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아. 눈 온다.”
하얀 눈밭을 밟고 걸어다니던 나라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하늘색 손모아장갑을 낀 작은 손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옆에 양손검을 꽂아둔 권재경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
어제 나라가 했던 예지가 맞아 떨어졌다.
권재경은 떨어지는 눈송이들 사이를 뛰어다니던 나라를 불렀다.
“나라야.”
그러자 멀리 뛰어갔던 나라가 권재경에게로 돌아왔다.
아이의 코와 볼은 빨개져 있었다.
권재경은 무릎을 굽혀 앉아 나라의 목도리를 고쳐 맨 후 반쯤 벗겨진 모자도 다시 씌워주었다.
“어제 나라 예지대로 눈이 오네. 그렇지?”
나라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권재경에게 물었다.
“응, 아빠. 이제 그거 또 쓸까?”
이제는 먼저 스킬을 사용할까를 묻는 나라가 대견하고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겨우 여섯 살 아이인데.’
나라는 벌써 변해버린 세상에 적응을 해버렸다.
나라가 살아갈 세상은 계속 이대로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게이트가 없고 각성자가 없던 시절을, 나라는 영원히 모를지도 몰랐다.
“아빠? 어디 아파?”
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그마한 손을 권재경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어느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냐. 아빠 괜찮아.”
권재경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 그럼 스킬 쓴다?”
권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는 눈을 감은 후 중얼거렸다.
“예지.”
잠시 후.
나라가 다시 눈을 떴다.
권재경은 마른침을 삼키며 나라에게 물었다.
“뭐가 보였어?”
“눈보라를 조심하래.”
“눈보라…?”
권재경이 주변을 살폈다.
아직 눈은 흩날리는 정도였다.
‘눈보라라면….’
권재경의 머릿속에 어제 나라가 그렸던 기억 현상의 그림이 떠올랐다.
나라의 그림은 검은 배경 위에 덧대어진 하얀 선들이 두서없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를 하얀 점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혹시 그게 눈보라였나?’
여섯 살 막바지의 아이가 그린 그림으로는 정확한 판별이 힘들었다.
“근데 눈보라가 뭐야?”
나라가 물었다.
“아.”
퍼뜩 정신을 차린 권재경이 나라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금 내리는 눈 있지? 이게 센 바람에 날리는 걸 눈보라라고 해.”
하지만 나라는 여전히 이해가 잘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왜 눈보라야? 그냥 눈이랑 바람이 합쳐진 거면 눈바람 아냐? 센 바람이면 어느 정도 세야 돼?”
피식 웃은 권재경이 아이의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라가 날아갈 정도로 센 바람에 눈이 휘몰아치면 눈보라라고 부르는 거야.”
“으음….”
나라가 조그마한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생각에 잠겼다.
그때 게이트 주변의 통제를 돕기 위해 지원을 온 군인들과 이야기를 마친 안세인과 김지석이 부녀에게 다가왔다.
“권 선생님.”
“주변 통제는 잘 됐습니까?”
“네. 일단 반경 1km정도 이내는 모두 비워뒀습니다. 통제선 안쪽으로는 각성자 외에는 출입이 안 되고요.”
김지석이 대답했다.
“우리는 일단 게이트를 둘러싸고 대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권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안세인이 모자를 쓴 나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물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참, 나라가 다시 한 번 예지를 썼습니다.”
“아. 그러네. 눈이 오기 시작했군요. 그래서 어땠나요?”
눈발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권재경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눈보라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나라가 기억 현상으로 그려냈던 상황이 눈보라가 치는 때였던 것 같고요.”
“눈보라…. 그렇군요.”
안세인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럼 나라는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겠어요.”
김지석이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나라를 보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라 혼자 군인들 틈에 보내기가 영 불안하군요. 나라가 무서워할 것 같은데….”
권재경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씩씩하게 말했다.
“나 괜찮아, 아빠! 혼자 가 있을 수 있어!”
“와, 나라. 굉장한데?”
안세인이 씩 웃고는 나라의 머리를 다시 슥슥 쓰다듬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근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리나 씨가 오기로 했습니다.”
김지석의 말에 권재경이 멈칫했다.
“…리나 씨가요?”
“어? 리나 언니 와요?”
나라의 눈이 동그래지며 얼굴이 밝아졌다.
그에 김지석이 부드럽게 웃으며 나라의 앞에 앉아 말했다.
“네. 리나 씨가 와서 나라랑 같이 있어주기로 했어요.”
“신난다, 아빠! 리나 언니 온데!”
나라가 팔짝팔짝 뛰며 기쁨을 표했다. 하지만 권재경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요.”
이리나는 유일하게 치료 특성을 가진 각성자였다.
권재경이 바쁠 때마다 항상 자처해서 나라를 돌봐주었고 그가 다쳤을 때도 항상 치료를 해준 고마운 사람이지만.
최초의 책을 찾는 게이트에 다녀온 이후로 권재경은 그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리나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단순히 권재경의 착각일 뿐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냥 권재경 스스로가 조금 부끄럽고 끝날 일이었다.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군.’
하지만 함께 있을 때 느껴지는 시선과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반응하는 이리나의 모습은 권재경의 생각을 착각이 아닌 확신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야.’
권재경은 6살짜리 아이의 아빠였다. 게다가 5년 후에는 마흔 줄을 바라보는 중년의 보잘것없는 남자.
반면 이리나는 달랐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꽃다운 나이의 청년. 한순간의 착각으로 잘못된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권재경은 나라를 이리나에게 맡기는 횟수를 점점 줄여왔고 최근에는 나라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가기도 했다.
어차피 이런 세상이 지속된다면 빨리 적응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나라 덕분에 게이트 안의 상황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이점도 있었고.
‘…이번에는 어쩔 수 없군.’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지막으로 이리나의 손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아, 마침 오네요.”
안세인이 통제선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주선오와 신교진, 윤도빈, 그리고 이리나.
이리나를 발견한 나라가 그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언니!”
“나라야!”
나라를 발견한 이리나 역시 걸음을 빨리했다.
곧 나라가 무릎을 굽혀 앉은 이리나의 품에 폭 안겼다.
“리나 언니! 보고 싶었어!”
“으, 나라야. 언니도 나라 엄청 보고 싶었어!”
이리나가 나라를 꽉 끌어안았다.
권재경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기쁜 얼굴로 나라와 인사를 나누던 이리나의 시선이 곧 권재경에게 꽂혔다.
이리나가 환히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나라의 손을 잡고는 권재경과 안세인, 김지석에게 다가왔다.
안세인, 김지석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이리나가 밝아진 얼굴로 권재경의 앞에 섰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에요.”
권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입니다. 계속 도움만 받았는데 이번에도 또 그렇게 되는군요.”
권재경의 이야기에 이리나가 마구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오랜만에 나라랑 아저씨랑 보니까 정말 좋아요.”
이리나의 맑은 눈망울에 권재경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나라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나라야. 언니 말 잘 듣고 있어.”
“응!”
“그럼 리나 씨는 나라랑 잠시 물러나 있어요.”
안세인이 이리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다들 조심하세요.”
이리나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리나의 시선이 잠시 권재경에게 머물렀다.
그리고는 곧 나라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권재경은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날씨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나라의 예지처럼 금세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았다.
* * *
나는 마나 방패 위에서 땅을 내려다보았다.
까만 게이트와 꽤 떨어진 주변을 둘러싼 군인들의 통제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시 사람들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막음과 동시에 몬스터가 이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
후자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군인들도 자신들의 무기가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곳에 모인 각성자들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게이트 브레이크는 위험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살펴본 게이트의 정보를 떠올렸다.
[S급 종합 보상 게이트]
[설원과 연결된 종합 보상 게이트입니다.]
[웬디고들을 소멸시킬시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습니다.]
웬디고.
머리에는 커다란 뿔 두 개가 달린 길쭉한 생김새의 몬스터였다.
나라의 기억 현상에는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놈의 거죽은 반쯤은 벗겨져 마치 썩다 만 시체 같은 모습을 취했다.
그 때문인지 놈이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설원에 서식하는 놈이었지만 그 설원이 놈들 때문에 생겨난 설원인지 아니면 원래 존재하던 설원에 놈들이 정착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놈들은 몸에 닿는 것은 모조리 얼려버려.’
놈들이 디디는 땅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내쉬는 숨결에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 눈보라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각성자는 대체로 그 눈보라를 견뎌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웬디고를 공격하려면 체력이 꽤 소모될 것이었다.
놈들은 죽기 전까지 숨결을 내뱉을 것이고 눈보라 역시 그전까지 그치지 않을 터.
가장 좋은 방법은 웬디고가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죽이는 것이었다.
‘그게 최선이지만….’
놈들은 눈보라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레이크가 일어나게 되면 게이트 안과 밖의 환경은 이어지게 된다.
즉, 브레이크가 일어난다면 이곳에는 눈보라가 몰아칠 것이고, 눈보라가 치는 범위의 어느 곳에든 웬디고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 골치 아픈 것은 만약 눈보라 범위의 끝에 웬디고가 나타날 경우.
그러면 그 웬디고로 인해서 눈보라의 범위는 더욱 넓어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눈보라의 범위를 넓혀나간다면.
‘초반에 빠르게 잡지 못한다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야.’
웬디고가 하나뿐이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정보에 의하면 놈들은 여럿.
자칫 잘못하면 놈들이 무한대로 서식지를 넓히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작게 혀를 차며 주변을 살폈다.
‘이미 게이트의 영향을 받고 있는 건가.’
아직 게이트가 브레이크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눈발이 점점 세어지고 있었다.
‘최대한 각성자들을 넓게 배치해둬야겠어.’
나는 마나 방패를 천천히 아래로 이동시켰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높이에 다다랐을 때 마나 방패를 없앤 후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훅!
촥!
내가 눈 위에 미끄러지며 착지하자 낫을 지팡이 삼아 짚고 있던 윤도빈이 물었다.
“뭐 좀 봤어?”
“그냥. 통제 잘 됐네.”
“도아 씨.”
조금 떨어져있던 김지석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까만 권총집이 메어 있었다.
“나라가 눈보라를 조심하라는 예지를 했어요. 어제 그 그림이 눈보라였던 모양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까만 게이트를 등지고 안세인과 권재경, 주선오, 신교진, 윤도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문기훈이 내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마주 고개를 꾸벅인 나는 이곳에 모인 각성자들을 보며 말했다.
“나라 예지대로라면 하루 안에 브레이크가 일어날 거예요.”
“그렇죠.”
안세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제 생각에는 일단 한 곳에 모여 있기보다는 인원을 좀 나눴으면 해요.”
“나눈다고?”
윤도빈이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했다.
“일단 이사님이랑 교진이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니까 최대한 후방에 있는게 좋겠어요. 후방에서 지원을 해주는 쪽으로요.”
김지석과 신교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게이트 앞에는 선오만 남고 나머지 분들은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각자 다른 방향에서 대기해주셨으면 해요.”
내 말에 권재경이 조금 의문을 표했다.
“게이트 앞에서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근처에 있으면 선오가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어요. 뭐가 나오든 선오는 베어낼 수 있으니까 차라리 그 범위를 넓혀주는 게 좋아요.”
“음. 그럴 수 있겠네요.”
안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선오를 보며 물었다.
“지금 검격 증폭 최대 범위가 어느 정도야?”
정보를 보면 알 수 있었지만 일부러 주선오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어야 할 정보였기에.
주선오가 곧바로 대답했다.
“70미터 정도 됩니다.”
“그럼 관장님이랑 권 선생님, 문기훈 씨, 도빈이는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주세요. 문기훈 씨는 기동력이 좋으니까 좀 더 넓은 범위가 커버 가능하시죠?”
문기훈은 캥거루 신의 가호를 받은 각성자로 각력 강화 스킬을 통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빠르게 도약할 수 있었다.
“가능합니다.”
문기훈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넷에게 말했다.
“네 분은 선오만큼 범위 공격이 힘드니까 만약 선오나 제가 놓치는 놈이 있다면 처리해주시고요.”
“누나는 어디에 있게?”
윤도빈이 물었다.
“나는 위에 있을 거야.”
내가 위를 가리키며 대답하자 윤도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나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위쪽에 있어야 주선오의 공격 범위에 걸리지 않을 테니까.
나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혹시 상대하기 무리겠다 싶으면 버티지 말고 물러나세요.”
“알겠어요.”
“네.”
모두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김지석과 신교진이 뒤쪽으로 걸어갔고 남은 각성자들은 게이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서히 눈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