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날이 갠 것은 아니었다.
신교진과 김지석의 옷에 잔뜩 묻은 눈이 아니라면 조금 전까지 눈보라가 몰아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것 같았다.
그럼에도 김지석과 신교진은 설재민의 능력에 감탄할 틈이 없었다.
주변의 눈보라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기다란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에.
“…저게 뭐야….”
신교진이 경악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3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길고 가느다란 생명체였다.
뿔 두 개가 달린 사슴의 머리와 온몸의 하얀 거죽은 거의 부패해서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군데군데 벌어진 살갗의 사이로 근육과 뼈가 드러나 보였다.
놈의 가슴부근에는 신교진이 쏘았던 빛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와, 형. 저기 제 화살이….”
자신의 화살을 보고 반갑게 말을 꺼냈던 신교진이 사그라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닥 소용은 없는 것 같지만요.”
놈은 쓰러지기는커녕 그저 느릿한 움직임으로 눈이 멈춘 주변을 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웬디고….”
김지석이 중얼거렸다.
“…웬디고요?”
신교진이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김지석에게 되물었다.
신교진보다 각성은 늦었지만 김지석은 어느 정도 몬스터들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힘이 없으면 정보라도 잘 알고 있어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게이트 안의 몬스터들은 대부분이 신화나 전설 등에 나타나는 몬스터와 비슷한 형태를 취했기에, 그는 각성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온갖 몬스터들에 대해 공부를 해왔다.
“눈보라를 일으키는 몬스터야. 그래서 이렇게 심하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였어.”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것을 보자마자 웬디고의 가능성을 떠올렸어야 했다.
하지만 김지석은 놈을 직접 보고서야 그것을 깨달았기에 그 사실을 자책했다.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때 웬디고가 셋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알이 데구르르 굴러 셋에게 향했다.
“…어후, 눈알 봐….”
신교진이 슬쩍 한 걸음 물러서며 활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김지석이 신교진의 활을 막았다.
“소용없어.”
“네?”
“일반적인 물리 공격으로 웬디고를 죽일 수는 없어.”
“그럼요?”
“설원에 사는 몬스터인 만큼 불에 약해. 물론 몸을 부수면 제압은 가능하겠지만 완벽하게 죽이려면 불로 심장을 꿰뚫어야만 해.”
김지석의 설명에 설재민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쩐지. 와 안 죽는가 했네.”
그 말에 김지석과 신교진의 시선이 설재민에게 쏠렸다.
“뭐야, 잡아봤어요?”
신교진의 물음에 설재민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잡지는 몬했고. 아까 저짝서 하나 누파놓고 왔어요.”
“제압한 건가요?”
김지석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핑거 스냅 한 번으로 눈보라를 멈춘 것도 그렇고 웬디고를 제압했다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설재민이 가진 설표 신의 가호는 냉기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셋을 바라보던 놈이 기다란 다리 하나를 앞으로 내딛었다.
쿵.
쩌저저적.
놈이 디딘 땅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발끝에서 시작된 얼음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얼마나 강한 냉기를 품고 있는지 얼음이 얼어붙음과 동시에 냉각된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척 보기에도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와. 난리 났네.”
신교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김지석은 빠르게 퇴로를 살폈다.
“일단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하지만 그때 설재민이 자신 있게 둘의 앞으로 나섰다.
“아뇨. 제가 할게요, 그냥. 아까도 해봤으이 또 하믄 되죠, 뭐.”
“괜찮겠습니까?”
김지석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지만 설재민은 엄지를 척 치켜세워보였다.
그리고는 손을 옆으로 뻗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얼음 조형.”
설재민의 중얼거림과 함께 옆으로 뻗은 그의 손 안에서 얼음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비죽비죽한 돌기들이 솟아난 기다란 기둥의 끝에 초승달 모양의 투박한 얼음이 생성되었다.
설재민이 그것을 바닥에 내리치자.
투두두둑!
투박하게 자라났던 얼음 돌기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설재민의 손에는 날렵한 모양의 얼음 언월도가 남아있었다.
“야, 얼음!”
설재민의 발밑으로 번져오는 얼음을 보며 신교진이 외쳤다.
하지만 설재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내딛었다.
그의 발이 웬디고의 얼음 위에 내려서자.
화아악!
기세 좋게 번지던 얼음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사라져버렸다.
“…허.”
신교진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역시 괜히 자신 있게 나선 게 아니었어.’
김지석은 언월도를 든 채 살짝 자세를 낮추는 설재민을 관찰했다.
그는 웬디고의 얼음을 상쇄시키며 눈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스노우 보드를 타는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그어어어—!”
웬디고가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설재민을 향해 기다란 팔을 휘둘렀다.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놈이 휘두르는 손의 궤적을 따라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웬디고의 손이 설재민에게 닿으려는 순간.
“흣차!”
설재민이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가 위로 힘껏 뛰어올랐다.
훅!
순식간에 웬디고의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설재민은 양손으로 언월도를 잡고는 온몸의 반동을 이용해 그것을 휘둘렀다.
챙강!
얼음 언월도의 날카로운 날이 웬디고의 가슴에 닿자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설재민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 금이 간 웬디고의 가슴에 언월도를 찔러 넣었다.
카각!
얼음 언월도가 웬디고의 갈라진 가슴에 깊이 박혀들었다.
언월도를 놓고 바닥에 착지한 설재민은 그대로 눈 위를 미끄러지며 휘청이는 웬디고의 다리 사이를 지나쳤다.
쿵!
웬디고가 바닥에 쓰러졌다.
설재민이 꽂아넣은 언월도가 빠르게 해체되었다.
설재민은 몸을 돌려 쓰러진 웬디고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쩌적!
웬디고의 위쪽 허공에 커다란 고드름이 다섯 개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대로 웬디고를 향해 내리꽂혔다.
쩡!
날카로운 고드름이 웬디고의 가슴과 양팔, 그리고 양다리에 깊이 박혔다.
김지석은 그런 설재민을 보며 감탄했다.
그의 냉기를 다루는 능력은 웬디고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그렇기에 웬디고는 설재민의 얼음 고드름에서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눈 위를 미끄러지던 설재민이 신교진과 김지석을 보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보였다.
그런 그에게 신교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야, 뒤!”
“예?”
설재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것보다 밭둑에 발이 걸리는 것이 먼저였다.
“으악!”
쿵!
설재민은 밭둑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김지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신교진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휴. 저런 놈이 15위라니.”
* * *
안세인은 자신의 주먹을 들어올렸다.
너클을 낀 주먹의 위로 두터운 얼음이 꽝꽝 얼어있었다.
그 때문에 주먹은 평소의 두 배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손의 감각은 마비된 지 오래였지만 어차피 주먹을 휘두르는 데 감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음이 워낙 단단하다보니 오히려 웬디고를 때려부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퍼억!
안세인이 주먹을 휘둘러 웬디고의 무릎을 후려치자, 놈의 무릎이 반대방향으로 꺾이더니 뚝 부러져버렸다.
쿵!
다리 하나를 잃은 웬디고가 바닥에 쓰러졌다.
안세인은 곧바로 놈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부패한 살갗 사이로 보이는 심장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쾅!
안세인의 주먹 위에 얼음이 한 겹 더 얼었지만 웬디고는 가슴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완벽하게 죽이지는 못했지만 이정도 제압으로 충분했다.
‘두 마리째.’
안세인이 주먹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거세게 몰아치던 눈보라는 꽤 가라앉아 이제는 어느 정도 시야가 트인 상태였다.
확장된 검은 게이트를 중심으로 군데군데에 쓰러진 웬디고들이 보였다.
멀리 얼어붙은 낫을 휘둘러 웬디고의 허리를 베어내는 윤도빈이 보였다.
반대쪽에는 권재경의 양손검이 꽂힌 웬디고가 누워있었다.
‘문기훈 씨는….’
그때 안세인의 뒤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앙!
안세인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가슴이 산산조각난 웬디고가 멈추어 서 있었다.
웬디고의 가슴을 뚫고 눈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던 문기훈이 창으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문기훈이 멈춰서는 것과 동시에 웬디고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문기훈이 안세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안세인이 씩 웃었다.
문기훈의 시선이 안세인의 얼음 주먹으로 향했다.
“손이….”
안세인은 양손을 들어보였다.
“하하. 멋있지 않나요? 새 무기가 생긴 것 같아서 좋네요. 무겁긴 하지만 그만큼 힘도 더 실리고.”
그녀의 호탕한 웃음에 문기훈 역시 살짝 웃었다.
웬디고를 직접적으로 공격한 문기훈의 창도 얼음으로 뒤덮여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눈보라가 그쳐가는 걸 보니 거의 정리가 된 모양입니다.”
문기훈이 얼어붙은 창으로 바닥을 짚고는 주변을 살폈다.
더 이상 몸을 세우고 있는 웬디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확장된 까만 게이트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아직 브레이크는 끝나지 않았어.’
그 앞에는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는 주선오가 있었다.
‘도아 씨는….’
안세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위쪽에 있겠다고 한 윤도아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게이트와 맞닿아있는 눈밭을 시작으로 하얀 안개를 동반한 얼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아무래도 대장이 나오려는 모양인데.”
안세인이 한층 더 묵직해진 얼음 주먹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문기훈 역시 창을 들어올린 채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게이트 앞의 주선오가 얼음을 피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얼음은 휴지에 흡수되는 물처럼 빠르게 퍼져나가 금세 주선오에게 도달했다.
주선오가 다가오는 얼음을 베어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위험…!”
그때 안세인과 문기훈의 사이로 무언가 쑥 지나갔다.
“지나가요!”
짧은 외침과 함께.
안세인과 문기훈의 시선이 눈 위를 미끄러지며 빠르게 멀어지는 사람을 쫓았다.
“…저건….”
“…각성자인가요…?”
“위험한걸. 일단 아무래도 보스가 나오는 것 같으니 따라가죠.”
안세인이 그의 뒤를 따랐다.
문기훈은 배주머니에 창을 보관한 후 각력 강화를 통해 강화된 다리로 바닥을 박찼다.
* * *
‘잡혔다.’
미처 물러나지 못한 발이 얼음에 붙잡혔다.
주선오가 발을 빼내려 했지만 이미 얼어붙어 바닥에 붙어버린 후였다.
순식간에 감각을 마비시킨 얼음은 주선오의 발을 타고 올랐다.
그 사이에도 바닥의 얼음은 계속 퍼져나가 결국 반대편 발까지 얼음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쩌저저적.
‘젠장.’
찰나의 순간, 주선오는 얼어붙은 다리를 베어내야 하나 생각했지만.
“!”
어느새 자신의 옆에 나타난 한 남자 때문에 생각이 흐트러졌다.
“무슨 짓을…!”
늦은 외침이었다.
그는 이미 얼어붙은 바닥에 양손을 가져다댄 후였다.
주선오는 그의 손이 자신의 다리처럼 얼어붙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퍼지던 얼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놀란 주선오가 자신의 옆에 쪼그려 앉은 그를 보며 물었다.
“…누구…?”
그에 남자가 주선오를 올려다보았다.
해골 그림이 그려진 마스크를 쓴 남자였다.
“와, 주선오 행님 실물을 보네! 처음 뵙는데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얼음 풀어줄 테니까 쫌만 있으봐요.”
아무래도 냉기 관련 특성을 가진 각성자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말과는 다르게 계속 바닥에 손을 댄 채 쪼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선오가 살짝 미간을 구기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 역시 찌푸린 눈으로 바닥의 얼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임마는 쫌…, 쎄네?”
그의 말에 살짝 불안감을 느낄 무렵.
그어어어어.
게이트 안에서 웬디고의 소리가 들려왔다.
주선오는 붙잡힌 발은 무시한 채 발동시킨 칼을 고쳐 쥐었다.
“더 번지지 않게만 해주십시오.”
“그건 자신 있지요.”
주변에 한층 짙어진 악취가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주선오는 금방이라도 놓아버릴 것 같은 정신을 애써 붙잡았다.
게이트의 안에서 거대한 뿔이 스르륵 나타났다.
이전에 나타났던 웬디고들의 두 배 이상은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뒤이어 나타난 놈의 얼굴은 대부분이 부패했고 심지어 살갗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 우웩!”
옆에서 남자가 헛구역질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주선오는 칼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지독한 냄새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의 정신이 점점 흐려질 때.
“불꽃창.”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르르륵!
뜨거운 열기가 주선오를 스쳐지나갔다.
윤도아의 불꽃창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