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간이 시험이 일주일 후로 다가왔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됐던 세상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간이 시험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을 걱정할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누가 그 시험을 치르느냐가 중요했다.
-세계 랭커 뒀다 뭐함? 이럴때야말로 랭커들이 나서야하는 거 아님??
-ㄴㄴ. 랭커들 드갔다가 시험은 통과하더라도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앞으로가 더 힘들어짐.
-확실히 시험 게이트를 닫으려면 실력자가 들어가는게 맞지.
-당장 급한 불 끄자고 뒷 일 생각 안합니까? 랭커들 다 죽으면 그 뒤로 브레이크 걱정하며 살아야 할 판인데.
-급한 불 안 끄면 한 달 뒤 생각하기 전에 다 불타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
-각성자가 상위 랭커만 있는 건 아니잖아?
-ㅇㅇ. 쪽수로 밀어붙이면 그만. 원래 다굴엔 장사 없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젤 좋은 것 같은데.
커뮤니티에는 상위 랭커 대신 어중간한 랭킹의 각성자들을 여럿 보내는 것이 낫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커뮤니티에서 비각성자들이 이야기를 나눠봤자 소용없는 일.
그걸 판단하는 건 각성 기관과 각성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25일.
예전 같았으면 거리가 화려한 빛으로 물들었을 시기였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즐기거나 혹은 저주를 퍼붇는 사람들로 가득할 날.
하지만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아주 조용했다.
한 발표가 나기 전까지.
[세계 랭킹 1위 윤도아, 간이 시험을 치르겠다 발표]
* * *
“뭐? 도아 언니가 시험에 참여한다고?”
루이스의 말에 막 게이트에서 나와 그리브를 벗고 있던 니엘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니엘은 잠시 비틀거렸지만 금세 균형을 잡으며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조금 전에 발표가 났어.”
루이스가 조금 불안한 얼굴로 니엘을 살폈다.
‘분명 또 자기도 참여하겠다고 말하겠지.’
그리고 역시나.
니엘이 기세 좋게 외쳤다.
“그럼 나도 참여해야지!”
“안 돼.”
루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니엘은 루이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가서 내가 개서노보다 더 쓸모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그동안 내가 놀기만 한 건 아니라고!”
니엘이 양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아무도 니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고 쓸모없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지만.
니엘은 윤도아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루이스는 패기 넘치는 니엘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니엘. 안 돼.”
“왜!”
니엘이 곧바로 반발했다.
“간이 시험이야, 루이스. 난 랭커고. 그것도 세계 랭킹 3위 랭커라고. 그런 사람이 간이 시험을 그냥 지나치면 되겠어?”
루이스는 가늘어진 눈으로 니엘을 바라보았다.
‘속보이기는.’
윤도아가 간이 시험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시험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니엘이었다.
루이스의 눈빛에 니엘이 곧바로 덧붙였다.
“물론, 1위 랭커님이 시험에 참가하신다는데 당연히 호위해야 맞는 것도 있지만!”
가볍게 한숨을 내쉰 루이스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니엘. 넌 세계 3위 랭커이기 전에 독일의 1위 랭커야. 물론 2위나 3위, 그리고 그 아래의 랭커들도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긴 하지만 그래도 너를 따라잡지는 못해.
만약 네가 그곳에 갔다가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물론이고 네가 이끄는 샐러맨더 무리, 그리고 네 팬들, 심지어 정부조차도 네가 간이 시험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할거야.”
루이스의 설명에 니엘은 멈칫했다.
그의 말대로 니엘은 독일의 각성자였다.
“우리는 널 잃고 싶지 않아.”
루이스의 진지한 말에 니엘이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루이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나고 자란 독일이 위험에 빠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간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전 세계가 위험에 빠진다면 독일 역시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니엘이라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간이 시험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랬기에 지금껏 아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윤도아가 시험에 참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니엘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각성자.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니엘 역시 어디든 따라갈 자신이 있었다.
니엘이 고개를 들어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루이스. 간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할 수 없어.”
니엘의 진지한 눈빛에 루이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니엘을 막기에는 그른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거짓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윤도아가 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루이스. 당장 비행기 표 좀 끊어줄래?”
니엘이 활짝 웃었다.
* * *
윤도아가 간이 시험에 참여하겠다는 발표에 대한 미국 커뮤니티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역시 랭킹 1위네.
-설마 간이 시험에서 죽지는 않겠지?
-윤도아가 죽으면 아무도 그거 못 닫아. 그럼 망하는거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더 아랫단 랭커들이 가야 하는 거 아냐? 영 불안한데.
-윤도아 못 믿어? 간이 시험이고 뭐고 다 때려부술 사람이야.
-윤도아를 못 믿는게 아니고 간이 시험을 못 믿는거지.
-우리가 떠들어봤자 이미 윤도아는 가기로 결정했어.
-ㅇㅇ. 평소에 게이트 닫듯이 가볍게 처리하고 나오길 바라야지.
-그런데 우리나라 랭커는 뭐하고 있나?
‘뭐하긴. 늬들 엿보고 있지.’
미국의 1위 랭커인 조이는 커뮤니티의 글들을 흥미롭게 살폈다.
그리고는 턱을 괸 채 앞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이는 간이 시험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다.
‘시험 같은 건 재미없어.’
세상에 시험 외에 재미있는 것들은 굉장히 많았다.
가령 지금처럼 백악관 꼭대기에 앉아서 자신에게 애원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조이! 제발 돌려주게!”
“아무리 국내 랭킹 1위라고 하지만 이건 용서할 수 없소!”
“원하는 게 뭡니까? 내려와서 이야기합시다, 제발!”
수많은 경호원들과 참모들, 비서실장, 심지어 부통령과 대통령까지.
모두 조이를 바라보며 외치고 있었다.
“하하핫!”
조이는 그런 그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마지막 질문에 대답했다.
“원하는 건 없는걸? 난 지금이 이미 충분히 재밌거든.”
조이의 말에 대통령이 외쳤다.
“그, 그럼 제발 그 손에 든 것만이라도 돌려주게!”
조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살살 흔들어보였다.
“이거? 이게 뭔데요?”
물론 조이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조이가 들고 있는 서류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슬쩍한 것.
뭔지는 몰라도 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리라.
어쨌든 조이는 관심이 없었다.
조이는 서류봉투를 열어 그 안의 서류들을 꺼냈다.
“머, 멈춰! 그건 자네가 봐도 되는 게 아냐!”
대통령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래도 국가 기밀급의 내용이 적힌 서류인 모양이었다.
“아아, 그래? 그럼 아쉽지만 돌려줄게요.”
조이의 말에 아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굉장히 밝아졌다.
그들을 보며 싱긋 웃은 조이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들을 손에서 툭 놓았다.
“…어?”
사람들이 멍하게 팔락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초 후.
“아, 안 돼!”
대통령의 비명과 함께.
“…! 자, 잡아!”
“한 장이라도 놓치면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떨어져내리는 종이들을 붙잡으려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래쪽이 시끄러웠지만 조이는 계속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윤도아 씨가 시험에 참여하면 도빈 씨도 참여하려나?’
잠시 볼을 톡톡 두드리던 조이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윤도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빈 씨도 시험에 참여하나요?]
만약 윤도빈이 참여를 한다면 조이 역시 참여할 의향이 있었다.
조이는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답은 없었다.
‘바쁜가? 답이 없네.’
입술을 비죽인 조이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답이 없으면 찾아가면 되지!’
컨벤션 이후로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이번 간이 시험은 조이에게는 좋은 핑계였다.
‘만약 시험에 참가하면 같이 가면 되고, 아니면 도빈 씨랑 데이트나 하다 오면 되고!’
조이는 설레는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사람들은 흩어진 서류들을 대부분 주워든 상태였다.
“어머!”
조이가 놀란 척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조이에게 쏠렸다. 그녀는 한 손을 번쩍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난 분명 밑으로 던졌는데 이게 왜 내 손에 있죠?”
조이가 들어올린 손에 서류봉투 하나가 스르륵 나타났다.
“…뭐, 뭐?”
“저, 저건 또 뭐야?”
“…어? 이, 이거 글자가 사라졌습니다!”
“뭐? 분명 글이 적혀 있었는데?”
모두가 당황하며 외쳤다.
사실 조이가 바닥에 던진 종이는 조이가 만들어낸 복제품이었을 뿐. 진짜는 조이의 암흑 공간 안에 있었다.
조이는 경쾌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서류를 암흑 공간에 넣었다.
“아하하하! 그럼 난 이만!”
조이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으아악! 조이이이잇!”
백악관에 사람들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 * *
[어디야.]
[빨리 말 안해?]
[또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고 발표부터 했네?]
[어디냐고.]
[게이트 갔다올건데 답장 없기만 해봐.]
윤도빈의 메시지에서 살기가 폴폴 휘날렸다.
어떻게 답장을 해야 도빈이를 달래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 있던 이시결이 웃었다.
“윤도빈 씨가 걱정을 많이 하나 보군요.”
내 핸드폰 액정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화면을 끄며 말했다.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지.”
“한 집 안에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나가든가.”
“이제 와서 쫓아내신다고요? 너무하시는군요.”
이시결의 헛소리를 상대하며 아파트로 향하자 그 앞에 있던 보안요원 권선일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오늘도 사이 좋아 보이십니다!”
권선일의 말에 나는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권선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참,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이요?”
권선일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주선오 씨께서 오셨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온다고 하셨습니다.”
주선오 역시 내가 간이 시험에 참여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마침 지하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주선오가 타 있었다.
그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매서운 눈으로 뒤의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이시결이 주선오에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하지만 주선오는 인사하지 않았다.
그런 주선오의 반응에 이시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계속 마주칠 사이인데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주선오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지난번 기관에서 내가 했던 말 때문에 이시결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선오의 시선은 계속 이시결에게 꽂혀 있었다.
내가 슬쩍 이시결을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로 물러났다.
“제가 있는 게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니 전 나중에 올라가도록 하지요.”
그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다시 밖으로 이동했다.
주선오는 계속해서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올라가자.”
나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 주선오의 시선을 차단했다.
집으로 들어간 후 주선오의 방문 목적을 채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물론 간이 시험의 얘기이리라. 하지만 나는 모른 척 물었다.
“어딜?”
“간이 시험,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주선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간이 시험에 혼자 참여할 생각이었다.
회귀 전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게이트라면 위험한 게이트일지도 몰랐다.
그런 불확실한 곳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살펴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또다시 눈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남아.”
내 말에 주선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
지금까지 주선오는 내 말에 반발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말하는 대로 충실히 따라왔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주선오가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물었다.
“…제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까?”
뭔가 상당히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아냐. 간이 시험은 이번이 첫 번째잖아. 아직 어떤 방식인지도 모르니까 내가 먼저 가보려는 것뿐이야.”
“그런 거라면 같이 가도 되지 않습니까.”
주선오가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나 역시 그의 고집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만약에 내가 간이 시험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네가 내 자리를 대신 해야 돼.”
주선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게이트보다 간이 시험의 위험성이 더 높을 터. 당연히 죽을 위험이 더욱 높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 있었다.
나 역시 두 번째 시험 전까지 내가 죽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넌 남아줘.”
주선오가 시선을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 웃음 섞인 이야기에도 주선오는 웃지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이어지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의 윤도빈이 나타났다.
나는 그제야 윤도빈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