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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97화 (98/201)

제97화

내가 크라켄의 앞에 도착하자 놈 역시 서서히 몸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몸 중간이 크게 물어뜯겨 있는 것이 레비아탄에게 상당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그래도 등이 터진 레비아탄을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나보네.’

하지만 그 싸움 때문에 크라켄도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주변에 마나창 수십 개를 만들어냈다.

‘마나창.’

평소에 만들던 것과는 달랐다.

내 몸만큼 두껍고, 길이도 내 키보다 두 배는 더 기다란 마나창이었다.

창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말뚝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평소에 만들던 창으로는 저런 놈에게 생채기조차 입히기 힘들었다.

수면 위로 솟아난 크라켄의 붉은 동공이 내게 꽂혔다.

우우우우웅——!

크라켄의 붉은 동공이 크게 열리며 묵직하고 먹먹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바닷속에서 세 개의 다리가 내게 치솟았다.

나는 마나 방패를 밟고 위로 도약하며 만들어낸 큰 말뚝들을 놈의 다리에 박아넣었다.

쾅! 콰앙!

놈의 다리에 꽂힌 말뚝들이 큰 폭발을 일으켰다.

다행히 폭발은 제대로 먹혔고 놈의 다리는 너덜너덜해졌다.

우우우우우!

하지만 그 정도로 포기할 놈이 아니었다.

놈은 부상을 입은 세 개의 다리를 다시 물속으로 넣은 후 성한 다리 다섯 개를 끌어올렸다.

부웅!

놈의 거대한 다리 하나가 마나 방패를 밟고 선 내게 날아들었다.

나는 곧바로 방패를 밟고 도약했다.

훅!

하지만 놈의 다리는 다섯 개.

나는 이리저리 도약하여 놈의 다리를 피해냈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겠어.’

마나 창을 만든 것 때문에 주변의 마나가 꽤 사라진 상태였다.

게다가 물속에서 계속 이동을 했던 바람에 내 체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나는 크라켄의 물어뜯긴 몸체를 바라보았다.

‘한 방에 끝낸다.’

제 아무리 신급 몬스터라도 다친 곳을 또 다치면 물러설 수밖에 없다.

다리는 금방 회복이 되지만 몸체는 그렇지 않으니 더더욱.

부웅!

나는 집요하게 나를 쫓는 다리들을 피해내며 곳곳의 마나를 조금씩 응축시켰다.

레비아탄에게 했던 것처럼 가능한 범위의 마나를 모두 모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마나 방패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내가 놈의 몸속으로 직행하게 될지도 몰랐다.

훅! 후욱!

거대한 크기에 비해 놈의 다리는 굉장히 빨랐다.

놈의 다리를 피하며 마나를 응축시키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나를 노리는 다리를 피해 뛰어 오르고 착지하며 마나를 응축하고 또 다른 다리를 피하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하자 어느 정도 마나가 뭉쳐진 것 같았다.

나는 앞에 응축시킨 마나구를 살폈다.

백 원짜리 동전 크기의 마나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한 일렁임을 보였다.

‘이 정도면 되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나구와 함께 놈의 몸체 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꾸 도망만 다니던 내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크라켄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나를 쫓던 다리들을 거둬들이고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 눈치를 채고 상처를 물속으로 감추려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안 두지!’

나는 놈이 상처를 숨기기 전에 마나구를 날렸다.

마나구는 빠르게 놈을 향해 날아가 수면에 반쯤 잠긴 놈의 상처에 부딪혔다.

콰광!

꽤 큰 규모의 폭발이 일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폭발이 일으킨 파장에 뒤로 밀려났다.

‘윽!’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대로 바다 위로 떨어져내리던 중.

촤아아아!

무언가 바닷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나는 흠칫 놀라며 그것을 살폈다. 이 상황에서 또 다른 크라켄이나 레비아탄이 나타난다면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물속에서 튀어오른 것은 투명한 몸을 가진 흰수염고래였다.

아니, 흰수염고래의 형상을 띈 물 슬라임이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꽃잎을 닮아있었다.

‘우부가 아냐.’

덥썩.

흰수염고래가 입을 벌려 나를 삼켰다.

나는 물 슬라임의 몸속으로 삼켜졌다.

말캉말캉한 부드러움이 내 온몸을 감쌌다.

왠지 포근한 느낌이었다.

나를 삼킨 흰수염고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풍덩!

바닷속에는 온갖 형태의 물 슬라임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슬라임 무리라면 다른 물고기들도 슬라임을 쉽게 노리지 못한다.

시선을 돌려 크라켄이 있던 곳을 살피자, 다행히 큰 상처를 입은 놈은 이곳을 벗어나고 있었다.

물 슬라임들은 다 같이 한 방향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크라켄이 물러났기 때문인지 포근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들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 *

타닥, 타닥.

쏴아아아—

마음이 편해지는 레부의 불꽃 소리와 함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앞에서 따스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레부가 불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몸을 뒤척이자 바닥의 모래알갱이들이 사르륵 밀려났다.

‘물 슬라임이 해변에 데려다준 건가?’

나는 눈을 떴다.

레부가 타오르며 내는 불빛이 어두워진 해변을 밝히고 있었다.

내 옆에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정시언이 있었고 머리맡에는 고양이 형체의 우부가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내게 덮여 있던 옷가지가 흘러내렸다.

주선오의 외투였다.

‘주선오는?’

주변을 살피자 조금 떨어진 앞쪽에 주선오와 물 슬라임 하나가 앉아있었다.

모부는 보이지 않는 것이 모래의 심장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선오의 어깨에 그의 옷을 걸쳐주었다.

주선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 일어나셨어요?”

“응.”

그 옆에 있던 물 슬라임 역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꽃잎이 담겨있는 것 같은 형태의 눈동자. 나를 삼켰던 물 슬라임이었다.

대충 사람의 형태만을 따온 것 같은 레부와 모부와는 다르게 이 물 슬라임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사람을 닮아있었다.

오밀조밀한 얼굴 형태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까지.

투명하지만 않았다면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물 슬라임이 나를 보며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물 슬라임들을 대표해서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우부를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물 슬라임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탐지로 어두운 바다 쪽을 살피자 그 안에 물 슬라임들이 가득했다.

“게이트는 클리어 된 거지?”

“그럼요. 말썽꾸러기 우부가 저희에게 돌아왔으니까요.”

우두머리가 정시언의 머리맡에서 잠든 우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 슬라임 사이에서도 천덕꾸러기인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우두머리에게 말했다.

“우부를 데려가고 싶어.”

꽃을 닮은 눈동자가 커졌다. 우두머리가 되물었다.

“우부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보며 우부를 불렀다.

“우부!”

내 외침에 정시언과 우부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우부는 잠시 귀를 까닥이더니 나에게 도도도 뛰어왔다.

정시언과 레부 역시 우부의 뒤를 따라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푸, 우부 불렀어?”

우부가 내 다리에 얼굴을 부볐다.

물 슬라임의 우두머리는 그런 우부를 보고는 웃었다.

“하하. 당신을 정말 잘 따르는군요.”

나는 우부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나랑 게이트 밖으로 나갈래?”

“밖?”

“응. 이 슬라임 있지? 불꽃 슬라임 레부. 그리고 아까 봤던 모래 슬라임 모부도 내가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거든.”

레부를 올려다보는 우부의 눈이 반짝였다. 레부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푸! 친구들!”

“그래. 친구들. 나랑 같이 가면 매일 친구들이랑도 놀 수 있어. 위험한 것도 없고 말야.”

우부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좋아! 우부 따라갈래! 여기 나갈래!”

반면 레부는 뒤에서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우부의 머리를 살살 긁어주고는 우두머리를 바라보았다.

우두머리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우부의 뜻이 그렇다면 따라줘야지요.”

우두머리는 우부에게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우부를 불렀다.

“우부.”

“푸?”

우부가 우두머리의 손으로 다가갔다.

우두머리는 우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부, 저 분과 함께 가겠니?”

우두머리의 물음에 우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부 따라갈래. 따라가서 친구랑 놀래.”

우두머리가 다시 부드럽게 웃고는 우부를 내게 살짝 밀었다. 우부는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우부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어린 슬라임이지만 그래도 슬라임은 슬라임.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겁니다.”

“걱정 마.”

나는 씩 웃고는 우부를 챙겨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부가 내 옆구리에 낑겨 대롱대롱 매달려 웃었다.

“푸푸푸푸.”

우두머리와 주선오 역시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구를 열어드릴까요?”

주선오와 정시언을 돌아보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우두머리가 열어준 출구를 통해 게이트의 밖으로 이동했다.

* * *

주선오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도착한 나는 바로 바닷물의 짠 물기를 모두 씻어냈다.

개운한 기분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오자 무릎 위에 우부를 올려놓고 쓰다듬고 있는 윤도빈이 보였다.

“뭐해?”

내 물음에 윤도빈은 빤히 우부를 내려다보며 나를 불렀다.

“…누나.”

“왜?”

윤도빈은 심각한 표정으로 우부를 내려다보았다.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우부를 살펴보는데 윤도빈이 말했다.

“…우부. 너무 귀여운 것 같아.”

“푸?”

윤도빈의 말에 우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발견하더니 곧 내게 후다닥 달려왔다.

“윽.”

윤도빈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무릎 위에서 우부가 내려온 것이 속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소파에 앉으며 우부에게 말했다.

“우부, 아까 얘기한 서약. 지금 줄 수 있어?”

“푸! 줄 수 있어!”

우부가 폴짝 뛰어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곧 우부의 몸속에서 동그란 물방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서약?”

바닥에 앉아있던 윤도빈이 소파에 턱을 기댄 채 물었다.

“응. 한 가지 맹세가 가능한 아이템이야.”

나는 간략하게 윤도빈에게 서약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우부는 곧 3센티미터 정도의 물방울을 뱉어냈다.

“푸! 우부 서약 줄게!”

나는 우부가 뱉어낸 물방울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우부를 만지는 것과 비슷한 촉감이었다. 말랑말랑한 느낌.

‘절대 증발하거나 흡수되지 않는다고 했지.’

나는 서고지기의 말을 떠올리며 여우 구슬로 물방울의 정보를 확인했다.

[A급 아이템 서약]

[한 가지 맹세가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맹세의 내용은 정확해야 하며 맹세를 어길시 서약자에게 맹세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집니다.]

서고지기의 설명과 일치했다.

‘이걸로 이시결은 해결됐어.’

내일 기관에 가서 안세인과 김지석이 보는 앞에서 이시결에게 이것을 사용하게 하면 정리가 끝난다.

나는 무릎 위에서 우부를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벙커.”

내 대답에 윤도빈이 기가 막힌 듯 말했다.

“진짜 대단하다. 게이트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벙커야?”

“보상 확인하고 테스트 해 봐야지.”

내 말에 윤도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뭔가 싶어 윤도빈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봐. 누나, 각성한 이후로 쉰 적 있어?”

“쉬었지, 당연히.”

“제대로 쉰 적 있냐고. 게이트나 각성자,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있을 리 없었다.

회귀 후 지금껏 게이트를 닫지 않는 날에는 단련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내 침묵에 윤도빈의 표정이 한층 사나워졌다.

“안되겠다. 내일은 쉬어.”

“안 돼.”

“왜?”

“기관에 가봐야 돼.”

“그럼 모레.”

“…모레는….”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윤도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네. 쉬어.”

내가 입을 열려하자 윤도빈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게이트에도 가지 말고 벙커에도 오지 말고. 슬라임도 다 넣어두고.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라도 쉬어.”

“…….”

생각을 읽힌 것 같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윤도빈이 다시 물었다.

“알겠지?”

윤도빈의 고집스러운 질문에 피식 웃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쉴게.”

그제야 윤도빈은 내 앞에서 물러났다.

나는 우부를 옆구리에 낀 후 벙커로 내려갔다.

“푸? 여긴 뭐야아?”

벙커의 바닥에 내려선 우부가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레부, 모부.”

내 부름에 곧 레부와 모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쿄….”

“휴….”

여전히 힘이 없는 두 슬라임은 나오자마자 우부를 경계했다.

“우부한테 여기 좀 소개시켜 주고 놀고 있어.”

내 말에 우부의 귀가 쫑긋거렸다.

“놀아? 우부랑 놀아?”

“쿄, 쿄옷! 시, 싫습니다!”

“흇! 저도 싫어요! 왜 저런 물 슬라임이랑 함께 있어야 하나요!”

하지만 우부는 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에게 달려들었다.

“푸, 우부랑 놀까아?”

“쿄, 저리가십시오! 저를 죽일 생각입니까?”

레부가 빠르게 우부를 피해 도망쳤다.

그러자 우부는 이번에는 모부에게 달려들었다.

“…휴, 흇! 오, 오지 마요!”

주춤주춤 물러나던 모부 또한 우부가 달려들자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세 슬라임의 술래잡기를 보며 피식 웃고는 게이트의 보상을 확인했다.

‘보상 확인.’

곧 바닥에 보상의 목록이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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