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네. 아이템 중에 서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살짝 한숨을 내쉰 이시결이 설명을 이었다.
“딱 한 가지 맹세가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한 차례 회귀를 했음에도 처음 듣는 아이템의 이름이었다.
‘그런 아이템도 있었구나.’
아이템 도감에서 살펴본 아이템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역시 탐난단 말야.’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이시결이 이어 설명했다.
“만약 그 맹세를 어기게 되면 서약자에게 그만큼의 대가가 주어지는 리스크가 있지만요.”
“대가?”
“네. 대가는 서약자의 맹세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시결이 웃으며 설명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설명에 나는 다시 서고지기를 불렀다.
‘서고지기.’
<네.>
‘서약 아이템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
<마침 제 서고에 서약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있군요.>
서고지기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설명.’
<서약은 A급 아이템입니다. 딱히 형태가 있는 아이템은 아닙니다. 투명한 물방울 같이 생겼지요. 하지만 절대 증발하거나 흡수되지 않습니다. 사용 방법은 서약자가 맹세를 하고 서약을 삼키면 됩니다. 다만 맹세의 내용은 정확해야 합니다. 만약 그 맹세를 어기게 된다면 서약자에게 맹세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집니다.>
이시결이 내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서고지기가 전해준 서약의 설명 역시 같은 내용이었다.
‘대가에 대해서 더 자세한 건?’
<몇 가지 예를 들어드리지요. 서약자가 어떤 대상의 목숨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면 그 대가는 서약자의 목숨이 됩니다. 서약자가 어떤 대상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그 대가는 서약자의 다리가 됩니다.>
‘다리?’
<접근에 대한 맹세를 어겼으니까요.>
상당히 직관적인 대가였다.
‘그럼 말에 따르겠다는 맹세에 대한 대가는?’
<맹세의 내용은 더 정확해야 합니다. 두루뭉술해서는 안 되지요.>
‘정확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말에 따른다는 것은 사실 애매한 내용이었다.
이것이 서약이 되어버리면 조건 없이 상대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 터.
그런 건 맹세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다시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어떤 걸 맹세하겠다는 건데?”
이시결은 그것까지 미리 생각해뒀던 듯 곧바로 말했다.
“당신의 허락 없이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겠다, 라는 건 어떨까요?”
크게 나쁘지 않은 맹세였다.
저 맹세가 있다면 이시결은 사람을 공격할 수 없다. 하지만 게이트에서 몬스터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을 테고.
내 허락 하에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면 박성현의 무리와 대적할 때도 이시결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서고지기에게 물었다.
‘저 말에 대한 대가는?’
<공격한 대상이 입은 피해만큼의 대가가 주어집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긴 맹세를 서약자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대가였다.
이시결도 그 맹세에 대한 리스크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맹세를 어긴다고 해도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생각하면 경상을 입히는 정도로 끝날 것이다.
‘나쁘지 않네.’
“좋아. 그래서 그 아이템을 갖고 있어?”
내 물음에 이시결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저에게는 없습니다.”
조금 기가 찼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물론 내가 놈을 이용하려면 그걸 얻어오는 편이 좋긴 했다.
하지만 이놈은 대체 뭘 믿고 내가 그것을 구해다 줄 것이라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나보고 그걸 구해 와라? 내가 그걸 구하는데 시간을 써서까지 너를 이곳에서 빼낼 이유가 있어?”
“물론 저도 제가 직접 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잖아요?”
이시결이 정말 아쉽다는 듯한 표정과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벽에 기대 있던 몸을 떼었다.
‘돌아가자.’
“윤도아 씨.”
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목적은 다르겠지만 당신 역시 강해지는 것을 갈구하고 있지 않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긍정의 침묵이었다.
이시결의 말대로 내게는 목적이 있었다.
회귀 후 끊임없이 게이트를 닫고 있는 이유. 최대한 도움이 될 각성자들을 살려내고 있는 이유.
나를 죽게 만들었던 첫 번째 시험을 이겨내고, 그 너머를 보기 위함이었다.
‘모든 시험을 돌파하는 것.’
그게 나의 목적이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는 회귀 전 랭커들이 오만의 그리폰의 날갯짓 한 번에 모두 죽어버렸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시험, 혹은 그 이상의 시험에서라면.
‘…아직도 멀었어.’
잠시 멈춰선 나를 보며 이시결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닫혀 있던 철문을 열었다.
닫히는 철문의 뒤로 이시결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해 주세요. 저는 당신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될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쿵.
철문이 닫히며 이시결의 목소리 또한 끊겼다.
나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지은에게 말했다.
“잠가주세요.”
“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이시결의 부탁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놈은 첫 번째 시험, 그리고 그 너머의 시험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본인 스스로 내게 자신을 제어할 방법을 던져주었다.
‘그렇다면 놓칠 수야 없지.’
놈을 내 밑에 두고, 확실하게 이용해주어야겠다.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서고지기에게 물었다.
‘서약은 어디서 구할 수 있어?’
<물 슬라임에게서 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멈칫했다.
‘물 슬라임?’
<그렇습니다. 물 슬라임은 다른 슬라임들과 다르게 서약과 맹세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물 슬라임이라면 나중에 한 마리 정도 잡아둘 생각이긴 했다.
레부와 모부를 잡아두고 불과 모래를 언제든 공급받을 수 있는 것처럼 물 또한 항상 공급받을 수 있으면 편리하니까.
게다가 서리를 보관할 슬라임으로도 아주 제격이었다.
서리는 언제 어느 게이트에서 난쟁이를 만날지 몰랐기에 항상 들고 다니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서리를 들고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레부와는 상극이었고 모부와도 그리 상성이 좋지는 않았다.
결국 서리를 보관할 수 있는 것은 물 슬라임.
‘물 슬라임을 잡아두는 김에 서약도 얻어내면 좋겠어.’
하지만 물 슬라임을 만날 게이트가 언제 어디에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박성현이 각성을 하는 건 늦어도 내년 중순 이전.
그때 이시결을 이용하려면 그전까지는 물 슬라임을 만나야했다.
한동안 미등록들 때문에 게이트에 많이 가지도 못해서 특성의 옵션들이 성장을 멈춘 상태였다.
‘당분간은 게이트 닫기에 집중해야겠군.’
그러면서 물 슬라임을 만나게 된다면 더욱 좋을 터.
그때까지는 이시결을 그냥 그대로 두어야 할 것 같았다.
* * *
[잠적한 미등록 각성자 신상 공개… 목격 시 즉시 각성 기관에 연락 요망]
[남은 미등록 셋, 기관 추적 중…소재 파악 힘들어]
“와. 저건 찾기 힘들겠네.”
옆에서 내 핸드폰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던 윤도빈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문기훈 씨도 결국 못 찾아서 잠깐 복귀해 있는 상태고.”
나는 보고 있던 인터넷 창을 닫았다.
문기훈은 가을 동안 잠적한 미등록 각성자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거나 혹은 무력으로 제압해 기관으로 데려왔다.
이후 남은 미등록은 셋. 그들은 거의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미등록 각성자들의 사건 이후 잠깐 정부가 시끄러웠지만 그것도 잠시 뿐, 소란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기관 역시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도 다시 게이트 닫기에 집중했지만 아직 물 슬라임을 만나지는 못한 상태였다.
내가 기관의 사이트에 접속하자 윤도빈이 물었다.
“오늘도 게이트?”
나는 턱을 괸 채 게이트 현황을 살피며 대답했다.
“가야지.”
“요새 다시 열심히 다니네? 저번 주에도 한 세 개 닫지 않았어?”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등록 각성자의 일이 마무리된 후 그동안 못 간 게이트를 몰아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별로 성에 차지는 않지만.’
내가 가는 게이트는 대부분 A급 이상이었다.
C급과 B급은 가호자나 다른 일반 각성자들에게 양보하는 편이었다. 그들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가야 했고 급이 낮은 곳에 가봤자 얻는 보상도 적었다.
그럴 바에는 보상이 조금이라도 큰 A급 이상의 게이트를 가는 것이 시간상으로도 훨씬 이득이었다.
다만, A급 이상의 게이트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나 혼자 독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각성자들 역시 실력을 키우려면 S급의 게이트를 가야했다.
특히 어느 정도 성장이 된 주선오나 윤도빈같은 랭커들은 높은 급의 게이트를 닫는 것이 필수였다.
이런 걸 생각하면 땅덩어리가 좁은 것이 조금 아쉽기까지 했다.
‘다른 나라의 게이트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번에도 지방으로 갈 거야?”
윤도빈이 다시 물어왔다.
다른 각성자들의 성장을 위해 나는 최대한 다양한 지역의 게이트를 닫아왔다.
대부분 실력 있는 각성자들은 수도권이나 큰 도시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주로 찾는 곳은 각성자의 수가 적거나 접근이 힘든 오지였다.
지난주에도 부여와 군산,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섬까지 다녀왔다.
“아니. 지난주에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그냥 근처로 가려고.”
사실 아직도 피곤이 덜 풀린 상태였다.
그래도 게이트에 가서 몸을 움직이다보면 자연스럽게 풀리기 마련.
“힘들면 그냥 좀 쉬지.”
윤도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각성자들도 있잖아. 물론 누나랑 비교할 실력의 각성자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누나가 다 떠맡으려고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나는 피식 웃었다.
윤도빈은 내가 사람들을 위해서 게이트를 닫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했지만 사실 사람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네 걱정이나 하세요.”
나는 윤도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윤도아 고집. 조심히 다녀.”
잔소리를 해대는 윤도빈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준 나는 겉옷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날이 꽤 쌀쌀했다.
근처의 게이트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오토바이를 타고 갈 거리는 아니었다.
‘차라도 하나 사야 하나.’
차가 없으니 먼 거리를 이동하기에는 영 불편했다.
대중교통을 타게 되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게이트에 가기 전에 지쳐버리니 탈 수가 없었다.
쩝 입맛을 다신 나는 택시를 불러 파주로 향했다.
* * *
S급 종합 보상 게이트의 근처에 도착한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구형의 검은 연기.
‘누가 벌써 입장을….’
나는 웬만하면 다른 사람이 입장한 게이트에는 들어가지 않으려는 주의였다.
누구든 함께 들어가게 된다면 아무래도 보상이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누가 입장 해있는 것을 보니 괜히 게이트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좀 짜증나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들어가든 아니든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게이트의 내용이나 보자 싶었다.
게이트의 앞에 서자 게이트가 벌어지며 중앙에 안내문이 떠올랐다.
나는 안내문은 제끼고 여우 구슬로 정보를 살폈다.
‘정보 확인.’
[S급 종합 보상 게이트]
[물 슬라임의 서식지가 있는 종합 보상 게이트입니다.]
‘물 슬라임!’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물 슬라임이 있는 게이트를 발견한 것이었다!
비록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혹시나 내가 이러고 있는 사이 게이트가 클리어될까 불안했다.
한 번 클리어가 된 게이트에는 아직 안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았더라고 해도 더 이상 입장할 수가 없었다.
‘다른 보상을 얻지 못하더라도 물 슬라임은 꼭 만나야 해.’
나는 곧바로 게이트에 입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