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언니, 왜 요새 안 와?”
이리나의 무릎에 앉은 나라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응? 우리 나라, 언니 기다렸어요?”
이리나가 그런 나라를 보며 웃었다.
“요새는 아빠가 게이트 들어갈 때 나도 데려가서 그래?”
“응. 나라가 그새 많이 커서 아저씨가 나라를 믿고 데려가는 것 같아.”
이리나가 나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게이트에 가는 걸 싫어하는 건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게이트 안에서는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환경과 몬스터들을 마주해야 했다.
아무리 보호자가 함께라고는 하지만 이런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들 터.
이리나가 나라의 눈을 마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게이트에 가는 게 싫어?”
이리나의 질문에 나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무섭긴 하지만 아빠랑 같이 있어서 좋아. 근데 언니랑도 같이 있고 싶은데….”
나라가 입을 비죽였다.
“으, 나라! 언니가 그렇게 좋아?”
이리나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나라의 볼을 문질렀다.
나라를 만나지 못해 서운한 건 이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워낙 착하고 귀여운 아이라 함께 있는 것이 좋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자신이 나라를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죄책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권재경을 만나기 위한 구실로써.
‘…아저씨.’
처음에는 그저 윤도아의 연락을 받고 치료를 해준 것 뿐이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이리나는 엄마가 없는 나라가 굉장히 신경 쓰였고 안타까운 마음에 나라를 돌봐주는 것을 자처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권재경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나라를 돌봐주며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일지도 몰랐다.
단순한 착각이 아닐까 싶어 한동안 권재경과 거리를 두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권재경 쪽에서도 한동안 나라를 돌봐줄 수 있냐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연락이 온다면 거절할 수 없었을 테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위험한 S급 게이트의 브레이크에 부상을 입는 각성자가 있을지도 몰랐고 나라를 혼자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올 수밖에 없었는데….’
막상 권재경의 얼굴을 보니.
자신의 감정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지.’
이리나는 나라를 끌어안은 채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나라가 이리나를 불렀다.
“언니, 언니.”
“어? 응, 나라야. 뭐라고 했어?”
퍼뜩 정신을 차린 이리나가 나라를 놓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굉장한 바람소리.
“밖에 바람 엄청나!”
차 안에 있던 이리나는 유리 너머의 밖을 살폈다.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군용트럭이 덜컹거릴 정도의 강한 눈보라에 바깥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라야, 이리…!”
이리나가 창문에 붙어 밖을 바라보는 나라를 끌어당기는데.
갑자기 무언가 트럭의 앞유리로 날아와 부딪혔다.
콰앙!
“꺅!”
이리나가 나라를 끌어안으며 그것을 살폈다.
눈보라에 휘말려 날아온 군인이었다.
이리나는 황급히 나라의 눈을 가렸다. 군인의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치…, 치료를…!’
이리나가 당황하며 안고 있던 나라를 내려두었다. 그리고는 외투를 벗어 그것으로 나라를 감쌌다.
“나라야, 여기 있어! 언니 요 앞에 잠깐만 나갔다 올게. 이거 꽉 붙잡고 있고. 할 수 있지, 우리 나라?”
“…응…!”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지만 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나는 나라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그리고 차 문을 열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쿵!
끼기기긱.
차를 울리는 소름끼치는 소리에 다시 앞유리를 바라보니.
길쭉하고 거대한 손이 군인을 잡아채고 있었다.
* * *
‘역시. 생각했던게 맞았어.’
주선오를 제외한 모든 각성자들이 각자의 자리로 향한 후. 나 역시 게이트 위쪽의 상공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나 방패의 위에 앉아 게이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눈보라가 심해짐에 따라 시야 역시 어두워졌다.
나는 탐지로 게이트를 살피기 시작했고 두어 시간 후,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확인해보려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지난번 생성되는 게이트에 마나로 간섭을 했을 때처럼, 확장되기 시작한 게이트에 간섭을 했을 때 차원 균열의 파편이 생성될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때, 파편이 게이트가 열리던 힘과 내가 간섭한 마나의 힘이 충돌해서 생긴 것이라면.
게이트가 브레이크를 일으키려 확장될 때 내 힘과 충돌하더라도 역시 파편이 생성되어야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성됐어.’
이제 게이트가 나타난 지 겨우 1년 정도가 된 시점이었다.
회귀 전과 달리 벌써 파편을 공급받을 수 있다면 게이트 안에서 죽음을 맞는 각성자들의 수가 줄어들 터.
두 번째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내 힘으로 게이트 브레이크를 조절할 수 있을까였다.
지난번에는 거의 회귀를 한 직후라 악마의 고양이 특성 레벨이 겨우 1이었다.
지금의 특성 레벨은 4.
그동안 특성 레벨이 올랐으니 어쩌면 게이트가 열리는 것을 제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힘이 부족해.’
아직은 게이트에 간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건 나중에 다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나는 탐지로 바닥을 살펴보았다.
파편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부러 파편이 생성되는 것을 확인 한 후, 브레이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간섭을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레….”
나는 습관적으로 레부를 불러 파편을 주워 먹게 하려다가 멈칫했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날씨라면 불꽃 슬라임인 레부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심연의 불꽃 안에서 차가워지려는 몸을 녹이고 있을 터.
괜히 잘못 불러냈다가는 불꽃이 꺼져 레부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모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부보다는 낫겠지만 그래도 눈보라에 모래가 얼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 남은 슬라임인 우부는 이미 진작 얼어붙어 있었다.
아직 어린 슬라임이라 이런 환경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한 이후로 진작 얼어붙은 우부는 고양이 모양의 얼음 덩어리가 되어 눈에 파묻혀가고 있었다.
‘…잘못 데려왔어.’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일단 파편을 챙기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눈보라가 그친 후 슬라임들을 불러 주워오게 해도 충분했다.
게이트가 브레이크를 일으키자마자 풍겨오기 시작한 악취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탐지로 주변을 살폈지만 내 탐지 범위 안에 웬디고는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게이트를 통해서 나오는 놈은 별로 없는 모양이군.’
유일하게 탐지에 주선오가 잡혔다.
그는 칼을 든 채 브레이크를 일으킨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베어낼 것은 없었다.
나는 마나 방패를 천천히 아래로 내려 바닥으로 이동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주선오가 놀라 칼을 휘두를까 봐 멀리서 그를 불렀다.
“선오야.”
잠시 멈칫한 주선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아 누나?”
“그쪽으로 갈 테니까 칼 휘두르지 마.”
“네.”
주선오가 얌전히 칼을 내렸다.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걸어갔다.
곧 흐릿한 무언가의 형체가 보였고 조금 더 걸어가자 눈에 파묻히다시피 한 주선오의 모습이 보였다.
자세는 곧았지만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 표정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악취를 견디기가 힘든가 보네.’
주선오에게는 후각 스탯이 있었다.
때문에 웬디고의 악취를 내가 느끼는 것보다 배 이상으로 받아들일 터.
그 때문에 내가 오는 방향을 잘 가늠하지 못한 것도 있는 것 같았다.
“브레이크는 일어난 것 같은데 아직 보이는 게 없습니다.”
주선오가 가까이 다가온 내게 말했다.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었음에도 주선오의 얼굴이 상세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나도 아직 발견한 건 없어.”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원래 곧바로 나오는 게 아니었나요? 저는 브레이크를 겪는 게 처음이라….”
“이전 게이트 브레이크 때에는 그랬었어. 근데 혹시 모르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놈이 다른 곳에 나타났을지도 모르고.”
“그럼….”
주선오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때 주선오가 흠칫 놀라며 게이트를 돌아보았다.
게이트와의 거리는 5미터 정도 되었기에 거뭇한 것이 있다는 것 외에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뭔가 나옵니다.”
주선오가 한층 강해진 악취에 손등으로 콧잔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게이트에서 나타난 것은 기다란 뿔이었다.
사슴의 것을 닮은 거대한 뿔.
그리고 그 아래로 부패한 허연 피부를 가진 사슴의 머리 같은 것이 나타났다.
곧 기다란 팔과 다리, 그리고 몸까지.
3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가늘고 기다란 놈이 흉측한 모습을 모두 드러냈다.
“웬디고다.”
주선오가 내 말을 되씹었다.
“웬디고….”
그리고는 칼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베겠습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빨 벼림. 검격 증폭.”
주선오가 스킬을 발동하며 칼을 휘둘렀다.
서걱!
깔끔한 검격이 게이트와 함께 놈을 갈랐다.
웬디고가 걸음을 내딛자.
잘려나간 허리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쿵!
‘보이지 않는 손.’
나는 스킬을 이용해 심연의 불꽃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을 아직 살아 움직이는 웬디고의 심장에 내리 꽂았다.
콰직!
허연 살점이 불꽃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억—!”
웬디고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놈은 뼈만을 남긴 채 하얀 눈으로 부서져 내렸지만 근처를 맴도는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군요.”
주선오의 말에 나는 심연의 불꽃을 거둬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체모를 것에 의해 들어올려진 군인은 순식간에 위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저, 저게 뭐야…!’
동시에 기묘한 악취가 차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리나는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삼켰다.
하지만 이렇게 겁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리나의 외투를 뒤집어쓰고 있는 나라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칭얼거리고 있었다.
“으…. 으으….”
“…나, 나라야. 자, 잠깐만 이대로 있자. 언니 여기 있어.”
이리나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외투를 뒤집어쓴 나라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이곳은 게이트에서 1k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통제선이었다.
이곳에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건.
‘설마….’
게이트 앞의 각성자들에게 뭔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치솟았다.
‘…아저씨…!’
이리나는 불안한 얼굴로 눈보라 속을 바라보며 손끝을 물어뜯었다.
‘어쩌지?’
만약 그들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이리나의 도움이 필요할 터.
하지만 이리나에게는 저 몬스터를 죽일만한 스킬이 없었다.
그때.
쿵!
덜컹!
이리나와 나라가 타고 있던 군용트럭이 세게 흔들렸다.
“아, 아빠아….”
나라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괘, 괜찮아. 나라야. 언니 여기 있어.”
이리나가 떨리는 손으로 나라를 토닥였다.
애써 나라를 달래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았다.
쩌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나가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자.
차의 문틈 사이로 서슬 퍼런 얼음이 침투하고 있었다.
“!”
놀란 이리나가 나라를 안아들고 중앙의 좌석으로 이동했다.
하얀 연기와 함께 번지는 얼음은 상당히 위험해보였다. 왠지 저 얼음에 닿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얼음은 차의 유리와 대시보드, 시트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쩌저적.
이리나는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나라를 뒤덮었던 자신의 외투를 들췄다.
작은 아이가 덜덜 떨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나라야, 우리 여기서 나가야 할 것 같아. 눈 꼭 감고 있어. 알겠지?”
이리나의 말에 나라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왼손으로는 나라를 꼭 안아든 채로 외투를 덮은 오른손을 차문을 향해 뻗었다.
외투로 감싼 이리나의 손이 얼어붙은 문손잡이에 닿았다.
덜컥!
하지만 이미 꽁꽁 얼어붙었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 안 열려!’
게다가 문에 닿은 옷에까지 얼음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손을 뺀 이리나는 이번에는 발로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쿵!
쿵!
하지만 역시나 열릴 리 없었다.
오히려 이리나의 신발에까지 얼음이 번져버렸다.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안 돼!’
그녀는 빠르게 신발을 벗어던졌다.
그 사이 얼음은 이리나가 앉아있는 중앙의 시트에까지 번져왔다.
쩌저적.
‘누, 누가 좀…!’
이리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나라를 끌어안았다.
그때.
똑똑.
선명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나는 번쩍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어라…?’
여전히 날은 흐렸고 바닥에는 눈이 쌓여있었지만 눈앞을 흐리게 만들던 눈보라는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차의 보닛 위에 누군가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까만색의 후드 집업에 군데군데가 찢어진 청바지.
바깥의 추운 한겨울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누구…!’
그의 얼굴을 본 이리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해골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건 까만 마스크 위에 프린트된 그림일 뿐이었다.
코와 입을 덮은 마스크 위로 꼬리가 살짝 처진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후드의 모자를 푹 뒤집어쓴 그가 옆을 가리켜보였다.
‘옆?’
이리나가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보라와 마찬가지로 차 안을 잠식해오던 얼음 역시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없어졌어!’
놀란 이리나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닛 위는 텅 비어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