주선오 역시 그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선오를 알아보았다.
그 이후로는 마음 편하게 밖을 돌아다녀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주선오가 뒷좌석에 쇼핑백을 싣는 사이, 윤도아는 어느새 보조석에 올라타 있었다.
주선오가 운전석에 올라타 벨트를 매는 사이 윤도아가 물었다.
“컨벤션 일정 알고 있어?”
“일정이요? 네. 대충은 들었습니다.”
주선오가 차를 출발시키며 대답했다.
“좀 알려줘. 김 이사님이 대충 알려주긴 했는데 가물가물하네.”
“오늘은 개막식 말고 큰 행사는 없습니다. 1전시실에서 아이템 마켓이 열리고, 3전시실에서 기관 및 무리 홍보가 진행되고요.”
“응.”
“내일은 게이트 정보 교류를 위한 세미나가 있고요. 수요일은 그때 게이트 브레이크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세미나가 있습니다.”
윤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에는 아이템 경매가 열리고요. 그것 외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자잘한 것들이고…. 폐막식은 일요일인데 이때는 저희가 갈 필요는 없고요.”
“뭐, 내일이나 모레도 딱히 들을 필요는 없겠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윤도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고 길게 하품을 했다.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도착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주선오가 흘긋 윤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던 윤도아가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그래, 그럼. 좀 잘게. 아침부터 레부랑 놀았더니 좀 졸리네.”
오전부터 개인 단련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윤도아가 곧 눈을 감고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주선오는 윤도아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차를 몰았다.
* * *
“누나.”
왼쪽 어깨에 온기가 느껴졌다.
번쩍 눈을 뜬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주선오의 차 안이었다.
어느새 도착했는지 주선오가 나를 깨운 것이었다.
“다 왔어요.”
아직 잠이 덜 깬 탓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주선오를 바라보았다.
“…누나?”
주선오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불렀다.
평소의 편한 차림과는 다르게 수트를 빼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주선오가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어, 깼어.”
자연스럽게 창밖을 내다보게 된 내 눈에 컨벤션홀이 들어왔다.
주선오가 차를 댄 곳은 컨벤션홀의 주차장이었다.
이곳은 그나마 사람이 적었지만 고개를 더 돌려 바라본 전시실 건물의 앞쪽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사람 많네.”
“아무래도 전 세계에서 모였을 테니까요.”
우리는 차에서 내려 빠르게 컨벤션홀로 들어갔다.
몇몇 사람이 우리를 알아보긴 했지만 다행히 큰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컨벤션홀의 대기실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김지석이 있었다.
“아, 도아 씨. 어서 오세요. 선오도 왔어?”
김지석이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김지석은 평소보다 차림새에 더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직접 무대에 올라가서 개막식을 진행해야하기 때문인 듯했다.
고급스러운 검은 정장과 체크무늬의 넥타이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시간 딱 맞춰서 오셨네요. 일단 자리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김지석이 곧바로 우리를 데리고 대기실을 나섰다.
이미 컨벤션홀의 좌석에는 사람들이 꽤 차있었다.
김지석을 따라 앞줄로 내려가는 사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란에 앞자리에 앉아있던 금발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왠지 뒷통수가 익숙하다 싶었더니 니엘이었다.
“도아 언니!”
니엘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얼마나 목청이 크던지 니엘의 외침에 일순 컨벤션홀이 조용해질 지경이었다.
“…니엘이네요.”
주선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도도도 달려오는 니엘 역시 깔끔한 수트 차림이었다.
빠르게 내 앞에 도착한 니엘은 그대로 내게 폭 안겨왔다.
“도아 언니! 보고 싶었어요!”
‘어?’
니엘의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을 보니 루크 역시 이 자리에 와있는 듯 했다.
나는 빠르게 좌석을 살폈다.
그리고 중앙쯤에 앉아있는 루크를 발견했다.
그 옆으로는 캐나다의 각성자들인 몰리와 카터도 함께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셋이 내게 눈인사를 해보였다.
피식 웃은 나는 마주 인사를 건네고는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니엘에게 말했다.
“걸을 수가 없는데, 니엘.”
“음.”
니엘이 금세 떨어져나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내게 팔짱을 끼어왔다.
“이제 걸을 수 있겠죠?”
그제야 김지석은 우리를 다시 자리로 안내했다.
“도아 씨는 여기, 선오 씨는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김지석이 가장 앞줄의 자리 두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자리의 배치를 들은 니엘의 불평을 표했다.
“개서노랑 자리 바꿔서 앉으면 안 돼요?”
“…아니, 그 이름 좀.”
주선오가 상당히 불편한 내색을 비췄다.
신교진이 얼마나 주입을 시켜두었는지 아직까지 저 어려운 발음을 까먹지도 않고 있는 것이 대단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난처한 건 김지석도 마찬가지였다.
“랭킹 순서대로 일단 좌석을 배치해둔 겁니다.”
“왜! 어차피 1위가 도아 언니인거 다 아는 사실인데 그냥 바꿔 앉아요. 도아 언니 옆자리 앉고 싶단 말예요!”
니엘이 고집을 부렸다.
아마 이곳 어딘가에 있을 루이스가 탄식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니엘.”
내 부름에 니엘이 금세 눈을 반짝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네, 언니.”
“정해진 대로 앉자.”
자리를 바꾼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았기에 나는 원칙을 고수하는 척 했다.
그러자 니엘이 금세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에….”
“그럼 저는 마저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한시름 놓은 김지석이 빠르게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 니엘의 옆자리에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붉은빛의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고 장난기가 넘쳐흐르는 얼굴로 웃고 있는 여자.
왼쪽 눈 밑의 중앙에 위치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안 그래도 다들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런 자리가 열려서 다행이네.”
그녀는 나와 주선오의 앞에 서더니 커다란 입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조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현재 세계 랭킹 4위이자,
내가 만나보고 싶었던 랭커.
조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