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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92화 (93/201)

제92화

“그렇군요.”

다음날, 문기훈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지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지희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전해준 김지석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남편을 믿나요?”

잠시 한지희의 눈을 마주하던 김지석이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문기훈 씨는 범죄를 저지른 각성자기 때문에 감시를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사람을 붙여둔 것은 아니었다.

기관에는 그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감시 방법이 있었다.

최은서의 특성을 이용한 것.

문기훈을 구성원으로 만든 후, 문기훈에게 성문 공유 스킬을 걸어두어 어디서든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문기훈이 지닌 위치추적기에 감시의 눈을 붙여 문기훈이 있는 곳의 상황도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남편의 속죄겠죠.”

한지희가 살짝 시선을 떨구었다.

“남편이 송민구 부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죽인다는 걸 꺼려하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게 저였죠. 제대로 목표를 이루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으니까요.”

문기훈은 떠나기 전 김지석과 미등록 때문에 피해를 입은 각성자들에게 모두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용서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진심어린 사과였지만 대부분은 부부를 용서하지 못했다.

김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김지석은 눈을 질끈 감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김지석에게 한지희가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같은 일을 반복했을 거예요.”

한지희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송민구와 그 아들의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건 오히려 우리에 대한 모독뿐이었어요.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까지 심한 말들을 퍼붓더군요. 그런 와중에 남편이 가호를 받았어요. 당연히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죠.”

한지희가 손에 쥔 목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우리는 힘으로라도 그놈에게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어요. 진심어린 사과를요. 그래서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모았어요. 약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바꿔 보려고요.”

한지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손등으로 눈물을 슥 닦아낸 한지희가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모은 사람들이지만 그중에는 위험한 사람들도 많았어요. 남편도 걱정되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나보다 더 악에 받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진지한 충고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희는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모든 전달을 마쳤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김지석이 물었다.

“…왜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셨습니까?”

한지희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김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기관도 송민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죠. 정부나 사회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저희는 이미 한 차례 거부당했으니까요.”

김지석은 고개를 떨궜다.

반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기관은 국정원장을 등에 업은 송민구의 말에 계속 휘둘렸을 테니까.

나는 김지석과 함께 한지희가 있는 방을 벗어났다.

우리가 방에서 나오자 유지은이 철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갔다.

“고생 많으셨어요.”

내 말에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던 김지석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분명 한 게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 뻔했다.

나는 김지석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뇨. 그때 이사님이 잘 버텨 주셨기 때문에 기관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거예요. 고생하셨어요.”

입을 다문 김지석이 곧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평상시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내게 물었다.

“이시결 씨 만나본다고 하셨죠?”

“네.”

“그럼 전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김지석이 내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아마 김지석은 미등록 각성자의 사건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았고 죽음을 보았으며 무력감을 느꼈을 테니까.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시결이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내부를 감시하기 위해 뚫어놓은 철문의 틈 사이로 간이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이시결이 보였다.

오늘 기관에 온 이유 중 하나.

이시결이 나와의 독대를 요청해 왔다.

상당히 적응을 잘 했는지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슬슬 이곳에 갇혀있는 것이 좀이 쑤실 터.

대충 이시결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 선 유지은에게 물었다.

“이시결은 어때요?”

안에 있던 이시결이 나를 발견하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별 문제 없습니다. 초반에 감기가 심하게 걸렸던 걸 빼면요.”

유지은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나와 싸우기 전과 후 거하게 장맛비를 맞은 탓인 것 같았다. 체력이 그리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독대 요청 때문에 오신 거 맞으시죠? 열어드리겠습니다.”

유지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은은 이시결이 갇힌 방의 철문 자물쇠를 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시결이 책을 덮고는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좋아 보이네.”

이시결이 피식 웃었다.

“뭐, 나쁘지는 않군요. 이렇게 사는 것도. 장갑만 마음대로 벗을 수 있게 해준다면 더 좋을 텐데 말이죠.”

그가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까만 장갑이 끼워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며 말했다.

“널 어떻게 믿고? 그걸 벗으면 바로 공격을 할 것 같은데.”

이시결이 다시 웃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았다.

“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지요. 혹시 압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 동안 순한 양이 됐을지도요.”

이시결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찾은 거지?”

“급하시네요.”

“범죄자랑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나 할 시간은 별로 없어서 말야.”

이시결이 작게 웃었다.

“보아하니 미등록 각성자들의 정리는 끝난 것 같던데요.”

“대충.”

“그러면 저를 이곳에 가둬 둘 이유가 더 이상 없는 것 아닙니까?”

이시결은 내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잡아온 이유가 본인에게서 미등록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미등록들의 일은 정리가 됐고 남은 건 문기훈이 처리해야할 일이었다.

“그건 그렇지.”

기관에서도 사람을 죽인 위험인물을 계속 이곳에 둬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네가 위험인물이라 사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도 하고 말야.”

내 말에 이시결이 입을 가린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가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흠…. 제가 죽게 되면 윤도아 씨가 관심을 가졌던 아이템 도감도 함께 사라질 텐데요.”

귀속자가 죽으면 귀속 아이템 역시 사라진다.

하지만 약간의 의문이 생겼기에 나는 최초의 책 서고지기를 불렀다.

‘서고지기.’

<말씀하십시오.>

‘아이템 도감의 귀속자가 죽게 되면 도감은 아예 없어지는 거야?’

<그렇습니다.>

‘서고로 되돌아오게 할 방법은?’

<귀속자의 동의를 얻어 귀속 해제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서고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서고지기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귀속 해제 아이템이라니.

그것을 얻기란 게이트의 출구를 열 수 있는 차원 균열의 파편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극악의 확률로 그것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귀속 해제를 하려면 귀속자의 동의를 얻어야했다.

‘저놈이 동의해줄 리가 없지.’

이시결한테서 아이템 도감을 받아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했다.

나는 서고지기와 대화를 마친 후 이시결에게 말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겠네.”

이시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요.”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나는 볼일이 끝났다면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벽에서 몸을 떼었다.

“윤도아 씨.”

이시결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이시결이 내게 거래를 제안해왔다.

나는 일단 이시결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들어보고 판단하지.”

“저를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뻔뻔스러운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시결다웠다.

잡힐 당시에는 자신을 놓으면 바로 공격을 할 거라 호언장담했던 놈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갇혀 계속 생각을 해본 결과, 놈은 지금의 상태로는 나를 절대 죽일 수 없을 거라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결국 놈은 나를 죽이려면 자신의 실력을 더 쌓아야 할 것이라 판단했을 테고.

그러기위해서는 이곳을 벗어나 게이트를 더 돌아야 했다.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반응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우습겠지요.”

“맞아. 우습네.”

이미 각성자 한 명을 죽인데다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는 건 이시결이 나를 우습게 봤거나, 혹은 내게 복종할 의사가 있거나였다.

‘후자겠지.’

나는 속으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고개를 갸웃하며 이시결에게 물었다.

“왜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거지?”

“윤도아 씨라면 기관과 정부를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뭘 믿고? 만약 내가 위쪽에 이야기를 해서 너를 풀어준다고 쳐. 하지만 네가 사고를 치면 모조리 내 책임이 될 텐데? 난 그런 밑지는 장사는 좋아하지 않아.”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내가 혹할만한 조건을 제시하라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이시결이라면 내 말 뜻을 금방 파악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을 미리 예상했던 건지 이시결이 바로 이야기했다.

“아이템 도감을 윤도아 씨한테 공유해준다면 어떻습니까?”

그가 제안을 해왔다.

나는 잠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내가 랭킹 1위의 각성자이고 이시결을 잡아온 장본인이라고는 해도 마음대로 놈을 풀어달라 요청할 수는 없었다.

놈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내 통제를 확실히 따르겠다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시결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 뿐?”

내 물음에 이시결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말에 따르도록 하죠.”

드디어 놈의 입에서 내가 원하던 말이 나왔다.

하지만 저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이곳에서 나간다면 분명 마음이 변할 텐데.”

“당신은 충분히 저를 제압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어기면 절 어떻게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이시결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내 말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다만 놈은 분명 딱 한 번, 내 말을 어길 것이다.

자신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판단하는 순간.

그때는 다시 나를 공격해올 것이고 내가 죽거나 혹은 그가 죽거나.

이시결은 오직 그 순간만을 보고 나에게 이런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시결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허울뿐이야. 겨우 그 말 하나로 위쪽 사람들을 설득하라고?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건 힘들어.”

“흠.”

이시결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서약을 걸겠습니다.”

그가 조금 꺼림친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약?”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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