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한 달이 지나자 떠들썩했던 김지석의 일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하지만 기관에서 떠난 민심은 돌아오지 않았고, 김지석 역시 쉽게 그 일을 떨쳐내지 못했다.
김지석의 보호를 위해 한동안 그 곁에 머물렀던 주선오가 보기에도 김지석의 후유증은 꽤나 컸다.
업무를 보다가도 순간 멍해질 때가 많았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들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 분란을 일으켰던 미등록들도 더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기관에 대한 공격도 없었고 김지석에 대한 위협도 없었다.
‘그놈의 말대로 별 볼 일 없는 각성자들인 건가?’
그렇다기엔 주선오는 기묘한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크게 터트리기 전 힘을 축적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적중했다.
* * *
벙커에서 두 슬라임과 함께 몸을 풀던 중, 주선오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동안 게이트를 닫는 대신 김지석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주선오였기에 혹시나 무슨 일이 또 생긴 건가 싶었다.
나는 두 슬라임의 공격을 물린 후 전화를 받았다.
“응.”
[바쁘세요?]
“아냐. 얘기해. 혹시 이사님한테 무슨 일 생겼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형은 괜찮아요. 그런데 기관에 국정원장이랑 송민구 의원이 찾아왔었습니다.]
송민구라면 현재 여당의 당대표이자 지지율이 가장 높은 국회의원이었다.
‘그런 사람이 국정원장과 함께 기관을 찾았다고?’
나는 앞에서 투닥거리는 두 슬라임을 조용히 시켰다.
“왜?”
이유를 묻긴 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미등록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의원 아들이 납치당했다고 하더군요. 분명 방에 있었는데 한순간 사라졌다고요. 쪽지 한 장만 남겨둔 상태로요.]
“어떤?”
나는 레부와 모부를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게 했다.
[미등록이라는 걸 알리고 자신들의 말에 따르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아들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써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요청이 아닌 명령이었을 터.
하지만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그래서 기관에 미등록을 찾아달라고 요청한 거야?”
주선오가 혀를 차고는 말했다.
[강요였습니다, 사실. 당연히 해 줘야한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걸 받아들였어?”
[제가 그 자리에 있긴 했지만 기관의 일에 발언할 위치가 아니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관장님이랑 이사님은 거절하지 못했고요.]
‘역시나.’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이라면 정부는 앞으로도 똑같은 짓을 반복할 거다.
각성자가 저지른 일을 각성자에게 수습해달라고 하는 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국정원장의 방식이 잘못됐을 뿐.
[이사님이 누나한테 따로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제가 연락드렸습니다. 이대로 뒀다가는 계속 이용만 당할 것 같아서요.]
주선오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나는 곧장 벙커를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금 관장님이랑 이사님 다 계셔?”
[관장님은 나가셨어요. 이사님은 계십니다.]
“알겠어. 바로 갈게.”
나는 곧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기관으로 이동했다.
금세 기관에 도착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이사실에 들어섰다.
김지석에게는 딱히 연락을 하지 않고 찾아온 것이었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던 김지석이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아 씨?”
나는 김지석의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거절하세요.”
“…네?”
김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조금 전에 그 의원 부탁, 거절하세요.”
내 말에 김지석의 시선이 소파에 앉은 주선오에게 향했다.
주선오가 내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을 깨닫고 주선오를 나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주선오는 태연하게 김지석의 눈빛을 마주했다.
살짝 한숨을 내쉰 김지석이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일단 앉으세요.”
내가 소파에 앉자 김지석 역시 그 앞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거절하기가 조금 애매했습니다. 아무래도 기관이 정부 소속이기도 하고 정부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보니….”
나는 김지석의 말을 끊었다.
“이사님. 제가 기관 소속 될 때 했던 얘기 잊지 않으셨죠?”
김지석이 멈칫했다.
나는 기관에 소속되는 조건으로 기관의 실권을 나에게 넘기라고 했었다.
아마 지금까지는 딱히 기관을 제어할 일이 없었기에 말을 하지 않았었지만 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했다.
“말씀드렸죠. 제가 기관 일에 참여할 때는 무조건 제 말에 따라달라고.”
분명 그 당시에 안세인과 김지석 모두 흔쾌히 허락을 했었다.
김지석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기관은 정부 소속이지 그 의원이나 국정원의 명령을 들어야 할 위치는 아닙니다. 독자적인 기관이라고요.”
분명 김지석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힘 있는 위치의 사람들, 게다가 사람이 납치를 당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약해졌으리라.
역시나 김지석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나중에는 이것보다 더 심한 명령을 내릴 수가 있어요.”
그러다보면 회귀 전과 같이 많은 각성자들이 성장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희생이 될 일도 생길 것이다.
‘기관에 들어온 이유가 그걸 막으려는 거였으니까.’
지금부터 자리를 제대로 잡아야 했다.
기관이 그들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실행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려줘야 했다.
앞에서 주선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내 생각도 같아. 그 자리에서는 내가 기관 사람이 아니라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나였다면 바로 거절했을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더 심한 명령이 내려졌을 때 기관 소속 각성자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회귀 전처럼 그 때문에 기관을 나가버리는 각성자들이 많아질 수도 있었다.
현재 권재경도 조금씩 기관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아마 조만간 기관을 나가 공포의 늑대 무리를 만들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그 명령은 거부하세요. 대신 정식 절차를 밟아서 요청하라고 하세요.”
김지석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정식 절차요?”
“네. 어쨌든 각성자가 저지른 일이니 각성자가 나서는 게 맞긴 해요. 하지만 이렇게 절차를 무시하는 걸 그냥 둬서는 안 됩니다.”
확실한 절차가 필요했다.
정부가 기관을 아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잠시 책상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김지석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했네요. 관장님이 돌아오시면 말씀드리고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김지석은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거절과 함께 정식 절차를 밟아 요청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국정원장은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어찌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기관이 자신의 휘하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선오가 잔뜩 의구심을 품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지난번에 이시결이 잡혔을 때. 그놈은 분명 미등록들이 별 볼 일 없는 집단이라고 했어요.”
“그랬죠.”
김지석 역시 그 자리에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라면 그놈이 잡힌 시점에서 미등록들은 숨죽이고 있어야 해요. 지금까지처럼요. 대신 행동해주던 이시결이 잡혔는데 뭘 믿고 행동을 취한단 말입니까.”
“아…. 그렇네.”
김지석이 주선오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놈들은 오히려 지지율이 높은 여당 당대표의 아들을 납치했어요. 그렇다는 건 이시결이 모르는 다른 상당한 실력의 미등록들이 있다는 거 아닐까요?”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시결이 미등록에 완전히 발을 들이지 않은 만큼, 미등록 쪽에서도 이시결에게 모든 정보를 내보이지는 않았다.
‘치밀한 놈들이란 말이야.’
이시결이 알고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그랬다면 미등록들이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터.
게다가 방에 있던 사람을 순식간에 납치하는 특성이라면 그것도 꽤나 유니크한 특성이었다.
다만 그런 각성자들이 왜 미등록의 무리와 함께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럴 거야. 놈들도 이시결한테 모든 걸 오픈하지는 않았겠지. 그놈이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잘 알았을 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의원님의 아들을 납치한 걸까요?”
김지석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
“그게 미등록들의 목적과 연관이 있는 걸 텐데….”
“그건 잡아서 물어보면 확실하겠지. 어쨌든 정식 요청을 하라고 하면 그쪽도 별 수 없이 다시 요청을 해 올 테니까. 조용히 알아보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주선오가 내 동의를 구하듯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미등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납치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분명 뭔가 더 일으키겠죠. 어찌됐든 미등록들의 소재를 파악해두는 건 나쁘지 않아요.”
“네. 일단은 미등록들이 갈만한 외진 게이트들 감시를 강화해야겠습니다. 추적 관련 특성이 있는 각성자들에게도 좀 부탁을 해 봐야겠고요.”
김지석이 빠르게 일처리를 시작했다.
사실 미등록의 위치는 최은서에게 들어서 대충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최은서의 정보를 넘기기엔 아직 일렀다.
최은서가 그곳의 정보를 캐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최은서는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미등록에게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러면 더 이상 정보는 빼내지 못해.’
아직 미등록들을 정리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기관 소속 각성자를 죽인 것은 이시결의 독단적인 행동이었고 김지석을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미등록들이 인정을 하지 않았기에.
내가 미등록을 지금 정리해버린다면 오히려 내가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지도 몰랐다.
최은서는 그 전까지 그곳에서 명분과 함께 미등록들의 정보를 파악해야했다.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진 각성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계획을 갖고 어떻게 움직이려는 건지.
“혹시 다른 각성자들을 공격하거나 할 가능성도 있을까요?”
주선오가 물어왔다.
“이시결이야 경매 때문에 독단적으로 기관 소속 각성자를 죽였고, 이사님이야 위치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공격을 안 한다고 장담은 못하겠지, 아무래도.”
내 대답에 주선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힘을 합쳐서 게이트를 닫아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런 짓을 벌이는 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회귀 전 미등록과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혔던 건 주선오였다.
이제서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시발점은 김지석이었을 것이다.
회귀 전에는 게이트에 따라 들어온 미등록 때문에 김지석이 크게 다쳤을 것이다.
‘지금은 있는 방탄복과 방어구가 없었으니까.’
그때는 아직 놀 사체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전이었다.
큰 부상 때문에 김지석이 살아나와 기관에서 자취를 감췄음에도 미등록의 언론 플레이는 없었다.
어쨌든 기관에서 김지석을 떨어트려 놓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신 주선오가 놈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주선오에 의해서 무리가 해체되었다.
그에 김지석 역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등록을 안 하는 게 불법은 아니라서 제지를 할 수가 없네요.”
“그렇게 그냥 있었다면 부딪힐 일이 없으니까 지금보다야 상황이 나았겠죠. 하지만….”
주선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와 같은 뜻을 가진 각성자들을 건드린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경우 주선오는 회귀 전처럼 망설임 없이 미등록에게 칼을 겨눌 터였다.
그렇게 되면 개의 이빨 무리 전체가 미등록에 맞서다시피 할 테고.
절대로 피해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건 최대한 막아야해.’
* * *
며칠 후 국정원장은 기관에 정식으로 미등록에 대한 추적을 요청해왔다.
기관은 국정원장의 정식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지석이 말했던 대로 게이트의 감시 강화 등 미등록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미등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게이트에 입장하지 않고 숨죽여 지냈다.
덜미가 잡히지를 않으니 추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골머리를 썩은 지 일주일.
이번에는 송민구 본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