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쿵!
보닛 위에서 미끄러진 남자가 뒤통수를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오, 머리야.’
남자의 눈끝에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골 깨져서 골로 갈 뻔 했네.’
속으로 투덜거리던 그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멈칫했다.
‘골 깨져서 골로….’
“크크크….”
잠시 남자의 어깨가 들썩였다.
숨죽여 웃던 그는 곧 웃음을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뒤집어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졌다.
이리저리 뻗친 붉은색의 짤막한 머리카락이 몰아치는 눈에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는 가볍게 머리카락 위의 눈을 털어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앞은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저짝.’
확신을 한 그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눈에 미끄러져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철퍽!
“…쓰읍, 아파라….”
이번에 넘어진 것은 상당히 아파 보였지만.
그는 상당히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손으로 얼굴에 묻은 눈들을 훑어낸 후 다시 모자를 뒤집어 쓴 채 걸음을 옮겼다.
* * *
“와, 진짜 하나도 안 보여!”
신교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신교진의 입으로 눈발이 들이쳤고 그는 한참을 퉤퉤거리며 눈을 뱉어내야 했다.
“우웩!”
주변에서 풍겨오는 악취 때문에, 신교진에게는 입에 들어간 눈발도 악취의 근원같이 느껴졌다.
헛구역질을 해대는 신교진을 꽉 붙잡고 있던 김지석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형, 진짜 토할 것 같으니까 그만해요.”
신교진이 김지석의 손을 밀어냈다.
잠시 바람에 휘청인 김지석이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브레이크가…. 일어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으, 추워! 그런 것 같죠?”
신교진이 오들오들 떨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윤도아의 말을 듣고 게이트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고 한 시간 쯤 후.
점점 굵어지던 눈발은 곧 거센 바람을 동반한 눈보라로 변했다.
눈보라는 둘의 시야를 차단했고 언제부터인지 기묘한 악취까지 풍겨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눈발에 이미 둘은 눈사람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다가 눈보라가 계속 휘몰아치니 온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다시 바람이 불어오자 김지석이 신교진의 외투 모자를 꽉 붙들었다.
“켁!”
그 바람에 잠시 목이 졸렸지만 신교진은 그에게 딱히 무어라 핀잔을 주지는 못했다.
본인이 이 정도 바람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얼마나 착잡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이 형은 너무 신경 쓴단 말야.’
각성자라고 모든 사람이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자신처럼 실력보다는 운이 뛰어난 각성자도 있고 이리나처럼 회복 능력이 뛰어나거나 최은서처럼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데 뛰어난 각성자도 있었다.
김지석도 그런 쪽이었다. 공격보다는 도망에 특화된 각성자.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몬스터의 위협에서 가장 빨리 도망칠 수 있는 것이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가 갖고 있는 지위 때문인 것 같았다. 각성 기관의 이사라는 책임감 때문에.
김지석이 추위 때문에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게이트 근처 분들이 걱정이네. 앞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으니 몬스터가 나타나도 알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브레이크가 일어났다면 그 안의 몬스터들이 확장된 게이트를 통해 이곳으로 이동했을 터.
그렇다면 가장 먼저 표적이 될 사람들은 게이트 근처의 각성자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각성자들은 세계 랭킹 1, 2위와 국내의 상위권 랭커들. 그리고 미등록이지만 랭커와 맞먹는 실력의 각성자까지 있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섣불리 공격을 하기는 힘들 터였다.
잘못 공격을 감행했다가 다른 각성자가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게다가 영 익숙해지지 않는 이 악취 또한 상당한 문제였다.
특히 각성을 하면서 후각이 예민해진 주선오는 어쩌면 전투의지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방법이….’
잠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신교진이 김지석을 보며 물었다.
“화, 활 쏴볼까요?”
김지석의 눈이 커졌다.
“활을?”
“호, 혹시 모르잖아요. 형 말대로 개, 추워! 아오! 개선오나 관장님이나, 다, 다들 앞이 안 보여서 몬스터들한테 당할지도 모르는, 거고….”
“하지만 너도 지금 앞이…. 아.”
걱정스럽게 이야기하던 김지석이 뭔가를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거세게 부는 바람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야. 활을 쏘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지만.
신교진은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 있는 운을 가진 각성자였다.
“…그렇겠네….”
김지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 쏘, 쏴봐야겠어요.”
신교진은 활을 고쳐 잡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으, 어, 어디가 게이트였죠?”
눈보라 때문에 어느 쪽이 게이트가 있는 곳이었는지 방향조차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음….”
김지석 역시 방향 가늠이 힘든지 시원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교진의 운에 모든 것이 걸린 상황.
그는 곧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위를 당겼다.
“아! 모, 모르겠으니까 그냥 쏠래요.”
그가 추위에 얼어붙은 손으로 힘껏 시위를 당기자, 텅 비어있던 활에 빛의 화살이 생성되었다.
그 이후에도 활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리던 신교진은 곧 한 지점을 겨냥했다.
“이쪽!”
핑!
신교진이 시위를 놓자 빛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화살은 금세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김지석과 신교진은 잠시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근데 결과를 알 방법이 없….”
신교진이 말을 꺼내는 중.
“으아악!”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놀란 김지석과 신교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 사람…, 비명 같죠?”
“…그런 것 같은데….”
둘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렸다.
“그런데 이 근처에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우리 이동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분명 둘은 게이트와도 그렇고 군인들의 통제선과도 거리가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근처에서 비명이 들렸다는 건 누군가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통제하고 이, 있으니까 일반인은 못, 들어올걸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김지석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정도 눈보라라면 분명 통제선 쪽도 멀쩡하다고 볼 수는 없어. 그쪽에도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라.”
“그, 일단 그건. 아오, 진짜 추워 뒤지겠네! 아, 암튼, 비명 들린 쪽으로 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사람이 맞았을 확률은 적었지만 그래도 불안하니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계속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가는 몸이 얼어붙어 정말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보자.”
김지석이 신교진의 모자를 꽉 붙잡은 채 말했다.
“…형. 절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냥 팔을 잡아주세요.”
“아, 응. 미안.”
김지석이 신교진의 모자에서 손을 떼고 그가 내민 팔을 붙잡았다.
둘은 눈보라를 헤치며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이동했다.
“이쪽이 맞나…?”
김지석이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맞는 거 같은, 데요. 뭐, 마, 맞겠죠.”
신교진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계속해서 걸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오히려 감고 있는 것이 차라리 눈에 차가운 눈발이 닿지 않아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인상을 찌푸린 신교진이 투덜거렸다.
“이거 뭐 앞이 안 보이니 가다가 몬스터를 차도 모르겠는.”
퍽!
“으억!”
“컥!”
신교진이 무언가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쌓인 눈 위에 얼굴을 박았기에 망정이지, 눈이 없었으면 그대로 땅바닥에 얼굴을 박을 뻔 했다.
“교, 교진아….”
뒤에서 신교진의 팔을 놓쳐 넘어지지 않은 김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뭐가…!”
상체를 들며 몸을 일으키려던 신교진의 발에 뭔가 다시 채였다.
오싹.
순간 신교진은 정말 자신의 생각대로 몬스터를 찬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때 발쪽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으억, 차, 차지 마요!”
“흐익?”
신교진이 화들짝 놀라며 잽싸게 몸을 일으킨 후 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쓰러져있는 사람이 있었다.
“사, 사람?”
신교진이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으으….”
까만 후드를 뒤집어쓰고 넝마 같은 청바지를 입은 그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당황한 김지석은 빠르게 그를 살피며 생각했다.
‘정말로 통제선이 무너진 건가?’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이 사람은 이런 눈보라가 치는 지역에 있기에는 너무 얇은 옷차림이었다.
어쩌면 근처에 있다가 눈보라에 휩쓸려 이곳까지 오게 된 일반인일지도 몰랐다.
김지석은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게다가 또 한 가지의 걱정.
신교진이 쏜 화살이 이 사람을 맞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지석은 빠르게 눈으로 그를 훑었다.
앞으로 넘어졌던 신교진 역시 김지석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후다닥 기어와 그를 살폈다.
잠시 후, 둘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에게 신교진의 화살은 꽂혀있지 않았다.
그제야 신교진은 이제야 입을 열어 잔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데 누워있으면 당연히 발에 차이는 거 아닙니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내가 뭐 투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여기 드러누워 있어요?”
“잠깐, 교진아.”
김지석이 당황하며 신교진을 말렸다.
정말 브레이크에 휘말린 일반인이라면 이 사람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다.
그때 남자가 배를 움켜쥐고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 쫌…. 넘어져서 인나는 중인데 갑자기 그렇게 차뿌믄….”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턱 쪽이 까만 것이 뭔가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김지석이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여긴 왜 들어오셨습니까?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예정이라 통제 중이었는데.”
그가 고개를 들자 해골의 턱이 프린트되어 있는 까만 마스크가 보였다.
그걸 본 신교진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눈 위에서 미끄러진 신교진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김지석과 남자의 시선이 신교진에게 쏠렸다.
“워, 아프겠다. 근데…, 어?”
마스크 위로 보이는 처진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더니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와, 신교진 행님이다!”
김지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신교진을 보며 물었다.
“아는 분 이야?”
하지만 신교진은 영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모르겠는데요. 나 알아요?”
“와, 진짜네. 알지요! 국내 랭킹 6윈데! 제가 상위 랭커들은 달달 외우고 댕기죠.”
남자가 격한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김지석은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각성자이십니까?”
“당연하죠. 각성자가 아니면 제정신으로 여 있겠어요?”
남자가 마구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교진에게 불쑥 양손을 내밀었다.
“악수 한 번만 해주시면 안돼요?”
신교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그가 신교진의 손을 덥석 잡고는 위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오, 진짜 랭커를 보네! 혹시 여기에 랭킹 1, 2위도 있어요? 이왕 보러 온 거 다 보고 싶은데.”
신교진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는 손을 빼냈다.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남자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신교진을 보며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브레이크가 끝날 때까지 그러고 있을 기세였기에 김지석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혹시 조금 전에 비명을 지른 것도 당신입니까?”
“비명요? 예. 저요. 갑자기 번쩍이는 게 날라와서 놀래가지고…”
신교진에 대한 감탄을 멈춘 그가 김지석을 돌아보았다.
“어라, 잠깐만.”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뜬 채 김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또 다시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김지석 이사님이었네!”
“…네?”
그는 김지석까지 알아보았다. 남자는 이번에는 김지석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와, 이사님! 저도 각성자예요. 랭킹 15위라 아실랑가? 설재민이라고 경상도에서 활동 중인데….”
그 말에 김지석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김지석은 어느 정도 상위권의 랭커들은 모두 기억을 하고 있었다.
설재민 역시 기억에 남은 이름 중 하나였다.
경상도 쪽에서 활동 중인, 설표 신의 가호를 받은 20살의 어린 각성자.
“설재민 씨가 왜 여기에…?”
김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브레이크 일어난다는데 랭커들도 온다 해서 구경 왔어요. 다른 랭커들도 다 와있어요? 진짜? 어데요?”
설재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다 오긴 했습니다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브레이크 때문에….”
김지석이 설재민에게 꽉 쥐인 손을 빼내려하며 말했다.
하지만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김지석의 힘으로는 손이 빠지지 않았다.
“아, 맞네. 어, 혹시 추워요?”
가늘게 떨리는 김지석의 팔을 내려다본 설재민이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아니 그쪽은 이런 날씨에 무슨 옷을 그렇게 입고 있어요? 보는 내가 다 얼어 죽겠네, 진짜.”
옆에서 신교진이 설재민을 쏘아보며 투덜거렸다.
“아. 그라믄 진작에 말씀하시지.”
설재민은 그제야 김지석의 손을 놓았다.
김지석이 창백해진 손을 터는 사이 설재민은 왼손을 가볍게 튕겼다.
딱!
“뭐야? 갑자기 손가락은 왜 튕기는….”
투덜거리던 신교진이 말을 멈췄다.
김지석 역시 손이 저려오는 걸 잊고 멍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