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최은서가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가 생각에 잠겼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선택권은 없어요. 이건 협상이 아니고 명령이에요.”
최은서가 흘긋 나를 바라보았다.
“나가서도 허튼 수작 부릴 생각 말고요. 감시를 붙여둘 거니까요.”
내가 레부를 가리켜보이자.
“쿄쿄쿄쿄.”
레부가 음흉하게 웃었다.
최은서가 불안한 얼굴로 레부를 보며 되물었다.
“가, 감시요?”
나는 다시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뭘 믿고 최은서 씨를 그냥 놔두겠어요? 여기서 나가게 되면 쪼르르 달려가서 이런 얘기들까지 모조리 할지 어떻게 알고요. 안 그래, 레부?”
“쿄쿄쿄쿄. 물론이죠, 주인. 믿을 수 없습니다.”
레부가 동의했다.
최은서가 반발했다.
“하, 하지만 저, 저런 몬스터를 데리고 돌아다닐 수는…. 그, 금방 들키고 말 거예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는 레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부, 나눠.”
“쿄!”
순식간에 레부가 반으로 쩍 쪼개졌다.
“으악!”
놀란 최은서가 비명을 내질렀다. 말을 할 때와는 다르게 우렁찬 비명이었다.
두 덩어리로 나뉜 레부 중 하나가 곧 팔찌의 형태로 변했다.
예전에 쌍둥이 게이트에 갔을 때 신교진에게 주었던 팔찌와 같은 것이었다.
작아진 레부가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주워 내게 건넸다.
나는 레부의 팔찌를 최은서의 팔에 채우며 말했다.
“봤다시피 이 슬라임의 몸체나 다름없는 거예요. 만약 최은서 씨가 그놈들한테 이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한다거나 이걸 빼려고 한다면.”
내가 슬쩍 레부를 바라보았다.
레부가 작게 불꽃을 일으켰다.
“쿄쿄쿄쿄쿄.”
“손목이 불타는 걸로는 안 끝날 거예요.”
최은서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는 영 찝찝하다는 듯 자신의 팔에 채워진 붉은 팔찌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겁을 줬으니 최은서의 성격상 이곳에서의 일을 발설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팔찌가 평소보다 뜨거워진다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팔찌에 대고 레부를 불러요. 그럼 나와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
최은서는 자신에게 채워진 붉은 족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
“…네.”
잔뜩 풀죽은 최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원찮은 대답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좋은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도토리들, 들어가.”
나는 두 슬라임을 들여보냈다.
“참. 물어볼 게 있는데.”
우울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최은서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 이시결이라고 알아요?”
같은 미등록 각성자의 무리라면 혹시 알지도 몰랐다.
하지만 최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시결이요?”
아무래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여기서 나가자마자 이시결이라는 미등록 각성자가 있는지 알아봐요. 기간은 하루면 충분하죠?”
내가 웃으며 물었다.
최은서가 당황했다.
“네? 하, 하루라뇨…. 너무 짧아요. 저,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한 달은 너무 긴데?”
“그, 그치만 제가 갑자기 그런 사람을 찾겠다고 들쑤시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그냥 아까 그 스킬 걸면 되는 거 아네요?”
“…아….”
내 말에 최은서가 잊고 있던 자신의 스킬을 깨달은 듯 했다.
“됐죠? 하루.”
“그, 그래도 그러려면 둘이 있는 시간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최은서의 말이 자꾸 길어졌다.
하루로는 영 힘든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럼 일주일 줄게요. 충분하죠?”
내 타협점에 최은서가 고개를 푹 숙였다.
“…노, 노력은 해 볼게요…”
그쪽에서 이런 스파이를 보내준 덕분에 어쩌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릴 것 같았다.
이제 최은서의 일이 정리되었으니 게이트를 나갈 차례였다.
나는 다시 나침반을 꺼내들었다.
나침반의 뚜껑을 열자 자침은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최초의 책.’
다시 최초의 책을 생각했지만 자침에 변화는 없었다.
‘위치를 나타내고 있는 건가?’
“따라와요. 나가게.”
나는 자침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최은서가 나를 뒤쫓으며 물었다.
“…나간다고요? 채, 책은요?”
“이제 찾을 거예요.”
자침은 서고에 들어온 아치형의 통로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반대편 서고인가?’
권재경과 최은서가 살펴봤다고 했던 서고였지만 겉보기로는 티가 나지 않는 책일지도 몰랐다.
통로를 지나 서고지기가 있는 홀로 나오자 서고지기의 눈이 다시 우리를 향했다.
나는 계속 자침을 따라 걸었다.
서고지기의 두꺼운 기둥을 지나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는데.
자침이 움직였다.
‘…어라?’
뭔가 이상했다.
서고지기 너머의 통로를 가리키는 것인 줄 알았던 자침이 내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이동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자침을 내려다보았다.
자침이 가리키는 것은 서고지기였다.
‘…서고지기?’
내 시선을 받은 서고지기가 눈을 깜빡였다.
이 게이트의 목표는 최초의 책을 찾는 것.
최초의 책이라면 분명 이 서고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온 책.
나는 게이트에 입장한 후 서고지기와 주고받았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서고는 아주 오래된 서고입니다. 이 서고지기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곳이지요.’
서고지기가 힌트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서고지기는 처음부터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서고지기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최초의 책. 찾았다.”
<허허헛!>
서고지기가 기쁜 웃음을 터트렸다.
가지에 매달린 등불들이 서서히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를 반복하며 반짝였다.
“뭐, 뭐예요…?”
최은서가 몸을 움츠리며 반짝이는 등불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다시 서고지기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주 오랜만에 서고가 주인을 되찾았군요.>
순간 반짝이던 등불들이 빛을 감췄다.
갑자기 어두워진 서고에 찰나의 정적이 흘렀고.
잠시 후 밝은 빛이 서고 전체에 번쩍였다.
화아악!
“악!”
최은서의 비명이 귀를 울렸다.
빛을 피해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홀에 있던 거대한 나무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뭐…. 뭐야….”
최은서가 홀을 살피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장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홀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고지기의 가지가 뒤덮고 있던 천장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내 앞, 서고지기의 뿌리가 사라져 울퉁불퉁한 흙바닥 위에 갈색의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책의 주변으로 알림글들이 떠올랐다.
[S급 아이템 최초의 책]
[본 아이템은 귀속 아이템입니다.]
[최초 발견자에게 아이템이 귀속됩니다.]
[최초 발견자 : 윤도아]
[S급 아이템 최초의 책이 귀속되었습니다.]
동시에.
[최초의 책을 찾았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성적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게이트를 나가기 전 보상을 확인하십시오.]
게이트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게 이런 수색 게이트의 경우, 게이트의 목표가 아이템으로 주어졌다.
발견한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귀속되는 귀속 아이템으로.
즉 이것 또한 보상 중 하나였다.
나는 염력으로 책을 들어올려 손에 쥐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최은서가 내 손에 들린 낡은 책을 보더니 물었다.
“그, 그게? 서고지기가 최초의 책인 거예요?”
최은서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렇네요.”
밝은 빛 때문인지 다른 서고에 있던 이리나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책 찾은 거예요? 클리어 메시지 떴던데?”
그 뒤를 따라 권재경이 여전히 잠들어있는 나라를 안고 따라왔다.
나는 책을 들어보였다.
“찾았어요.”
권재경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벌써 찾으신 겁니까?
“서고지기가 최초의 책이었어요.”
그에 권재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책이라길래 무조건 책만 살펴보고 있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침반이 없었다면 분명 권재경과 최은서처럼 서고의 책들만 뒤지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침반의 성능은 아주 좋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위치를 찾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세트를 찾기 전까지도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나는 나침반의 뚜껑을 닫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보상 확인해보세요, 다들.”
우리는 각자 보상을 확인했다.
“보상 확인.”
[S급 아이템 최초의 책]
[스탯 포인트 7]
두 개의 보상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A급 게이트에서 S급 아이템을 얻었다.
‘최초의 책.’
잠시 책 안의 내용을 훑어보려 책을 펼치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
나는 즉시 책을 닫았다.
읽을 수 없는 글자가 가득한 책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문득 서고지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고지기는 서고의 주인에게만 정보를 드리지요.’
최초의 책은 서고지기 그 자체.
이 책이 나에게 귀속이 되었다는 건 이제 내가 서고의 주인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서고지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서고에 주인이 생겼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나한테만 들리는 건가?’
<그렇습니다. 서고의 주인이시여. 서고의 주인은 언제든 저와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서고지기가 내 생각에 반응하여 대답했다.
‘책을 들고 있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주인에게 주어지는 특권과도 같은 것이지요. 허허허.>
서고지기의 중후한 웃음이 들려왔다.
‘그닥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 계속 내 생각을 듣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 아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인이 저와 이야기를 나눌 의사가 있어야만 저는 주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 그럼 일단 네 가치를 설명해봐.’
내 명령에 서고지기가 웃었다.
<전 서고지기이자 최초의 책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곳에 있는 모든 책들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주인께서 어떠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그것을 제공해드릴 수 있지요.>
‘아까 했던 얘기군.’
<그렇습니다. 다만 이곳에 있는 책들이 가진 정보에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이 서고에 있는 책 내용 이외에는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직 주인이 알기에 이르다고 판단되는 정보 역시 제공할 수 없습니다.>
서고지기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기준이 뭔데?’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정보 제공이 제한되었다.
‘그럼 나침반의 세트 아이템에 대해서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쯧.’
그때 보상 확인을 마친 권재경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서고지기와의 대화를 중단했다.
“이번 게이트도 도아 씨 덕분에 수월하게 깰 수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아뇨. 아저씨한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멋대로 따라 들어온 것뿐이라서.”
“어떤 걸 말입니까?”
권재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리나와 최은서가 있는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죠.”
다들 보상 확인을 마친 것 같았다.
우리는 게이트의 밖으로 이동했다.
* * *
“…그럼, 전 가볼게요….”
게이트를 나오자 최은서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일 기관에 등록하러 오십시오.”
권재경이 최은서에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네. 그럼….”
최은서는 내 눈치를 보며 인사하더니 곧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되게 빨리 가시네.”
최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리나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이리나에게 말했다.
“리나야. 아저씨랑 좀 할 얘기가 있는데 나라랑 자리 좀 피해줄래? 잠깐이면 돼.”
“아, 알겠어요.”
이리나가 별다른 질문 없이 권재경에게서 잠든 나라를 받아들었다.
“얘기 끝나면 연락 주세요.”
나라를 안아든 이리나가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어떤 게 궁금한 겁니까?”
권재경이 물었다.
조금 쉬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전에 김 이사님이랑 같이 교육받았던 오진서라는 각성자, 기억하시나요?”
“아, 기억합니다. 얼마 전에 경매에도 참여했었고요.”
마침 권재경도 기억을 하고 있었다.
“경매 때 직접 이야기 나누신 거죠?”
“네. 각성증과 대조해서 본인 확인을 했어야 하니까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조금 알아볼 일이 생겨서요. 혹시 교육 때랑 아이템 경매에 참여했을 때랑 달라진 점 같은 건 없었나요?”
권재경이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글쎄요. 교육 때도 사실 오래 본 게 아니라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만…. 사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긴 했습니다.”
“분위기가요?”
“네. 교육 때는 순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경매 때 봤을 때는 조금 달라졌더군요. 말수도 확연히 적어졌고. 그 사이에 게이트를 많이 닫았는지 노련해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역시.’
권재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매에 참여했던 오진서는 권재경이 교육했던 오진서가 아니었다.
이시결이 오진서의 각성증을 빌리거나 훔쳐서 이용한 것이 확실했다.
‘만약 빌려줬다고 해도 그건 미등록과 연관이 있다는 것.’
어쨌든 오진서를 만나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오진서 각성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권재경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김지석이었다.
나는 권재경에게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았다.
“잠시만요. 네, 이사님.”
[도아 씨. 아까 말씀하진 오진서 각성자에게 연락을 해봤습니다.]
역시 일처리가 빨랐다.
“연락이 됐나요?”
하지만 김지석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니요. 시도는 해봤지만 현재 오진서 각성자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더군요.]
나는 흠칫 놀라며 권재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를 보고 있던 권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