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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86화 (87/201)

제86화

으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목이 나갔을 때보다 더 고통이 심했는지 이시결이 인상을 찌푸렸다.

“윽…. 이건 좀 아픈데요.”

하지만 나는 이시결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찡그린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생각보다 굉장한 사람이군요, 당신. 다른 사람의 팔도 망설임 없이 부러트리고. 아, 혹시 사람을 죽여본 적도 있는 거 아닌가요?”

나를 동요하게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나는 이시결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회귀 전 도빈이를 죽였던 박성현과 그 무리를 정리하면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던 나였다.

그때에는 그것에 죄책감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고 이제는 무감각해져 버린 상태였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시결은 웃음을 멈추었다.

“어라. 그런 반응은 예상 밖이네요.”

나는 이시결의 말을 무시한 채 모부를 불렀다.

“모부.”

주머니에 있던 모래의 심장에서 모부가 튀어나왔다.

“휴.”

모래 슬라임이 빠르게 형태를 갖춰나가자 이시결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모부를 바라보았다.

“슬라임을 수집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요?”

이런 상황에서도 이시결은 농담을 던져왔다.

그러더니 완전한 형태를 취한 모부를 보고는 말했다.

“스킬 보부상이군요.”

“휴? 당신은….”

모부가 가느다란 눈으로 이시결을 보고는 웃었다.

“휴휴휴. 전에 만났던 사람이군요.”

내가 모부를 잡기 전 게이트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탐스러운 스킬을 갖고 있어서 기억하고 있어요. 그동안 꽤 많이 성장했군요. 휴휴휴휴.”

“안 그래도 당신에게서 스킬을 좀 사고 싶었는데 만나지 못해서 조금 아쉽던 차였습니다만. 그런데 스킬 보부상이 왜 여기에 있습니까?”

이시결이 물었다.

나는 둘이 한가하게 잡담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모부, 결박해.”

“휴.”

모부가 모래의 심장에서 모래를 뽑아내었다.

나는 이시결의 양쪽 팔을 뒤로 모았고 모부가 움직인 모래들이 이시결의 손목을 단단히 결박했다.

이시결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야. 좀 살살해주시겠습니까? 아프군요.”

나는 모부의 모래가 이시결의 손목을 단단히 결박한 것을 확인하고는 이시결의 위에서 물러났다.

“일으켜.”

내 말에 모부가 혼자 일어나지 못하는 이시결을 일으켰다.

흙을 잔뜩 묻힌 채 바닥에 앉은 이시결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정말 죽이지 않을 건가요? 지금이야 제가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았지만, 말했다시피 전 끈질깁니다.”

나는 그런 이시결을 똑바로 보았다.

“언제든 결과는 똑같을 거야.”

나는 모부에게 다시 손짓했다.

이시결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모부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시결을 끌고 게이트를 나갔다.

* *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김지석의 이야기를 들은 안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야 게이트를 어렵지 않게 돌고 있지만, 게이트 안에서 사람이 죽는 건 흔한 일이에요.”

게이트가 처음 생겼을 때에는 멋모르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다.

지금도 무리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각성자들은 대부분이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걸 줄이려고 선오랑 같이 기관을 만든 거였는데.’

김지석이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충격은 받았겠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김 이사의 잘못이 아니야, 그건.”

안세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김지석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곧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해결해야 할 일이 많네요.”

“김 이사가 워낙 유능해서 말이지. 빈자리가 크더라고.”

안세인이 김지석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미등록도 김 이사를 노린 게 아닌가 싶어.”

안세인 역시 주선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이는데 실패하니까 이제는 공개적으로 김 이사를 몰아가고 있잖아. 어떻게 해서든 김 이사를 기관에서 떨어트려 놓으려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이거든, 그건.”

김지석이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미등록들이 원하는 게 기관을 대신하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하지는 않네.”

기관에 대한 공격임은 확실했지만 그걸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건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선오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수지에서 발견된 각성자 사체 건도 미등록의 짓이 아닐까 의심되긴 합니다.”

안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도아 씨도 그 얘기를 하긴 했어. 그치만 그것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그런데 죽었다는 기관 소속 각성자가 누구입니까?”

김지석이 물었다.

“음. 오진서 각성자라고. 아, 김 이사는 알겠네. 같이 교육 받았을 텐데.”

“…네? 오진서 각성자가요?”

김지석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래요. 이상한 건 컨벤션 전에 죽었는데 컨벤션에 참여를 했다는 거지.”

안세인의 말에 김지석이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그래서….”

행방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도아 씨가 이제 됐다고 한 것도….’

오진서가 이미 죽었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리라.

김지석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기관의 이사로서 소속의 각성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그게 성립되려면 컨벤션 경매에 참여한 건 누군가가 변장한 오진서 각성자였다는 뜻이 되는데 말이죠.”

“그걸 생각하면 일반 사람이 그랬을 리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일반 사람도 아이템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얻으려 했을까요?”

주선오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렇지. 게다가 그 오진서 각성자로 변장한 사람은 윤도아 씨와 같은 아이템을 노렸다고 하더라고.”

“그런가요?”

김지석과 주선오가 안세인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경매에 참여하지 않은 둘은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알지 못했다.

안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라는 아이템인데. 도무지 어디다가 써야할 지 모르겠는 그런 아이템이었어요, 그게.”

주선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 사람은 그걸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군요.”

“맞아. 도아 씨랑 둘이 경합이 붙은 걸 보면, 분명히.”

“그럼 역시 미등록 각성자일 확률이 크네요. 본인 확인이 되지 않으면 경매에 참여할 수 없었으니.”

김지석의 말에 안세인이 동의했다.

“그래요. 중요한 건 오진서 각성자의 신분을 빌려 경매에 참여한 사람과 오진서 각성자를 죽인 사람이 동일 인물이냐인데.”

“경매에 참여하려고 신분을 빼앗은 것 일수도 있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사실은 아니었다.

“그 사람을 찾아내서 물어보는 게 빠르겠어. 근데 이걸 또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인거지.”

안세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서 등록된 각성자 중에 독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나 보고는 있어요. 일단 그건 우리가 찾아봐도 되니까, 김 이사는 회견부터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안세인의 말에 김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내일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무렵, 주선오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 통화를 마친 주선오가 안세인과 김지석을 보며 말했다.

“도아 누나가 잠깐 집으로 와달라고 하네요.”

* * *

“오셨어요?”

윤도빈이 윤도아의 집에 찾아온 셋을 맞이했다.

하지만 윤도빈의 표정은 그닥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안세인의 물음에 윤도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셋을 안으로 들였다.

“일단 들어오세요.”

윤도빈을 따라 들어간 거실 한쪽에 처음 보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김지석은 남자의 양 옆에 서 있는 레부와 모부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두 슬라임은 그저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고 있었다.

‘도아 씨가 명령을 내린 상태인가?’

김지석은 남자의 모습을 살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고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게다가 오른쪽 손목에는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 있었고 왼쪽 팔은 어깨에 연결된 깁스를 하고 있었다.

양손에는 더운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까만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뭔가 기묘했다.

남자의 시선이 거실에 들어온 셋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곧 양쪽 입꼬리를 삭 올리며 말했다.

“아. 대단한 분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볼 줄이야. 영광이네요.”

내용 자체는 거슬릴 것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미동도 없는 모습과 나른한 목소리가 묘하게 비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흐음?”

안세인은 이건 뭔가 싶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고 주선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닥 마음에 없는 소리 같습니다만.”

주선오의 말에 남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요. 진심입니다.”

남자의 반응에 주선오가 싸늘해진 표정으로 윤도빈에게 물었다.

“저 사람, 혹시 손님?”

윤도아와 윤도빈의 손님이라면 함부로 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었기에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윤도빈은 복잡한 표정으로 이시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누나랑 같이 게이트에서 나온 사람이에요. 팔은 이미 부러진 상태였고 비를 많이 맞아서 그냥 둘 수는 없어서 일단 대충 씻기고 옷 갈아입는 걸 돕긴 했는데, 둘 다 아무 말도 안 해서….”

윤도빈도 정확한 정황을 알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았다.

“게이트?”

주선오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윤도아가 방에서 나와 셋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여기까지 와달라고 해서 죄송해요. 근데 저 사람을 기관에 데려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와 달라고 했어요.”

안세인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요?”

“미등록 각성자예요.”

윤도아의 대답에 셋의 시선이 동시에 남자에게 향했다.

“미등록 각성자?”

“레부, 모부. 들어가.”

윤도아의 명령에 두 슬라임이 탁자에 있던 심연의 불꽃과 모래의 심장 속으로 흡수되었다.

“일단 앉으세요.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김지석은 안세인과 주선오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윤도빈은 거실이 보이는 주방의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윤도아가 싸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밤 거미 이시결. 이 사람이 오진서 각성자를 죽인 각성자예요.”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김지석은 당황한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실 며칠 전부터 미등록 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어요. 관장님이나 이사님도 알고 계셨다시피 최근에 미등록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니까요.”

안세인과 김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랬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윤도아의 행동은 감탄스러웠다.

윤도아는 기관보다도 먼저 미등록의 무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그러다가 미등록을 쫓아 들어갔던 게이트 안에서 저놈을 만났고요.”

윤도아가 이시결을 보며 말했다.

김지석 역시 윤도아의 시선을 따라 이시결을 살폈다.

이시결은 분명 붙잡혀 있는 입장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여유가 넘쳐보였다.

가만히 이시결을 바라보던 안세인이 물었다.

“정말 당신이 오진서 각성자를 죽인 건가요?”

이시결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닥 재미는 없었습니다. 뭐, 그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재미라고?”

주선오가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시결의 시선이 주선오에게 꽂혔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무언가를 망가트리는 이유는 재미도 한 몫 하지 않나요? 물론 망가트리는 것 자체에 흥미가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더 크고 강한 걸 망가트려야 저도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주선오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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