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어딘가의 거점이 장악되었습니다.]
레부가 주워온 쓸모없는 아이템들을 확인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안내글이 떠올랐다.
나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더 이상 줄어들지 않고 멈추어 있었다.
[00:20:08]
<이제 됐습니까?>
레부를 통해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시결을 쪼아대긴 했지만 10분 만에 오크 100마리를 정리한 것은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보통의 각성자였다면 30분 안에 놈들을 모두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페널티로 이 게이트 안에 30분의 수십 배 이상을 갇혀있었을 터.
만약 상위권의 각성자, 윤도빈이나 권재경, 안세인 등의 랭커였다면 아슬아슬하게 30분을 맞췄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맞춘 후 지쳐서 한동안 휴식을 취했을 테고.
그리고 주선오였다면.
‘나보다 빨랐을 거야.’
그에게는 검격증폭 스킬이 있으니 단 한 번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오크들을 모두 정리했을 것이다.
반면 이시결에게는 광범위 공격이 없었다. 그런데도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
‘역시 쓸모 있어.’
“같이 못 다닐 정도는 아니네.”
내 대답에 이시결의 웃음이 들려왔다.
나는 레부에게 손을 까닥였다.
레부가 내게 보이기 위해 바닥에 늘어놓았던 아이템들을 집어삼켰다.
“우부도 삼킬래!”
“쿄! 어딜 감히! 안됩니다! 아이템은 제 겁니다!”
레부가 작은 칼 하나를 삼키려 드는 우부를 쫓아냈다.
그리고는 애지중지하며 그것을 마저 몸속에 집어넣었다.
[다음 거점으로 안내합니다.]
마침 안내글이 나타났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앞의 제단 위에 있던 거점석이 빛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 깜빡임은 곧 줄기 하나로 번져나갔다.
하얗게 반짝이는 줄기는 바닥의 풀들을 지나 뒤쪽 절벽의 컴컴한 동굴로 이어졌다.
‘저 안이 두 번째 거점.’
<다음 거점이 떴군요. 윤도아 씨 쪽도 동굴입니까?>
“맞아.”
퀘스트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형까지 완전히 같은 쌍둥이 게이트였다.
거리가 꽤 있었기에 나는 레부와 우부에게 손짓했다.
“레부, 들어가고. 우부, 올라와.”
“쿄!”
“푸!”
레부와 우부가 동시에 대답했다.
레부가 매섭게 우부를 흘겨보더니 심연의 불꽃 안으로 쏙 들어갔다.
커다란 눈을 깜빡인 우부는 바닥에서 퐁 튀어올라 내 어깨 위에 안착했다.
나는 곧바로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우부가 네 개의 발로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푸르르!”
귓가에 우부가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의 도약을 거쳐 절벽 아래쪽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아마 이시결 역시 절벽에 솟아나 있는 나무들을 타고 금세 동굴의 앞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푸푸푸푸!”
바닥으로 내려선 우부가 고개를 파르르 흔들었다.
나는 다시 레부를 불러냈다.
“레부. 나와.”
“쿄!”
레부의 불빛에 어둡던 동굴의 안쪽이 조금 밝아졌다.
이곳까지 길을 안내해준 거점석의 줄기는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다시 탁한 검정색으로 변해 있었다.
동굴 안에서 퀘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어둡군요, 안쪽은.>
역시 빠르게 동굴 앞에 도착한 이시결이 내부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탐지로 동굴의 내부를 살폈다.
동굴은 크지 않았고 길도 하나뿐이었다.
길의 끝, 동굴의 깊은 곳에 거점석이 있는 제단이 탐지되었다.
하지만 제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점석을 지키고 있는 오크 한 마리가 제단의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한 마리뿐이었지만 나는 살짝 혀를 내둘렀다.
‘우두머리라니.’
그놈은 100마리의 오크들을 이끌고 있던 우두머리 오크였다.
오크들이 우두머리를 뽑는 방법은 간단했다.
놈들 중 가장 강한 오크. 그리고 대부분 오크의 우두머리는 다른 오크들과의 전력 차이가 상당했다.
전리품은 기본적으로 우두머리의 몫이었고 무엇이든 우두머리가 먼저였기 때문에.
그래서 우두머리와 그 아래의 오크들의 격차는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단을 지키고 있는 우두머리 역시 바깥에 있던 오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덩치부터가 다른 것이 온몸에 튼튼한 갑옷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급소란 급소는 모두 가린 차림새였다.
‘나는 몰라도 이시결이 저걸 뚫을 수 있을지가 의문인데.’
놈이 든 무기의 실루엣 역시 꽤 살벌했다.
내 머리보다 클 것 같은 철퇴와 칼을 부러트릴 수 있는 소드 브레이커.
둘 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일 테고 잘못했다가는 소드 브레이커에 칼이 부러질지도 몰랐다.
그때.
<아.>
이시결의 무감각한 감탄사와 함께.
[우두머리 오크를 소탕하십시오. 0/1]
안내글이 나타났다.
이시결이 또 무턱대고 입장한 모양이었다.
“생각이 없는 거야, 겁이 없는 거야?”
내가 비아냥거리며 핀잔을 주었지만 이시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하. 이왕이면 겁이 없는 걸로 하죠.>
동시에 또다시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01:00:00]
[00:59:59]
‘1시간.’
조무래기 오크 100마리를 잡는데 30분이 주어졌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우두머리 1마리를 잡는데 두 배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만큼 놈을 잡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겠지.’
나는 동굴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레부, 불.”
뒤따라오던 레부가 종종걸음으로 내 앞으로 이동하며 온몸의 불꽃을 피워냈다.
그러자 동굴의 울퉁불퉁한 벽면이 환하게 드러났다.
십여 미터 앞에 거점석의 제단이 있는 동굴의 끝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 움직이는 은색의 갑주가 있었다.
온몸을 뒤덮은 갑주 때문에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오크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투구의 머리가 천천히 내게 향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놈이 오른손에 든 철퇴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이거 조금 곤란하네요.>
살짝 호흡이 달라진 이시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주가 단단한 건지 제 공격이 전혀 먹히지를 않는군요.>
“1시간 안에 못 잡으면 페널티야. 말했지만 너 때문에 발목 잡히면 가만 안 둬.”
나는 이시결에게 경고하며 1미터 공간의 마나를 1센티미터로 압축했다.
‘마나구.’
순식간에 만들어진 마나구를 내게 천천히 걸어오는 우두머리를 향해 날렸다.
마나구가 놈의 흉갑에 부딪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아무리 갑옷이 단단해도 폭발을 버티지는 못하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
은색 갑주는 멀쩡했다.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갑옷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남지 않았다.
‘어째서?’
놈은 폭발 자체가 없었다는 듯 계속 나를 향해 걸어왔다.
‘마법 면역이 있나?’
나는 놈을 마주보고 걸어가며 레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레부.”
“쿄!”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른 레부가 내 손목으로 날아와 휘감겼다.
주변이 다시 금세 어두워졌지만 상관없었다.
“우부.”
“푸!”
이번에는 우부가 내 왼쪽 손목으로 튀어올라 레부와 똑같은 팔찌를 만들어냈다.
나는 두 슬라임 팔찌를 낀 채로 허리 뒤의 단검들을 꺼내들었다.
한방에 저 갑옷을 뚫으려면 백어택을 연계한 공격이 좋을 것 같았다.
동굴 안을 비추는 빛이 없었기에 그림자 밟기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나는 우두머리의 뒤를 바라보았다.
‘블링크.’
사삭!
나는 내 눈앞에 나타난 우두머리의 등을 향해 두 단검을 찔러넣었다.
카앙!
“!”
단검이 튕겨져 나왔다.
단검을 찔러넣던 내 힘 때문에 오히려 내 손목이 크게 꺾일 정도였다.
블링크에 백어택의 연계공격이었음에도 역시나 갑옷에는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때 등 뒤의 내 존재를 눈치챈 우두머리가 오른손의 철퇴를 휘두르며 몸을 돌렸다.
나는 가슴 높이로 휘둘러지는 철퇴를 피해 뒤쪽으로 가볍게 도약했다.
부웅!
앞을 스쳐지나가는 철퇴의 묵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나는 검게 오염된 거점석이 있는 제단 위에 착지하며 놈을 살폈다.
‘물리 공격도 먹히지 않는다면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철퇴를 거둬들인 우두머리가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내 공격이 약했을 리는 없었다.
분명 밖에서도 오크 100마리를 마나구로 처리했다.
게다가 조금 전 우두머리에게 던졌던 마나구는 그것보다 더 압축률이 높은 것이었다.
놈은 공격을 전혀 받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 공격이 무효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놈한테 공격 무효화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다시 마나구를 압축해 놈에게 날렸다.
콰앙!
확실히 폭발이 일어났지만 이번에도 역시 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아예 공격 자체를 받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놈이 제단 위의 내게 왼손의 소드 브레이커를 휘둘렀다.
나는 다시 제단을 박차고 도약해 놈의 머리 위를 뛰어 넘었다.
<윤도아 씨의 공격도, 후. 먹히지 않나요?>
그때 조금 호흡이 흐트러진 이시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체력이 그닥 좋지 못한 이시결로서는 이 전투가 길어질수록 불리할 것이 뻔했다.
나는 놈의 뒤쪽 바닥에 착지하며 대답했다.
“안 먹히네.”
이시결이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건 처음이네요. 분명 공격을 했는데 제 공격 자체가 사라지는 기분입니다.>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뒤로 더 물러나며 우두머리와 사이를 벌렸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야 하는 건가 싶어 탐지로 동굴의 내부를 살폈지만 특별할 것은 없었다.
뒤쪽의 동굴 입구를 살펴보던 나는 멈칫했다.
‘…잠깐.’
그러다 문득 이 게이트의 특성이 떠올랐다.
이곳은 쌍둥이 게이트. 그것도 형태와 퀘스트의 내용까지 똑같은 일란성의 쌍둥이 게이트였다.
‘…어쩌면.’
나는 레부의 팔찌를 통해 이시결에게 물었다.
“지금 공격 중이야?”
<아직입니다.>
상당히 짜증이 났는지 이시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심연의 불꽃을 고쳐 쥐며 내게 다가오는 우두머리의 빈틈을 살폈다.
지금 가장 공격하기 쉬운 곳은.
“오른쪽 다리 오금. 공격 가능해?”
잠시 후 이시결의 대답이 들려왔다.
<가능합니다.>
“준비되면 말해.”
놈이 철퇴를 크게 휘둘러 나를 내리쳤다.
나는 슬쩍 몸을 틀어 철퇴를 피했다.
쿵!
묵직한 철퇴가 바닥을 내리쳤다.
돌바닥이 깨지며 철퇴가 바닥에 박혔다.
<3초 뒤요.>
이시결이 말했다.
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뭔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2.>
나는 놈의 옆구리를 스쳐 지났다.
<1.>
그리고는 심연의 불꽃을 갑주의 오른쪽 다리 뒤쪽 오금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콰직!
‘들어갔다!’
<오.>
이시결의 가벼운 감탄사가 들려왔다.
역시 공격이 먹힌 모양이었다.
나는 오금에 박힌 심연의 불꽃을 뽑아들며 빠르게 뒤로 빠졌다.
우두머리가 비틀거리더니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쿵!
‘역시 생각대로였어.’
이 일란성 쌍둥이 게이트의 보스인 오크의 우두머리는 양쪽 게이트에서 동시에 같은 곳을 공격해야만 데미지를 입는 형식이었다.
한쪽에서만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도 효과가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쌍둥이 게이트의 특성인 겁니까?>
이시결의 목소리가 다시 평소처럼 나른해졌다. 공격이 먹히기 시작하니 금세 짜증이 풀린 것 같았다.
“그런 것 같네.”
<굉장히 까다롭군요. 연락병이 없었다면 방법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들어온 각성자가 보스를 공략하는 방법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레부 같은 연락병이 없었다면 이렇게 합을 맞추어 놈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딱 한 명, 신교진만 빼고.
녀석에게 이 게이트는 굉장히 쉬운 곳이었다. 화살을 쏘는 족족 우두머리에게 데미지를 입혔을 것이다.
그놈의 운빨 때문에 상대편 게이트에서 공격하는 곳을 우연히 맞추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외의 각성자들에게는 무리였다.
‘그래서 시간을 많이 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간 안에 잡는 것은 힘들었다.
나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00:54:34]
한 시간 안에 놈을 잡지 못한다고 해도 게이트가 클리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양쪽의 각성자 모두가 그 사실을 눈치챌 때까지 놈과의 소모전을 벌여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무릎을 꿇었던 우두머리가 몸을 일으켰다.
<아. 일어났군요.>
역시 오금을 한 번 찔렀다고 쓰러질 놈은 아니었다.
나는 심연의 불꽃을 고쳐 쥐었다.
“그럼 끝내볼까.”
<좋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