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뭐야?”
윤도빈이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이시결이 풀려난다는 것은 윤도빈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곳으로 올 줄 몰랐을 뿐.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시결은 그런 우리의 어깨를 슥 밀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못 볼 거라도 본 얼굴들이네요.”
“아니, 잠깐만! 왜 자연스럽게 들어옵니까?”
윤도빈이 이시결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지낼 곳에 문제는 없다고 보는데요? 그때 잠깐 있던 방 남는 것 아니었습니까?”
뻔뻔스러운 대답에 윤도빈이 기가 찬 듯 어버버거렸다. 그러더니 곧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 역시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감시하기엔 확실히 이게 편하긴 한데.’
하지만 그건 내 입장.
이시결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할게.”
나는 도빈이의 등을 살짝 밀었다.
윤도빈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이시결을 번갈아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이시결에게 물었다.
“무슨 꿍꿍이야? 왜 굳이 내 감시 하에 있으려고 하지?”
피가 묻은 장갑을 벗던 이시결이 내 질문에 입꼬리를 비죽였다.
“조금 착각하시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시결은 삐딱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윤도아 씨의 감시를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내가 되물었지만 놈은 내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만을 이었다.
“뭐, 물론 윤도아 씨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됐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약도 걸려있고 저도 제가 다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사람은 해치지 않습니다. 다만 때가 온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지만요.”
“때?”
이시결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제가 윤도아 씨를 이길 수 있을 때 말입니다.”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기관의 지하 감옥에서 나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놈이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띤 채 그에게 물었다.
“서약은 무시하겠다는 거야?”
“모르죠. 그때가 되면 서약이 무용지물이 될 지도.”
이시결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차 싶었다. 서약을 맺을 수 있다면 분명 푸는 방법도 있을 터.
나는 일부러 다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런 것도 도감에 써 있었나봐?”
내 떠보는 듯한 말에 이시결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 말을 너무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무조건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서약의 맹세는 윤도아 씨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잖습니까?”
역시 믿을 수가 없는 놈이었다.
놈의 말대로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서약의 맹세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확인을 위해 최초의 책 서고지기를 불렀다.
‘서고지기.’
<네.>
‘서약의 맹세를 푸는 방법이 있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꽤 까다롭지요.>
이걸 진작 물어봤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설명.’
<서약을 내어준 물 슬라임과 서약자가 함께 물 슬라임의 우두머리를 만나면 서약의 파기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전에 만났던 꽃을 닮은 눈동자의 물 슬라임을 떠올렸다.
‘서약을 준 물 슬라임이 꼭 있어야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부가 없다면 저 방법을 이용해 맹세를 풀 수는 없었다.
나는 서고지기와의 연결을 끊고는 다시 이시결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여기에 온 이유는 그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다?”
“뭐 겸사겸사 맞습니다. 혹시라도 그 때가 오기 전에 윤도아 씨가 죽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윤도아 씨한테 고개를 숙인 것도 다 윤도아 씨를 죽일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윤도아 씨가 허무하게 다른 것한테 죽게 된다면 제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 아닙니까?”
이시결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제가 윤도아 씨를 감시하러 온 겁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마디로 자신이 죽이기 전에 내가 죽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상당히 귀찮은 놈이네, 이거.’
나는 지끈거리려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내 목숨을 하나 갉아먹을 상대라면 이시결 역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어쩌면 이시결을 미끼로 삼아 상대를 죽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가 죽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나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했다.
놈의 목적이 어떻든 내가 쉽게 이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마음대로 해.”
내 반응에 이시결은 작게 웃었다.
“그럼 일단 피 좀 닦아내고 싶군요. 실례하겠습니다.”
이시결이 욕실로 향했다.
‘이제 도빈이한테 설명을 좀 해야겠네.’
나는 도빈이의 방으로 가 살짝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빈이는 뚱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저 사람 진짜 여기서 지내?”
“그렇게 됐네.”
내 담담한 대답에 윤도빈이 기가 찬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있는 게 통제하기는 훨씬 편해.”
“…그거야 그렇겠지만.”
윤도빈은 영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편한 대로 해. 대신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윤도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차피 사람한테는 해코지를 못 해. 걱정 마.”
“…어휴. 그 이상 책임질 일 좀 늘리지 마. 왜 그리 사서 고생을 해.”
윤도빈이 다시 걱정 어린 말투로 내게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참, 내일 쉬기로 한 거 알지?”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간 저런 건 안 까먹는단 말야.’
“…알겠어.”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 * *
다음날, 결국 나는 윤도빈에게 무기와 슬라임들을 모두 빼앗긴 후 집 밖으로 내쫓겼다.
무기와 슬라임이 없다고 게이트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윤도빈이 이렇게까지 했는데 게이트에 가기도 찜찜했다.
‘뭘 해야 하나….’
나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며 고민했지만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회귀 전 각성을 한 이후로, 이렇게 작정하고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은 처음이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의 입구로 걸어가자 보안실에 있던 보안 요원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게이트 가십니까?”
항상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기에 이제는 집을 나설 때 보안 요원의 인사가 없으면 섭섭할 정도였다.
나는 보안 요원의 명찰을 살폈다.
[보안 요원]
[권선일]
“아뇨.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권선일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내 허리춤을 살피고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진짜 칼도 안 차고 나오셨네요?”
“하하…. 네, 뭐….”
‘도빈이에게 빼앗긴 거지만.’
나는 멋쩍게 웃었다.
“칼 안 차고 나오신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십니까?”
권선일이 물어왔다.
“그냥 근처 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오려고요.”
“아하, 그렇습니까?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권선일과 인사를 나눈 나는 본가가 있는 옛 동네로 향했다.
* * *
오랜만에 찾은 옛 동네는 변함이 없었다.
본가로 가기위해 역 앞을 지나는데 역 앞의 광장이 꽤 시끄러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누군가의 장황한 연설이 진행중이었다.
“이제 게이트는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안착했습니다. 어딜 가도 게이트는 존재하고 각성자들이 우리의 구세주나 마찬가지가 되었지요.”
상당한 저음의 여자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졌다.
‘왠지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나는 연설에 귀를 기울이며 연설자쪽을 살폈다.
앞에 사람들이 꽤 모여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게이트에는 입장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바로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이지요.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그걸 만족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입니다.”
‘각성자 반대파들인가?’
지난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로 각성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선택받지 못해서 하지 못했던 일을 다른 선택받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진행한다.
게다가 그 일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지켜주기까지 한다.
그걸 마다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수가 줄었을 뿐,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커뮤니티에도 가끔 각성자들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올라왔고 기관 사이트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가호자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각성자들처럼 각성을 하고 활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 두려우니까요. 게이트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이미 한 차례의 게이트 브레이크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웬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반대파가 아닌데. 그럼 무리 홍보?”
나는 슬쩍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앞으로 향했다.
“저희는 저희의 사명을 위해서 게이트를 닫고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이냐. 바로 외계인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이지요.”
‘…아.’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만 외계인을 침략자로 보는 신봉자의 단체 중 하나였다.
회귀 전 내 손에 죽었던 박성현이 있던 단체와는 다른 곳이었다.
“이제 첫 메시지가 도착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우리에게 도착한 첫 메시지는 올해 초 시작의 날을 예고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시작의 날, 그들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왔습니다. 시험에 대비하라는 경고. 그렇다면 대체 메시지에서 이야기하는 시험이란 게 뭘까요.”
사람들을 세게 밀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간신히 앞에 도착하자 드디어 연설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연설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시험은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기 전 우리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갖고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졌는지. 침략을 해서 어떻게 우리를 복종시키고 이용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란 말입니다!”
‘심지원.’
외계인 침략을 주장하는 단체의 대표였다.
기관에 등록을 한 각성자들의 무리를 이끄는 땅의 지배자 무리의 단장이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의 단원들은 모두 외계인 침공 단체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박성현이 있던 외계인 숭배 단체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러니 박성현에게는 이들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박성현이 각성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 김지석을 죽이기 전, 이 단체를 먼저 정리해 버렸다.
“우리는 이들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놈들의 이런 기술력을 빼내오고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놈들의 계획을 역이용해야 해요.”
저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던 심지원은 결국 박성현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고는 니엘과 함께 박성현의 심복이 됐었지.’
그러다 결국 나와 함께 박성현의 무리를 소탕하던 권재경의 손에 죽었고.
나는 열심히 연설중인 심지원의 정보를 살폈다.
[심지원]
[두더지 신의 가호]
[땅굴 파는 두더지]
[전용 특성 : 땅의 지배자 lv.2]
[전용 스탯 : 근력 43/마력 56/진동감지 40]
[전용 스킬 : 땅따먹기 lv.2]
[특성 스킬 : 흙인형 lv.3]
그녀는 땅의 지배자, 즉 흙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였다.
조이와 마찬가지로 마력 스탯이 있었고 그녀가 가진 스킬들 또한 꽤 좋았다.
땅따먹기 스킬은 심지원이 지정한 마력 범위 내의 공간에서 마력 없이 그 안의 흙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다만 스킬을 사용할 때 소모되는 마력이 꽤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흙인형은 그녀를 대신해서 싸울 수 있는 인형을 만들어내는 스킬이었다.
‘저 스킬들 때문에 상당히 성가셨어.’
하지만 그건 회귀 전의 이야기. 이제는 눈 감고도 이길 수 있었다.
다만 회귀 전처럼 심지원이 박성현의 수하로 들어가게는 두지 않을 것이었다.
어쨌든 외계인 신봉자들은 추구하는 가치만 다를 뿐 게이트를 닫는다는 목적은 같았다.
‘미리 안면을 터두는 것도 좋겠어.’
쉰다고 해놓고 또 이렇게 되어버려 윤도빈에게 조금 미안함도 들었다.
‘게이트는 아니니까….’
나는 속으로 합리화를 하며 다시 심지원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