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하지만 나와 이시결은 은색 갑주를 입은 우두머리 오크를 바로 쓰러트리지는 못했다.
왜?
의견 조율이 안 됐으니까.
<움직이지 못하게 하나씩 베어내야죠. 그러니까 다음 목표는 왼쪽 오금입니다.>
“그게 무슨 시간 낭비야. 저런 건 한방에 끝내는 거라고. 곧바로 심장을 찔러야지.”
<…….>
“…….”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오른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온 우두머리가 내게 소드 브레이커를 휘둘렀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들쑥날쑥한 날이 내 코앞을 스쳐지나갔다.
<…윤도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별로군요.>
“…너야말로 생각보다 더 별로야.”
이번에는 철퇴가 내 머리로 날아들었다.
나는 허리를 살짝 숙여 그것을 흘려보내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00:46:04]
벌써 10분 가까이가 지나있었다.
“이러다가 시간 다 되겠어.”
내가 한껏 짜증을 담아 말했지만 이시결은 여유만만이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어차피 이곳에서는 굶어죽거나 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갇혀있어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요.>
기가 찬 대답이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원래 이런 건 아쉬운 사람이 접는 법이지요.>
이시결이 웃으며 말했다.
“…….”
역시 무리해서라도 윤도빈이나 주선오를 데려올 걸 그랬나 싶었다.
‘그랬으면 벌써 끝났을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뒤로 물러나며 다시 철퇴를 피해냈다.
“…타협하자.”
이시결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타협이요?>
“왼쪽 다리만 마저 찌르게 해줄게.”
<…흠….>
이시결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양 어깨까지.>
나는 미간을 확 찡그렸다.
“시간 낭비야.”
<그 정도는 해야 제압하는 맛이 있죠.>
“……”
<…….>
또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두어번 갑주의 공격을 피해내고는 말했다.
“너 진짜 별로네.”
<윤도아 씨야말로. 근데 그거 아십니까?>
“뭐.”
<제가 윤도아 씨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계속 너라고 불리는 것을 신경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혹은 나이를 핑계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걸 수도 있었다.
사실 크게 나이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이시결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됐고, 3초 뒤에 왼쪽 오금.”
이시결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금세 카운트를 시작했다.
<3.>
나는 갑주의 뒤로 블링크 한 뒤.
“2.”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준 후.
<1.>
이시결의 목소리에 맞춰 심연의 불꽃을 내찔렀다.
심연의 불꽃이 우두머리의 왼쪽 오금을 파고 들었다.
콰득!
갑주가 움직임을 멈췄다.
단검을 빼내자 놈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쿵!
그 후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까지.
나와 이시결은 빠르게 우두머리를 무력화시켰다.
“됐지?”
나는 우두머리의 오른쪽 어깨에서 심연의 불꽃을 뽑아들며 물었다.
<뭐, 너무 대충 처리한 것 같긴 하지만요.>
우두머리가 들고있던 소드 브레이커와 철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컹!
캉!
나는 그것들을 발로 차 동굴 벽면으로 밀어내며 우두머리의 앞으로 이동했다.
“3초 뒤 심장.”
이시결이 3초를 세었다.
<3. 2. 1.>
그리고는 놈의 심장을 가린 흉갑을 향해 두 단검을 찔러넣었다.
카앙!
게이트를 클리어할 줄 알았지만, 이상하게 단검들이 튕겨져나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틀린 손목을 바로 잡았다.
“뭐야? 공격 안했어?”
<아…. 했습니다만.>
이시결의 목소리가 조금 곤란해졌다.
그의 말대로 공격을 안한 건 아니었는지 처음과는 다르게 흉갑에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힘이 조금 부족한 모양입니다.>
“…후.”
역시 근력이 없는 이시결에게 흉갑을 뚫는 것은 무리였나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이시결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는 보통 독을 이용한 방식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해왔다.
게이트를 닫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 승승장구하다가 이렇게 막혀버리니 조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쯧. 약해빠져서는.”
내가 세게 혀를 찼지만 이시결은 말이 없었다.
<…흠….>
그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듯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이번의 도발은 제대로 먹혀든 모양이었다.
“투구나 벗겨.”
내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는 우두머리의 투구를 벗겨냈다.
덜컥.
감추어져있던 우두머리의 투박한 얼굴이 드러났다.
여느 오크와 다를바 없는 얼굴이었지만, 놈은 독기 서린 눈빛으로 이를 드러내며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벗겼어?”
<…네. 눈빛이 상당하군요.>
“목을 베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이시결은 대답대신 숫자를 불렀다.
<3. 2. 1.>
나는 카운트다운에 맞춰 심연의 불꽃을 휘둘렀다.
서걱!
오크의 두터운 목에 붉은 선이 하나 그어졌다.
곧 놈은 입과 목에서 붉은 핏줄기를 쏟아내며 앞으로 쓰러졌다.
쿵.
나는 심연의 불꽃을 한번 툭 털고는 칼집에 집어넣었다.
[우두머리 오크를 소탕하였습니다. 1/1]
[거점석을 정화하십시오.]
아까처럼 거점석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바로 뒤쪽에 제단이 있었으니까.
나는 몸을 돌려 제단으로 다가가 그 위의 거점석에 손을 대었다.
역시 까맣게 변색되어 있던 거점석이 내 손이 닿자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화아악!
[거점석을 정화했습니다.]
[거점이 장악되었습니다.]
[어딘가의 거점이 장악되었습니다.]
동시에 이시결 역시 정화를 완료했는지 거점 장악 안내가 나타났다.
‘시간은?’
[00:37:53]
시간은 멈추어 있었다.
뒤이어 클리어 안내문들이 떠올랐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게이트를 나가기 전 보상을 확인하십시오.]
<…후. 끝났군요.>
이시결이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보상 확인하고 나와.”
나는 이시결과의 연결을 끊은 후 레부와 우부를 다시 불러냈다.
두 슬라임이 내 손목에서 스르륵 풀려 바닥으로 내려섰다.
“쿄, 끝났군요.”
“푸, 끝났군요!”
우부가 고양이의 형체를 갖추며 레부의 말을 따라했다.
레부가 매섭게 눈을 뜨며 우부를 쏘아보았다.
“쿄! 따라하지 마십시오!”
“푸! 따라하지 마십시오!”
두 슬라임이 투닥거리는 사이, 나는 보상을 확인했다.
“보상 확인.”
2개의 보상이 떠올랐다.
[랜덤 스킬 부여권 1장]
[스킬 레벨업권 1장]
‘오. 랜덤 스킬 부여권.’
오랜만에 받는 보상이었다.
사실 지금 있는 스킬들만으로도 악마의 고양이 특성을 잘 이용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스킬에 대한 큰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도 준다는데 받아야지.’
“랜덤 스킬 부여권 사용.”
랜덤 스킬 부여권을 사용하자 모래의 심장에서 모부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옛 스킬 보부상이 주인이 얻게 될 새로운 스킬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사이 빠르게 돌아가던 알림글이 서서히 멈추었다.
[보이지 않는 손 스킬을 얻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역시 처음 보는 스킬이었다.
내가 알림글을 읽자 모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휴? 보이지 않는 손?”
“왜. 좋은 스킬이야?”
나는 모부에게 물으며 스킬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휴. 주인에게 손이 하나 더 생겼다고 보면 되겠네요.”
[보이지 않는 손 lv.1]
[마나 운용의 범위 내에서 마나를 이용해 보이지 않는 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호오….”
모부의 설명대로였다.
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손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을 모두 취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머릿속 생각의 한계 때문인지 염력만으로는 하기 힘든 동작들이 꽤 많았다.
무언가를 잡는다든가 밀어낸다든가 하는 것들.
나는 바로 스킬을 발동해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
그러자 내가 보고 있던 우부의 위쪽에 마나로 만들어진 손의 모양이 나타났다.
팔의 중간 정도부터 손바닥, 그리고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구현된 손의 모양이었다.
얇은 마나막이 손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 같은 모습이었기에 슬라임들의 눈에는 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마나로 만들어진 손의 손가락들을 움직여보았다.
손가락을 폈다가 하나씩 접어나가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마나의 손을 바라보며 오른쪽 손의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그러자 마나의 손가락들 역시 내 손을 따라 움직였다.
생각할 때보다 움직임이 훨씬 자유로웠다.
‘이렇게 움직이는 게 훨씬 편하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앞발을 슥슥 핥고 있는 우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우부의 뒷덜미를 잡아올리는 시늉을 하자.
마나손이 우부의 뒷덜미를 들어올렸다.
“푸? 푸! 뭐가 우부를 든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진 우부가 네 다리를 마구 휘저으며 외쳤다.
레부와 모부는 무언가를 집어든 것 같은 내 손과 우부를 번갈아보았다.
‘이런 거군.’
모부가 버둥거리는 우부를 보며 웃었다.
“휴휴휴. 염력과 비슷하군요.”
“그러네. 이게 훨씬 정교하긴 하지만.”
나는 다시 우부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럼 크기는?’
만들어뒀던 손을 없앤 나는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커다란 손을 상상하며 스킬을 발동했다.
그러자 동굴 안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크기는 상관이 없는 것 같고.’
살짝 손을 움직여보자 커다란 손 역시 내 손동작을 따랐다.
씩 웃은 나는 다시 그것을 없앴다.
‘갯수는.’
나는 다시 평범한 크기의 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연달아 또 한 번 스킬을 사용하자.
미리 만들어뒀던 손이 사라지고 새로운 손이 나타났다.
염력의 1레벨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이것도 레벨이 올라가면 여러 개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마침 스킬 레벨업권을 한 장 얻었으니 그것을 곧바로 확인해보기로 했다.
“보이지 않는 손 레벨 2로.”
곧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레벨이 2로 변경되었다.
[스킬 레벨업권을 이용해 스킬 보이지 않는 손의 레벨을 올립니다.]
[보이지 않는 손 lv.2]
조금 전의 상황을 반복해보자 이번에는 처음 만들어뒀던 손이 사라지지 않았다.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두 개의 마나손이 내 손을 따라 똑같이 움직였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마나손들을 없앴다.
‘마음에 들어.’
이제 마나를 이용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늘어난 셈이었다.
염력만으로도 마나구나 마나막 등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내는 것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 손이라면 공격 외적으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가 있었다.
공격의 수단인 염력과 방어가 가능한 마나 방패, 그리고 그것들을 보조해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까지.
‘완벽하네.’
씩 웃은 나는 악마의 고양이 특성을 점검했다.
[전용 특성 : 악마의 고양이 lv.4]
[전용 스탯 : 마나 운용 72/탐지 68]
[특성 스킬 : 마나 방패 lv.4/보이지 않는 손 lv.2/블링크 lv.3/염력 lv.5]
특성을 하나하나 읽어본 나는 한껏 뿌듯해진 기분으로 게이트 밖으로 이동했다.
* * *
이시결은 먼저 밖에 나와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출렁다리 너머 늪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시결이 내 인기척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오셨습니까?”
그리고는 레부의 팔찌를 빼서 내게 건넸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시결이 내민 레부의 팔찌를 받아들었다.
그것을 심연의 불꽃 쪽으로 이동하자 슬쩍 튀어나온 붉은 젤리가 그것을 삼켰다.
“흠…. 그럼 갈까요.”
이시결은 차를 세워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봐온 건 아니었지만 척 보기에도 침울함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도 꼼짝도 않던 놈이었는데.’
직접적으로 이렇게 차이를 느끼고 나니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음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이시결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