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다행히 나는 무사히 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보를 보지 않고 들어온 바람에 조금 당황했다.
‘물 속….’
게이트는 물속이었다.
아무래도 물 슬라임의 서식지라 설마 싶었는데 진짜 물속이라니.
다행히 게이트의 특성 상 물속에서도 숨은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이곳에서는 심연의 불꽃을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레부를 불러낼 수도 없었다.
모부 역시 불러내도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성가시네.’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피어올라 위로 떠올랐다.
내가 있는 곳은 수중 동굴이었다.
동굴의 천장 사이사이에서 떨어지는 빛이 주변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빛을 받은 바닥에는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중구난방으로 쌓여 있었다. 천장이 무너지며 떨어진 돌 같았다.
빛이 떨어지는 곳 이외에는 사물이 식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탐지로 주변을 살펴보니 동굴은 넓고 길었다.
중간중간 동굴의 천장과 바닥을 잇는 석주들이 있었다.
이곳저곳 구멍이 난 천장에는 비죽비죽한 종유석들이, 돌덩이가 없는 바닥에는 석순들이 오돌토돌하게 자라 있었다.
‘얼추 주변 파악은 됐는데….’
이곳에는 나밖에 없었다.
작은 물고기들은 있었지만 물 슬라임이나 다른 각성자는 탐지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
살짝 뒷목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물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분위기에 조금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깊은 물 속, 그것도 수중 동굴이라 주변이 밝지도 않았다.
게다가 움직임 또한 상당히 불편했다. 무언가 내 온몸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는 느낌.
‘별로군.’
이런 느낌 때문에 물속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내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냈다.
‘빨리 잡아서 나가야겠어.’
나는 일단 동굴을 따라 이동해보기로 결정했다.
도약을 하자니 그닥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천장에 솟아난 종유석들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간 그대로 꿰일지도 몰랐다.
주변이 물로 가득 차 있어서 블링크를 사용하기에도 애매했다.
나는 결국 천천히 걸어서 이동하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속을 걷는 내 주변으로 작은 물고기 떼가 지나갔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물고기 떼를 구경했다.
‘…신기하긴 하네.’
그때 앞쪽에서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앞을 바라보며 그림자 단검을 뽑아들었다.
‘돌고래?’
작은 돌고래 같은 형태가 탐지되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것을 살폈다.
곧 그것이 쏟아지는 빛의 아래를 지났다.
돌고래가 아니었다.
돌고래의 형태를 갖고 있긴 했지만 몸이 투명한 젤리 같은 느낌의 무언가였다.
‘저건….’
그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물 슬라임!’
물 슬라임은 다른 슬라임과 달리 사람들이나 다른 몬스터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순했다.
그래서 나는 물 슬라임이 빠르게 다가옴에도 그림자 단검을 집어넣었다.
단검 때문에 이놈이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성가셔진다.
내 앞에 도착한 투명한 젤리 돌고래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살폈다.
그러더니 곧 입을 뻐끔거렸다.
“도와줘!”
“…뭐?”
물속이라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돌고래가 내 등 뒤로 이동하며 말했다.
“우부 좀 도와줘!”
“우부?”
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돌고래가 앞의 양 지느러미를 움직여보였다.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우부!”
“널 도와달라고?”
돌고래의 고개가 크게 끄덕였다.
물 슬라임을 돕는 것이 이 게이트의 클리어 목표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목표라고 해도 순순히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도와주는 건 일단 이놈한테 얻어낼 걸 얻어내고 나서.’
“도와주면 넌 나한테 뭐 해줄 건데?”
내 물음에 돌고래의 고개가 천천히 양쪽으로 갸웃거렸다.
“푸?”
“난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데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서.”
내가 팔짱을 끼며 우부를 바라보았다. 물속이라 펄럭거리는 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럼 우부한테 뭘 받고 싶어? 우부한테 바라는 게 있어?”
우부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 서약 갖고 있어?”
그러자 우부의 돌고래 입이 활짝 벌어졌다.
“서약? 우부 서약이 필요해?”
이상하게 기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맞아.”
그에 우부가 가슴지느러미를 움직여 서로 부딪혔다. 느릿느릿 박수를 치는 것 같았다.
“우부 서약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우부, 환영이야! 푸푸푸푸!”
‘…왜 기뻐하는 거지?’
물 슬라임이 서약을 중시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서약을 달라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것이 조금 의심스러웠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건가 싶었다.
나는 확인을 위해 우부에게 다시 물었다.
“줄 수 있어?”
“줄 수 있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우부의 투명한 돌고래 몸 속에서 무언가 동그란 것이 뽁 생겨났다.
서고지기의 말로는 서약이 물방울 같다고 했었다.
‘그럼 저게 서약?’
그런데 한 개가 아니었다.
“얼마나 필요해? 우부 서약 줄게!”
서약은 기포처럼 우부의 몸속에 우수수 피어났다.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물 슬라임 하나가 생성할 수 있는 서약의 수에는 제한이 없는 모양이었다.
‘우부를 잡아간다면 서약도 마음껏 이용할 수 있겠어.’
하지만 지금은 일단 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씩 웃고는 우부를 향해 말했다.
“좋아. 도와줄 테니까 이따가 서약 한 개만 내어줘.”
우부를 사로잡는 것은 클리어 이후의 문제였다.
우부가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푸푸푸, 좋아!”
생각보다 수월하게 서약을 얻게 되었다.
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더라도 레부나 모부에게 했던 것처럼 뜯어냈겠지만.
나는 다시 우부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걸 도와주면 돼?”
그때 우부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푸! 온다, 온다!”
그리고는 호들갑스럽게 물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온다고?’
나는 다시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우부가 온 방향에서는 아무것도 탐지되지 않았다.
그때.
쿠우우웅—!
묵직한 굉음이 느껴졌다.
동시에 동굴의 천장이 크게 흔들렸다.
“푸푸푸, 왔다!”
우부가 즐거운 듯 웃으며 외쳤다.
레부, 모부와 마찬가지로 웃음소리가 상당히 독특한 녀석이었다.
더구나 도와달라고 해놓고 무언가 왔다고 즐거워하며 웃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슬라임들이란.’
속으로 혀를 찬 나는 여전히 흔들리는 동굴의 천장을 살폈다.
무너지거나 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굉음이 들려왔던 곳도 내가 있는 곳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쪽으로 가 보기 위해 우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굉음 난 곳으로 안내해 줘.”
“푸푸, 좋아!”
우부가 내게 다가오더니 머리를 내 손에 부볐다.
나는 우부의 등지느러미를 잡았다. 말랑말랑한 젤리를 잡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자 우부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지만, 그 속도를 온몸으로 받아내자니 수압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그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앞에서 다시 한번 굉음이 들려왔다.
쿠구구구——!
동굴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 같았다.
“푸, 무너진다!”
우부가 화들짝 놀라며 급 유턴을 했다.
나는 우부의 지느러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양손에 한껏 힘을 주었다.
우부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멈춰, 우부!”
내 말에 우부가 급격히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뒤쪽에서 거대한 물살이 밀려왔다.
“푸푸푸푸, 우부 밀린다!”
나는 우부의 지느러미를 꽉 잡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위쪽에 쌓여 있던 것 같은 흙들이 동굴 아래로 쏟아졌다.
그 무너짐은 주변으로 물들을 밀어냈고 그 물살이 우리에게 밀려든 것이었다.
무너지는 동굴의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 덕분에 주변이 환해졌지만 그닥 좋아할 상황은 아니었다.
천장을 무너트리고 동굴의 바닥을 내리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붉은 가죽을 가진 꼬리 지느러미였다.
“저게 뭐야?”
내 물음에 우부가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푸푸, 어린 레비아탄!”
덕분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레비아탄이라니.
‘어린’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놈들의 사이에서 어린 것일 뿐.
사람이 보기에는 어린 놈이라도 흰수염고래 성체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동굴을 내리친 두툼한 꼬리지느러미만 봐도 그 크기가 대충 짐작되었다.
탐지로 동굴 밖을 살펴보니, 역시나.
적어도 30미터는 되어 보이는 놈이었다.
‘저놈을 잡아야하는 건가?’
나는 잠시 냉정하게 주변의 상황을 판단했다.
물속이라 은밀한 고양이 특성을 이용한 공격은 조금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그림자 단검은 리치가 짧아서 놈이 베어보라고 꼬리를 가져다 대더라도 힘들 판이었다.
주변에서 이용할 수 있는 건 물과 마나 뿐.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레비아탄은 그새 꼬리를 거두어 들였는지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탐지로 밖을 살피니 놈은 동굴 밖에서 거대한 몸체를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을 상대하려면 일단 이 동굴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
나는 다시 우부의 지느러미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우부에게 위를 가리켜보였다.
“동굴 벗어나자.”
그러자 돌고래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부 먹히라고? 어린 레비아탄한테 잘근잘근 씹혀서 삼켜지라고? 우부 버릴 거야?”
우부의 눈빛이 처연해졌고 목소리 또한 울먹이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말하는 내용이 상당히 거슬리긴 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올라가서….”
또 하나의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한 나는 말을 멈췄다.
내가 탐지할 수 있는 거리는 현재 반경 60미터였다.
거대한 레비아탄은 동굴 밖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그런 레비아탄의 위쪽에 무언가 나타났다.
사람의 형체였다.
‘먼저 들어온 각성자인가?’
“우부,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지?”
“응. 있었어.”
“몇 명?”
“두 명.”
이곳은 가장 난이도가 높은 S급 종합 보상 게이트였다.
그런 곳을 단둘이 들어왔다면 분명 그만큼의 실력을 가진 각성자들일 확률이 높았다.
‘아직 보이는 건 한 명.’
나는 다시 레비아탄을 뒤따르는 사람의 형체에 집중했다.
곧 근처에서 또 한 명의 형체가 잡혔다.
나는 우부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어디 있어? 왜 나한테 온 거야?”
우부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푸, 우부는 레비아탄한테서 도망치느라 바빠서 모르겠는걸?”
뻔뻔한 슬라임이었다.
분명 그들에게도 도와 달라 요청했을 텐데.
왠지 그들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레비아탄은 금세 우리의 위치를 포착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꼬리 대신 앞쪽의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입은 거의 몸의 절반까지 벌어졌고 놈은 그대로 우리가 있는 동굴을 향해 다가왔다.
나는 우부의 등지느러미를 붙들며 말했다.
“우부, 앞으로…!”
그때 레비아탄을 쫓던 사람이 움직였다.
손에서 무언가 길게 뻗어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그의 몇 배 정도로 순식간에 길어졌고.
그가 레비아탄을 향해 그것을 휘둘렀다.
물속이라 빠르지는 않았지만 간결하고 정확한 동작.
“!”
조금의 문제라면 그것은 거대한 레비아탄을 두 동강냄과 동시에, 나와 우부가 있는 동굴에까지 침범했다는 것이었다.
동굴의 천장을 뚫고 길고 날카로운 것이 튀어나왔다.
칼날은 하나였지만 그 갈래는 여섯 개.
여섯 개의 칼날 갈래가 부드럽게 동굴의 천장을 그었다.
그 틈을 따라 빛이 새어들기 시작했다.
멍하게 구경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갈퀴 같은 칼날 갈래가 우리의 위를 덮쳐오고 있었다.
“우부, 옆으로!”
내가 우부의 지느러미를 꽉 쥐며 외쳤다.
깜짝 놀란 우부가 곧바로 옆으로 튀어나갔다.
수압이 나를 우부에게서 떨어트리려했지만 나는 우부의 등지느러미를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칼날 갈래의 범위를 간신히 벗어났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동굴은 곧 무너질 것이다.
“위!”
다시 외치자 우부가 급하게 위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빛이 쏟아지던 천장의 구멍으로 향했다.
“푸푸푸푸!”
우부가 신이 난 듯 빠르게 헤엄치며 웃었다.
우리는 간신히 동굴 밖으로 벗어났다.
동시에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궁—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세로로 깔끔하게 잘라진 30미터 크기의 어린 레비아탄 조각들이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푸! 어린 레비아탄이 갈라졌어!”
우부 역시 감탄하며 외쳤다.
천천히 추락한 레비아탄의 조각들은 곧 무너져 내리던 동굴의 위에 착지했고, 그것들은 동굴의 무너짐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쿠구구구구——
굉음과 함께 물속에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감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레비아탄을 산산조각을 냈다는 것이 놀라울 다름이었다.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시선을 돌려 위쪽에 떠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역시 동굴에서 우부와 함께 빠져나온 나를 발견하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도아 누나…?”
역시 주선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