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누나! 도빈이도 왔네?”
기관의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신교진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서있던 주선오가 조용히 고개를 꾸벅여 내게 인사했다.
나는 주선오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들도 왔네요?”
윤도빈이 둘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래요? 누나나 개선오는 몰라도 나랑 도빈이까지 부르고.”
신교진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라가 보면 알겠지.”
내 대답에 잠시 나를 바라보던 신교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뚱해졌다.
“맞다, 참. 나 아직 화 안 풀렸는데. 저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나가 저한테 주사위로 사기 친 거요.”
나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신교진은 염력으로 주사위를 굴려서 자신을 두 번이나 부려먹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를 볼 때마다 매번 그 이야기를 꺼냈다.
주선오와 윤도빈 역시 짧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돌리자, 신교진이 도끼눈을 뜨며 둘을 쏘아보았다.
“이것들이 웃어? 개선오, 웃지 마! 이런 놈을 친구라고 내가 지금까지, 어?”
그에 윤도빈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요. 완전 찐친이네.”
“야!”
신교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로비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눈이 우리에게 쏠렸다.
“아, 엘리베이터 왔네요. 타요, 타.”
윤도빈이 넉살좋게 웃으며 신교진의 양 어깨를 잡고 앞으로 밀었다.
신교진이 투덜거리며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신교진을 엘리베이터에 태운 윤도빈이 그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형 근데 파마 다시 할 때 된 거 아네요? 많이 풀린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윤도빈이었다.
“…그래? 풀렸나?”
신교진은 거기에 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거울 너머로 자신을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윤도빈을 쏘아보았다.
“…가 아니고. 말 돌리냐, 지금? 기분 나쁘니까 내 정수리 내려다보지 마.”
윤도빈이 신교진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형. 진짜…. 푸흐흡.”
“…당장 치우지 못해? 키 크다고 유세야?”
신교진이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윤도빈의 팔을 쏘아보며 말했다.
“에이~. 유세라뇨. 다 친근감의 표시인데.”
“닥쳐! 꺼져!”
신교진이 도빈이의 팔을 쳐내며 버럭 외쳤다.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5층에 도착했다.
“가죠, 누나.”
주선오가 내 어깨를 살짝 앞으로 밀었다.
버럭버럭 악을 쓰는 신교진을 뒤로 하고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대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김지석과 연구소장 박효진이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불안한 듯 회의실 안을 서성이던 김지석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박효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박효진이 있는 걸 보니 게이트에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뭐지?’
회귀 전에는 간이 시험 전 기관에서 무언가를 한 게 없었기에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라. 소장님도 계시네? 무슨 일 생겼어요?”
뒤따라 회의실로 들어온 신교진이 물었다.
“조금 급한 안건이라.”
김지석이 탁자 위의 종이를 하나 집어들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쪽 면에 일정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니 스케치북을 한 장 찢은 것 같았다.
“이거 좀 보시겠습니까?”
김지석이 내게 그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낙서 같은 그림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건…?’
검은색으로 가득 채워진 종이에 하얀색의 선들이 덧대어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잔뜩 찍힌 하얀 점들.
중앙에는 얼굴보다 더 커다란 뿔이 달린 기다란 생명체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 앞에는 그것의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의 형체가 하나 있었다.
그냥 두루뭉술한 사람의 형태였지만 그 사람의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선오 오빠.
“뭐예요?”
신교진이 그림과 주선오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이게 주선오라는 거예요?”
“나라가 기억 현상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기억 현상?”
주선오가 묻자 김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최근에 나라가 새로 얻게 된 스킬입니다. 예지와는 다르게 장소에서 일어날 사건을 볼 수 있어요.”
“…장소에서 일어날 사건이요?”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김지석을 바라보았다.
“네.”
“이게 어딘데요?”
“충남 논산입니다.”
신교진의 질문에 김지석이 대답했다.
‘그럼 이건….’
“…게이트 브레이크라는 겁니까?”
주선오가 굳어진 얼굴로 김지석에게 물었다.
그때 박효진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맞아요. 게이트 브레이크.”
모두의 시선이 박효진에게 쏠렸다.
나는 다시 나라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다고?’
회귀 전 이맘때에는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게이트 브레이크는 초반의 대전과 목포에서 일어난 2번의 게이트 브레이크를 제외하면, 모두 기관의 통제 하에 일어난 게이트 브레이크였다.
왜 회귀 전에 없었던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예정인지, 왜 논산의 게이트에서 나라의 기억 현상 스킬을 쓴 건지는 의아했지만.
일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건 반드시 일어날 일.’
“나라 예지 스킬, 확인했나요?”
내 질문에 김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다행히 하루 이내에 일어날 일은 아니었는지 눈이 온다는 이야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다행이었다.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뜻.
“혹시 몰라서 권 선생님과 나라가 그곳에 머물고 있긴 합니다. 저희는 이야기를 전하려고 올라왔고요.”
“관장님은요?”
그러고 보니 이런 중요한 사안을 다루는 자리에 관장인 안세인이 없었다.
“관장님은 벌써 출발하셨어요. 하루 이내에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해도 권 선생님이랑 나라만 두기에는 조금 불안하니까요.”
“그리고 마침 근처에 문기훈 씨가 있어서 일단 지원을 요청해둔 상태입니다.”
김지석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멈칫하며 김지석을 바라보았다.
“문기훈 씨요?”
미등록 각성자 무리의 부단장이었던 문기훈.
그는 여전히 종적을 감춘 미등록의 잔당을 쫓는 중이었다.
“네. 그 게이트, S급 종합 보상 게이트거든요. S급 게이트의 브레이크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미리 대비를 하고자 해서 최대한 랭커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는 거고요.”
박효진이 설명했다.
“…저,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윤도빈이 살짝 손을 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윤도빈에게 쏠렸다.
윤도빈이 의아한 듯 물었다.
“하루 안에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들어가서 닫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확실히 하루라는 여유가 있으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권재경과 안세인, 문기훈이라면 셋이서 충분히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부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곳에 모여 있다.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그때 박효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실 간이 시험 전에 다른 각성자들이 쓸 수 있는 방어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혹시 시간 내에 브레이크를 일으킬 게이트가 있는지 찾아보는 중이었고요.”
“…그래서 지금 그 게이트를 브레이크가 일어나도록 두겠다는 겁니까?”
주선오가 인상을 쓴 채 박효진에게 물었다.
박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러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여러분의 의견을 구하고자 모신 거예요. 사실 나라의 기억 현상으로도 조건에 맞는 게이트를 찾지 못할 확률이 커서…. 괜히 설레발을 쳐서 여러분이 이 일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미리 말을 안 했던 거고요.”
기관 연구소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각성자들을 지원해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방어구를 만들어준다는 발상은 나쁘지 않아. 하지만 이건….’
나는 다시 나라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림만 봐서는 어떤 몬스터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얼굴보다 더 큰 뿔이 달린 큰 키의 몬스터.
나는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김지석에게 물었다.
“근데 나라의 기억 현상은 반드시 일어날 일 아닌가요?”
“아. 나라의 스킬 설명을 전해들은 바로는 그런 것 같습니다.”
김지석이 대답했다.
“그럼 저희가 무슨 결론을 내려도 게이트 브레이크는 일어난다는 말이네요.”
“…그렇네?”
신교진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선오가 내 말을 받아 추측했다.
“그럼 만약 거기에 계신 세 분이 게이트에 입장하더라도 클리어를 하기 전에 브레이크가 일어나겠군요.”
“…그렇네.”
신교진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에 박효진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게 되게 어려운 이야기 같긴 해요.”
만약 박효진이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키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라의 기억 현상이 그려낸 그림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까?
확인해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박효진이 이런 일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기관이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 각성자들을 파견했을 것이다.
“이 게이트 이전에 확인했던 게이트들은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기억 현상이 없었어요. 그러니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에 게이트가 닫혔다는 이야기가 되죠. 일단 그런 게이트들은 기관에서 바로 각성자들을 파견해서 닫게 해뒀고요.”
관자놀이에서 손을 뗀 박효진이 팔짱을 끼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게이트 브레이크에 대한 기억 현상이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게 맞는 거고.”
“그곳에는 주선오 씨가 있을테고요.”
김지석의 시선이 주선오에게 머물렀다.
“…뭔가 좀 머리가 아플 것 같은데요.”
신교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윤도빈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기억 현상으로 읽어내는 장소의 기억이라는 게, 정해진 미래인지. 아니면 우리가 행동한 것에 영향을 받아 바뀐 미래인지 알 수가 없는 거죠.”
박효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후자 쪽이 맞아.’
나는 이미 한 번 겪어본 삶을 다시 살아가는 중이었다.
회귀 전에는 클리어됐던 게이트가 이번에는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이유는 뻔했다.
‘내 행동에 대한 결과.’
회귀 전에는 죽었어야 할 각성자들이 살아있고 각성자들의 위치와 소속 또한 많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들이 영향을 미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도아 씨가 말한 대로 진행이 될 것 같긴 합니다.”
김지석이 말했다.
나는 들고 있던 나라의 그림을 다시 김지석에게 건넸다.
“내려가 보는게 좋겠네요.”
브레이크가 일어날 게이트는 S급 종합 보상 게이트.
게다가 그림만으로 몬스터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이번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누군가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막아야 해.’
종이를 받아드는 김지석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
김지석이 윤도빈과 주선오, 신교진을 돌아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선오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나라의 기억 현상에서라면 주선오는 그곳의 게이트 앞에서 몬스터와 맞닥뜨리게 된다.
만약 내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그럼 나라의 기억 현상이 틀리게 되는 건가?’
의아했지만 그걸 확인해 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게이트 브레이크에 몬스터가 하나만 나타나리라는 법은 없었다.
다수의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나보다 주선오의 검격증폭이 훨씬 유리했다.
신교진과 윤도빈 역시 좋은 전력이 될 터.
“가자. 셋 다.”
“알겠습니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주선오와 다르게 신교진은 금세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뭐야. 내가 무슨 가자면 가는 사람인 줄 알아요?”
하지만 박효진이 신교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좋아요. 저는 그럼 그놈들 사체 수습할 준비 한 다음에 따라갈게요.”
“혹시 모르니 리나 씨에게도 동행을 요청할까 싶습니다만. 괜찮을까요?”
이번에는 김지석이 주선오에게 물었다.
“연락해보겠습니다.”
“그럼 한 시간 뒤에 출발하도록 하죠.”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네.”
신교진만 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