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막사를 나온 이시결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수십 마리의 오크 떼였다.
무기를 점검하거나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오크들이 하나둘 이시결을 돌아보았다.
앉아있던 놈들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본적으로 험악한 놈들의 얼굴이 한층 더 험상궂어졌다.
그러더니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이시결을 위협했다.
“크르르….”
“캬….”
그 사이에서 이시결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가 서 있는 막사를 둘러싼 오크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앞의 바닥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0/100]
간단한 퀘스트였다.
소탕해야 할 오크들의 수가 100마리라는 것이 조금 까다로울 뿐.
뒤이어 타이머가 나타났다.
[00:30:00]
[00:29:59]
[00:29:58]
점점 숫자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30분이네요.”
시간을 확인한 이시결이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거점석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우락부락한 오크들과 놈들의 막사뿐이었다.
거점석은 저 수십 개의 막사 중 어느 한 곳에 감추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놈들을 잡는 것보다 거점석을 찾는 게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르겠군.’
이시결을 둘러싼 오크들이 각종 무기들을 들어올렸다.
투박한 칼과 뭉툭한 도끼, 두터운 몽둥이까지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충분하지.>
레부의 팔찌에서 들려오는 윤도아의 목소리에 이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처리하고 연락하죠.”
비수는 뽑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비수는 오히려 방해였다.
이시결은 손가락 끝에서 거미줄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 * *
아직 막사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내 앞에도 퀘스트가 떠올랐다.
다른 쪽 쌍둥이 게이트에서 이시결이 오크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0/100]
동시에 30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이쪽 게이트의 오크들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굳이 밖으로 나가서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
오크는 상당히 호전적이고 잔인한 놈들이었다.
사람과 비슷한 골격을 가졌지만 우락부락한 근육과 질긴 가죽, 그리고 큼지막한 이빨들.
놈들은 그 이빨로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
특히 놈들에게 연한 사람의 살은 굉장한 특식에 속했다.
때문에 놈들은 각성자들을 만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각성자를 차지하려 들었다.
그러면서 본인들끼리의 싸움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그렇게 패한 동족을 먹어치우기도 했다.
나는 탐지로 거점 안의 오크들을 둘러보았다.
거점이 꽤 넓은 모양인지 내 탐지 범위인 70미터 이내에 보이는 오크들은 50여 마리 뿐이었다.
‘시간제한도 있으니 단박에 정리하는 게 낫겠어.’
회귀 전 같았다면 은밀한 고양이의 암살자 특성으로 한 마리 한 마리 처리하느라 상당히 귀찮았을 법한 게이트였다.
게다가 가죽이 질겨서 고블린이나 다른 몬스터처럼 가볍게 베어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가벼운 상처라면 오히려 놈들의 화만 돋구는 꼴이었다.
정확하게 급소를 노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야만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탕 후 거점 장악이라는 게이트의 특성 상, 지금 탐지되는 오크들을 모두 죽인다면 이 거점에는 더 이상 다른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을 터.
그 이야기인즉슨.
‘이곳의 마나를 다 써도 문제없다는 이야기.’
나는 팔짱을 낀 채 위를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무죽죽한 막사의 천장뿐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너머의 마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최대 염력 개수만큼의 마나구를 만들어냈다.
‘마나구.’
1m 범위의 마나를 1cm로 압축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초.
막사 바깥의 하늘에 작은 마나구들이 송글송글 맺혀진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여 그것들을 바닥으로 쏘아 보냈다.
몇 초 후, 내가 있는 막사를 제외한 거점 내에 마나구의 폭격이 쏟아졌다.
쾅!
콰앙!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공격을 받은 오크들은 의문과 공포가 뒤섞인 괴성을 내지르기도 전에 모두 폭발에 휘말려버렸다.
“푸? 주인, 밖에 난리 났어!”
이어진 폭음에 우부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막사 안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우부에게 레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쿄쿄쿄. 주인의 능력입니다. 아직도 그런 것도 모릅니까?”
“주인 능력?”
우부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주인은 여기에 있는걸?”
“아직도 우리가 모시는 주인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쿄쿄쿄쿄. 주인에게는 움직이지 않고 보지 않아도 놈들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레부가 마치 자신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듯 나에 대해 설명했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우부의 눈에 존경심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 꽤 웃겼다.
나는 탐지로 조용해진 막사 밖을 살폈다.
마나 운용 범위 이내에 남아있는 오크는 더 이상 없었다.
“레부,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 물어와. 우부는 따라가고.”
내가 손을 까닥이자 레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쿄, 알겠습니다. 주인. 따라오십시오, 우부! 뒷처리는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울 차례입니다.”
“푸푸푸, 우부 뒷처리 배운다!”
우부가 신이 나서는 뒤뚱거리며 막사를 벗어나는 레부의 뒤를 따랐다.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57/100]
[00:28:59]
‘57마리의 오크를 잡는데 1분이라.’
나는 막사 천막 앞에 떠오른 알림글과 시간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나는 막사를 나서며 주변을 살폈다.
한 방향을 제외하고는 드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절벽의 사이에는 마나구의 폭격을 맞아 너덜너덜해진 거점이 있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막사는 내가 나온 곳뿐이었다.
폭격에 뒤집어진 흙과 풀, 그리고 막사의 잔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오크였던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내 탐지 범위에 잡히지 않은 곳은 절벽으로 막히지 않은 탁 트인 평원 방향이었다.
폭음을 듣고 달려올 남은 43마리의 오크가 있는 곳도 저 방향일 터.
나는 남아있는 마나들을 끌어모아 여러 개의 마나구로 압축했다.
‘마나구.’
그리고 잠시 후.
역시나 평원 방향에서 오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캬아아!”
“크륵!”
나는 놈들에게 미리 만들어두었던 마나구들을 가볍게 날려주었다.
콰앙!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58/100]
쾅!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61/100]
소탕된 오크들의 수가 빠르게 카운팅되었다.
그리고 곧 마지막 오크가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오크들을 모두 소탕하였습니다. 100/100]
[00:26:10]
오크들을 모두 소탕했음에도 타이머는 멈추지 않았다.
[거점석을 찾아 정화하십시오.]
[00:26:09]
주변을 살피자 삼십여 미터 앞쯤, 무너진 막사들과 오크들의 사체 사이에 돌로 만들어진 작은 제단이 탐지되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오른 나는 단번에 그곳에 도착했다.
제단의 위에는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생물의 심장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거점석.’
거점석에서 퍼져나간 줄기들이 제단의 아래로 흘러내려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하지만 곰팡이가 핀 것 같은 탁한 검정색을 띠고 있는 것이 상태가 딱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걸 정화하라는 건가.’
거점석은 오크들에 의해서 오염이 된 상태였다.
이것을 정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오크들은 다 소탕을 했기에 거점석을 만지기만 해도 정화가 가능했다.
나는 거점석에 손을 대었다.
일정하게 뛰는 거점석의 박동이 느껴졌다.
화아악!
그러더니 내 손에 닿은 부분부터 변색된 검은색이 벗겨졌다.
까만 재가 벗겨지자 거점석의 원색인 하얀빛이 드러났고 사방으로 펴진 줄기들 역시 하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거점석을 정화했습니다.]
[거점이 장악되었습니다.]
떠오른 알림처럼 이곳의 거점은 나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카운트다운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00:25:42]
[00:25:41]
아직 이시결 쪽의 거점이 장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쪽의 거점이 정화되고 장악되기 전까지 이 카운트다운은 계속될 터.
“쿄, 주인.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레부가 우부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연결.”
이시결을 좀 닦달해 볼 생각이었다.
* * *
[어딘가의 거점이 장악되었습니다.]
한 막사의 위에 올라선 채 손끝에서 거미줄을 털어내던 이시결의 앞에 알림글이 떠올랐다.
‘벌써 장악한 건가.’
슬쩍 시간을 살펴보니 이제 5분 정도가 지난 시간이었다.
‘역시 대단해….’
이시결은 살짝 입술을 핥았다.
기관의 지하에서 풀려난 이후로 계속해서 윤도아를 쫓아다니며 그녀의 실력을 볼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매번 볼 때마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실력.
처음 윤도아와 부딪쳤을 때는 당연히 그녀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시결은 윤도아에게 완벽하게 패했고 결국 그녀에게 잡혀 각성 기관의 지하에 갇히는 신세가 됐었다.
그곳에 몇 달 동안 갇혀 있으면서 이시결은 윤도아를 죽일 날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자신이 더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윤도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자존심?
그런 것은 전혀 필요 없었다.
과정이 어떻든,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으니까.
윤도아의 심장에 칼을 꽂을 그 날.
그 날만 생각하면 이시결은 두근거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시결의 입술 끝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
그는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후.”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회색의 막사들 사이를 하얀 실들이 촘촘히 메꾸고 있었다.
이시결의 거미줄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오크들이 걸려 있었다. 놈들은 파리처럼 버둥거리며 거미줄을 벗어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거미줄은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놈들에게 감겨들었다.
결국 놈들은 고치처럼 거미줄에 둘러싸여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제압은 끝났고.’
이시결은 손끝에서 다시 거미줄을 뽑아내어 허벅지 양쪽에 매어 뒀던 비수들에 연결했다.
‘이제 죽이기만 하면 끝.’
그는 여덟 개의 비수에 마비독을 주입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쳐둔 거미줄들에도 마비독은 묻어 있었지만, 그 독에 놈들이 죽기를 기다린다면 30분이라는 시간이 초과될 것이었다.
이시결은 주변의 고치들을 향해 비수들을 휘둘렀다.
촥, 촤악!
그때 레부의 팔찌에서 윤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이야?>
이시결은 손가락을 까닥여 거미줄 끝의 비수들을 각각 근처의 하얀 고치 8개에 꽂아넣었다.
푹! 푹!
“조금만 기다리세요. 전 윤도아 씨처럼 광범위 공격 스킬이 없습니다만.”
윤도아의 답은 없었다.
이시결은 고치 깊숙이 찔러넣었던 비수들을 회수했다.
비수의 독이 고치 안의 오크에게 잘 주입됐는지 소탕한 오크의 숫자가 카운트되었다.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8/100]
이제 8마리.
92마리의 오크가 남았지만 이미 놈들은 움직일 수 없는 고치 상태였다.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밤 거미의 먹잇감.
이시결은 막사 사이를 연결한 하얀 거미줄의 위를 걸었다.
그리고는 회수했던 비수들을 휘두르는데, 다시 윤도아가 물어왔다.
<아직도?>
8마리의 오크들을 추가로 소탕한 이시결이 담담하게 말했다.
“5초 지났습니다.”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16/100]
몇 걸음 옮기며 고치에 비수들을 찔러넣을 때 윤도아가 또 한 번 물었다.
<지금은?>
흘긋 시간을 확인한 이시결이 비수들을 거둬들이며 대답했다.
“정확히 20초 지났군요. 아직입니다.”
[오크들을 소탕하십시오. 24/100]
하지만 윤도아는 계속해서 이시결을 재촉했다.
<멀었어?>
일부러 이시결의 신경을 긁으려는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시결은 피식 웃으며 비수들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리고 1분 후.
<이 정도 시간이면 벌써 게이트 클리어 했겠어.>
윤도아의 빈정거림을 들으며 이시결은 마지막 오크의 고치에 시커를 찔러넣었다.
푹!
[오크들을 모두 소탕하였습니다. 100/100]
[거점석을 찾아 정화하십시오.]
“이제 다 소탕했습니다. 거점석만 정화하면 돼요.”
이시결이 시커를 뽑아내며 말했다.
<빨리 해. 갇히게 할 생각이야?>
윤도아의 짜증 섞인 말에 이시결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00:22:37]
아직 제한시간은 10분도 지나기 전이었다.
피식 웃은 이시결은 시커를 허리 뒤의 칼집에 넣었다.
“거점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거점 중앙쯤에 제단 같은 게 있어.>
“아.”
그러고 보니 한참 막사들 사이로 거미줄을 치던 중 제단을 보았던 것 같았다.
‘가장 큰 막사 쪽이었던 것 같은데.’
잠시 주변을 살핀 이시결은 중앙쯤의 가장 큰 막사로 향했다.
막사의 위에 올라선 그는 시커의 끝에 거미줄을 매달아 막사의 외곽을 따라 크게 휘둘렀다.
휙!
촤르륵!
날카로운 시커에 의해 막사주변의 거미줄들이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투둑. 툭.
장력을 잃은 거미줄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