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컨벤션 때 봤던 얼굴과는 달랐다.
그때 봤던 얼굴은 오진서 각성자의 얼굴.
저게 진짜 이시결이었다.
내 시선에 이시결의 입술이 휘었다.
“제대로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겼네요.”
하지만 나는 들고 있던 단검을 이시결에게 겨누었다.
“이야기는 그쪽을 잡아놓고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러자 이시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는다고요? 저를?”
까만 장갑을 낀 손으로 잠시 입을 가린 채 나를 바라보던 이시결이 말했다.
“의외네요. 누구인지 먼저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이시결은 내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시결이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저를 아시나요?”
“알고 있지. 우리 만난 적 있잖아?”
“아….”
이시결이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심연의 불꽃을 꺼내 들며 이시결을 주시했다.
놈 역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이시결이 반쯤 가려진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여우 구슬을 먹었나보군요.”
‘!’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순간 마음을 읽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와 이시결이 마주친 건 경매에서가 전부.
그때는 오진서의 얼굴이었지만 내가 이시결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시결은 내가 여우 구슬 아이템을 먹었다는 것을 유추해낸 것이었다.
비상한 사람이었다.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그걸로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냈다.
게다가 여우 구슬의 성능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경매 때 서리를 노렸던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더 아이템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미소를 거둔 이시결은 입을 가렸던 손을 내려 뒷짐을 지었다.
혹시 몰라 탐지로 이시결의 등 뒤를 살폈지만 딱히 무기 같은 것은 숨겨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뭐, 예상이 조금 빗나간 게 짜증나긴 하지만.”
이시결이 잠시 하늘을 뒤덮은 거미줄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거미들이 몰려들 겁니다. 당신이 제 시커를 쳐낸 덕분에요.”
이시결이 내 옆의 나무에 박힌 시커를 가리켜 보였다.
“그때가 되면 원치 않아도 부딪히게 될 텐데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내 양손을 훑어보고는 내게 장갑을 낀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저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습니다만.”
이시결이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손에만 잡고 있지 않을 뿐, 이시결의 양쪽 허벅지 바깥쪽에는 비수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한쪽에 4개씩 총 8개의 비수였다.
게다가 보이는 것만이 무기는 아니었다.
조금 전 김서경이 죽은 이유는 단순히 하얀 실뭉치에 호흡이 막힌 것이 아니었다.
‘실에 묻은 독.’
그것이 김서경의 정확한 사인일 것이다.
김서경은 단순한 호흡 곤란이라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사망했다.
이시결은 처음부터 김서경을 죽일 생각으로 독을 묻힌 거미줄로 김서경의 호흡기를 막아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손에 들고 있던 두 단검을 허리 뒤의 칼집에 넣었다.
‘장단을 좀 맞춰볼까.’
어차피 나에게 이시결의 독 거미줄을 피할 방법은 많았다.
마나 방패, 혹은 루마니아에서 얻었던 드라큘라의 안개화도 있었다.
게다가 놈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미등록에 대한 정보도 김서경보다 많을 것 같고.’
이시결은 내 행동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이시결을 보며 물었다.
“내 뒤를 쫓은 건가?”
“엄밀히 말하자면 다르지요.”
이시결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윤도아 씨처럼 이용했을 뿐입니다.”
이시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최은서를요.”
‘!’
최은서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내가 이곳에 오도록 유인한 것이 이시결이었다는 건가.
이시결은 최은서가 내게 미등록의 정보를 넘기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서경을 쫓아 내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따라 들어온 것.
‘그럼 최은서는….’
내 표정이 굳어짐을 눈치챈 이시결이 이어 말했다.
“아. 혹시 그 여자한테 제가 무슨 짓을 했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 여자는 건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고요. 그런 약해빠진 인간한테는 관심이 없거든요.”
이시결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등록들도 참 멍청하죠. 그런 스파이는 언제든 역이용당할 수 있다는 걸 모르다니. 저 같았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시결은 자신과 미등록을 분명히 구분 짓고 있었다.
“넌 미등록 무리가 아닌가보지?”
“하아…. 실례군요.”
이시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놈들과 무리를 이뤘다고 생각하다니 너무하십니다. 전 그놈들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최은서를 이용하는 것처럼요.”
이시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김서경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이용할 필요도 없을 것 같긴 하군요. 저들한테는 이제 흥미가 떨어졌습니다.”
“흥미?”
“맞아요. 전 미등록들이 기관에 등록한 정식 각성자들과 견줄 만한 실력을 가진 줄 알았어요.”
이시결의 눈이 다시 내게 향했다.
“예를 들자면 당신이나 주선오 씨처럼요.”
“아니었나 보지?”
이시결이 나를 따라 팔짱을 끼더니 살짝 삐딱한 자세를 취했다.
“그냥 재미없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본인과 비교하면?”
내 질문에 이시결이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성격을 비교하자는 건 아닌 것 같고. 설마 제 실력과 그놈들의 실력을 비교하는 건가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질문 자체가 상당히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건 조금 기분이 더럽군요. 여우 구슬로 제 정보를 보셨다면 아실 텐데요.”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악마의 고양이 특성과 견줄 정도의 특성을 지닌 사람.
이시결의 반응을 보아하니 모두 그와 같은 실력을 가진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시결이 미등록에 대해 모두 알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이시결이 재차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놈들은 게이트를 닫아봤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수준입니다.”
이시결은 미등록들을 상당히 얕보고 있었다.
“그럼 왜 계속해서 미등록들과 어울리고 있는 거지?”
내 질문에 이시결이 다시 미소를 띠었다.
“미등록들을 돕다보면 실력 있는 각성자들과 붙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붙어 본다…?”
그러자 이시결이 살짝 시선을 떨구더니 사나운 웃음을 띠었다.
“있죠, 윤도아 씨. 제 삶은 각성을 하고 나서부터 너무나도 달라졌어요.”
이시결이 천천히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당신도 아시겠죠. 힘이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쾌감을 주는지.”
이시결이 벗은 장갑이 마른 흙바닥 위에 툭 떨어졌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드러났다.
“힘이 좀 있거나 재력이 좀 있다고 오만하게 굴던 놈들이…. 각성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기쁘던지.”
이시결의 손가락이 뒤틀린 입을 가렸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가 가진 힘으로 상대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이요. 특히 당신과 같이 강한 사람의 목숨을 손에 쥔다면…. 정말….”
까만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가린 이시결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정말, 상상만 해도 전율이 일 지경입니다.”
‘위험하다.’
어떻게 저런 옵션을 지니게 되었는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이시결은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쥐었을 때의 전율을 느끼기 위해서 끊임없이 게이트를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죽이는 순간은….”
이시결의 손 밑으로 섬뜩한 미소가 피어났다.
“정말로…. 잊지 못할 것 같군요.”
이시결이 왼손을 앞으로 훅 뻗었다.
촤악!
그 손끝에서 하얀 실들이 뻗어 나왔지만 손끝이 향한 곳은 내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날아간 하얀 실뭉치가 내 옆의 나무에 꽂혀있던 시커를 휘감았다.
‘거미줄.’
이시결의 스킬 중 하나인 거미줄이었다.
이시결이 다시 왼손을 끌어당기자.
시커를 휘감은 거미줄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나무 깊숙이 박혔던 시커를 뽑아냈다.
이시결이 다시 한 번 왼손을 휘둘렀고 연결되어 있던 거미줄들이 요동치더니 시커를 끌어당겼다.
훅!
이시결은 자신에게 되돌아온 시커를 낚아챘다.
“하지만 그전에.”
이시결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른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싸움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일단 저것들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이시결도 느끼고 있던 모양이었다.
커다란 거미 수십 마리가 우리를 포위하며 사방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나 역시 다시 두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하지만 거미들을 소탕하는 데에 집중할 생각은 없었다.
이시결과 직접 맞붙기 전 놈의 능력들을 파악할 좋은 기회였다.
사사사삿!
거미들이 나무 위의 거미줄을 타고 빠르게 기어왔다.
이시결이 거미줄에 매달린 시커를 아래로 늘어트린 후, 양손으로 허벅지에 매어 뒀던 비수들을 꺼내들었다.
비수들은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손끝에서 뽑아낸 거미줄로 비수들을 고정시켜 놓은 것이었다.
마치 날카로운 손톱들이 길게 솟아난 것 같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시결이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놈의 오른손에 연결되어 있던 비수들이 함께 휘둘러졌다.
후욱!
비수들이 내 위로 날아들었다.
나를 노린 것은 아니었다.
내 머리를 노리고 내려오던 집채만 한 크기의 거미를 향한 것이었다.
푹!
이시결의 비수들이 거미의 단단한 갈색 외피에 박혔다.
“크륵!”
거미에게는 그저 모기에 물린 정도의 수준인 것 같았다.
몸에 꽂힌 비수들을 무시한 여덟 개의 눈이 내게 꽂혔다.
머리통 정도는 가볍게 뚫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윗턱이 사악 벌어졌다.
하지만 거미는 내 머리를 물어뜯지 못했다.
갑자기 동작을 멈춘 거미는 실에 매달린 채 두꺼운 다리들을 축 늘어트렸다.
“작은 상처라도 무시하면 죽기 십상이죠.”
이시결이 다시 팔을 휘둘러 거미의 몸통에 꽂혀있던 비수들을 회수했다.
비수에도 독을 묻혀둔 모양이었다.
나는 매달린 거미의 시체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위쪽에서 거미 수십 마리가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럼 빨리 정리해볼까요.”
이시결이 이번에는 양손을 모두 휘둘렀다.
여덟 개의 비수가 사방으로 퍼지더니 나무 위와 거미를 이어주던 거미줄들을 모두 베어냈다.
“크르륵!”
연결줄이 끊긴 거미들이 마른 흙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쿵!
쿠웅!
덩치가 큰 만큼 거미들이 떨어지며 땅에는 큰 진동이 일었다.
땅에 떨어진 거미들이 재빠르게 다리를 움직여 몸통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사냥감에게 빠르게 돌진했다.
그중 내 근처에 떨어진 두 마리의 거미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다다닥!
거미들의 뾰족한 다리의 끝이 마른 흙바닥 위에 구멍을 남기며 내게 돌진했다.
‘안개화.’
나는 드라큘라에게서 얻어낸 지정스킬 안개화를 사용했다.
스르륵.
나는 순식간에 검은 안개로 흩어졌다.
흑백으로 변한 시야로 두 거미를 피해 뒤쪽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목표물을 잃은 거미들이 내 앞에서 세게 충돌했다.
쿵!
“캬아!”
“크르륵!”
동시에 뒤로 나가떨어진 두 마리의 거미가 서로에게 성을 냈다.
‘해제.’
곧바로 안개화를 해제한 나는 마나를 이용해 한 거미의 머리 위에 거대한 낫을 만들어냈다.
마나로 무기를 만드는 연습은 이미 드라큘라를 상대하며 충분히 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일렁이는 마나의 낫을 내리치자.
서걱!
두꺼운 거미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지며 진득한 까만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주르륵.
쿵!
나는 곧바로 다시 낫을 휘둘러 옆의 거미 역시 반으로 갈랐다.
촤아악!
까만 액체가 나무들에 번졌다.
나는 낫을 이루던 마나를 해체했다.
‘이시결은?’
앞에는 갈색빛 거미의 시체들만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뿐, 이시결은 그곳에 없었다.
놈은 어느새 하늘을 뒤덮은 거미줄의 위쪽에 올라서 있었다.
거미들의 신경은 온통 위쪽에 모습을 드러낸 사냥감에게 쏠려 있었다.
‘일단 지켜보자.’
나는 거미들의 싸움에 합류하지 않고 밤 거미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이시결은 손에 연결된 여덟 개의 비수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거미줄의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하며 비수와의 거리를 조절했고 동시에 비수에 실리는 힘의 강약을 조절하고 있었다.
촥!
촤악!
비수들이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접근하는 거미들을 베어 독을 주입했다.
동시에 오른쪽 손바닥에 연결된 시커가 비수들을 피해 접근해오는 거미의 눈을 베어냈다.
S급의 게이트가 아니라 거미의 수준이 높지는 않았지만, 이시결의 움직임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저 정도로 컨트롤이 가능하다니.’
비수들은 마치 거미의 다리처럼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모두 달랐다. 동시에 시커까지 휘두르며 거미줄을 이용해 자리를 이동하기도 했다.
척 보기에도 이시결이 게이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주선오와 비슷한 시간을 썼겠지.’
그렇기에 얻어낸 실력이었다.
주선오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언가를 공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
그게 몬스터이든 사람이든 이시결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무언가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거미들을 살상하는 이시결은 굉장히 즐거워보였다.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
이시결을 이대로 잘만 성장시킨다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곧 나타날 박성현, 그리고 모두가 죽었던 첫 번째 시험.
이 일들을 손쉽게 해결하게 해줄 강력한 무기가 될지도 몰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