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와, 방금 봤냐?”
입을 쩍 벌린 신교진이 중얼거렸다.
“도아 언니 방패 부서진 거? 이네스 생각보다 제법인데.”
니엘이 작은 주먹을 입술에 꾹 눌러댄 채 진지한 얼굴로 윤도아와 이네스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어. 근데 무슨 속도가 저렇게 빨라? 저렇게 두드리니까 안 부서지고 버틸 수가 있나.”
신교진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이리나와 니엘이 동시에 신교진을 돌아보았다.
“두드렸다고요?”
“한 번 푹 찌른 거 아니었어?”
“잉?”
신교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둘을 번갈아보았다.
“아냐. 겁나 빠르게 수십 번 찔렀어.”
“에엥?”
니엘과 이리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 저거 봐봐!”
신교진이 한참 대련 중인 둘을 가리켰다.
다시 한 번 이네스가 윤도아를 향해 고무 검을 찔러 넣었고, 윤도아는 마나 방패를 시전해 그것을 막았다.
카가가강!
이네스의 고무 검이 수십 번, 윤도아의 마나 방패를 강타했다.
“어…. 잘 모르겠는데요?”
이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니엘은 더욱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으음.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소리가 한 번 찌른 소리는 아니네.”
“거봐. 그렇다니까? 분명히 수십 번 때렸어. 적어도 서른 번 이상이야.”
신교진이 확신하며 말했다.
동체시력 스탯을 가진 그였기에 니엘이나 이리나가 보지 못한 고무 검의 속도를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굉장한데.”
니엘이 살짝 빛나는 눈으로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실력만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르겠어.”
그녀의 말에 신교진과 이리나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신교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도 네가 랭킹은 더 높잖아?”
니엘은 랭킹 3위, 이네스는 랭킹 5위의 각성자였다.
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따지면 랭킹은 각성자 실력으로 매겨지는 게 아니잖아.”
“네…?”
이리나 역시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랭킹은 각성자가 어떤 급의 게이트를 얼마나 닫았냐로 매겨져. 물론 게이트를 닫을수록 강해지니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기야 하지만. 만약에 실력이 뛰어나도 게이트를 얼마 닫지 않았다면 랭킹은 낮을 수밖에 없는 거야.”
니엘의 설명에 잠시 눈을 꿈뻑이던 신교진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그러네?”
“…그렇네요!”
이리나 역시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네스가 그런 것 같다는 거야?”
“나보다 게이트를 닫은 횟수가 적을 뿐 실력 자체는 더 좋을 수 있다는 거지.”
니엘의 말에 신교진이 수긍했다.
“하긴. 저 사람 원래 펜싱 선수였잖아. 그러니 기본 피지컬이 너랑은 다르겠지.”
“에? 그랬어요?”
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몰랐어? 꽤 유명했는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는데 각성하고 나서 선수 자격 박탈당했어.”
“왜요?”
신교진이 팔짱을 낀 채 이야기했다.
“경기를 진행할 때 스킬을 사용할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이리나가 놀라며 말했다.
“에엑, 설마요! 그래도 선수인데.”
“금메달리스트잖아. 팬도 많았지만 그만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어. 특히 같은 선수들이 말야. 아무리 안 쓴다고 얘기해도 믿어주질 않으니 별 수 있냐. 나와야지, 그냥.”
“…그런….”
이리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뭐, 어쨌든 그래서 본인이랑 잘 맞는 벌새 신 가호를 받기도 했으니. 네 말대로 너보다 뛰어날 수도 있겠네.”
신교진의 말에 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역시 더 열심히 해야겠어.”
* * *
‘굉장한데!’
나는 감탄하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초당 50회 이상의 횟수로 고무 검이 마나 방패를 찔러왔다.
회귀 전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단한 속도였다.
고무 검이 아니라 진짜 레이피어였다면 칼날이 마나 방패를 뚫고 내게 닿았으리라.
이 정도면 충분히 이네스의 현재 실력을 파악했다.
이 이상으로 대련이 길어질 필요는 없었지만.
‘그 전에 내 목적을 달성해야지.’
이네스가 물의 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봐야했다.
만약 그녀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간이 시험의 게이트에 함께 입장할 것이고.
아니라면 그녀를 통해 프랑스의 게이트를 들어갈 기회를 얻어야 했다.
나는 주변에 수십 개의 마나 단검을 만들어냈다.
‘마나 단검.’
고무 단검과 마찬가지로 평소와 다르게 날을 세우지 않은 작은 막대기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지만.
그거야 어찌됐든 이렇게 많은 수의 공격이 자신에게 날아온다면 모든 것을 피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럼 결국 맞아서 패배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물의 핵으로 마나 단검들을 삼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고속을 사용하여 내게 다가오려던 이네스가 내 주변에 떠오른 마나 단검들을 보며 멈추어 섰다.
나는 그런 이네스를 향해 고무 단검을 던졌다.
이네스가 고무 검을 휘둘러 단검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단검이 이네스의 검에 닿기 전, 나는 수를 썼다.
‘보이지 않는 손.’
마나로 만들어진 손이 날아가던 단검을 붙잡았다.
고무 단검이 허공에 멈춰 서자 이네스가 휘두르던 고무 검을 거두며 나를 경계했다.
이제 이네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고무 단검 뿐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공격을 받아줬으니, 이제 내 차례지.’
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고무 단검을 휘둘러 이네스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네스가 단검을 쳐내며 뒤로 훌쩍 뛰어오른 후 체공을 이용해 공중에 머물렀다.
그 상태로 호버링을 사용하자 이네스는 내 단검을 더욱 빠르게 피해냈다.
나는 그런 이네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면서 주변에 떠 있던 마나 단검들을 움직여 그녀에게 이동시켰다.
아무리 쳐내고 찔러도 떨쳐지지 않는 고무 단검을 상대하던 이네스의 표정이 다가오는 마나 단검들을 보고는 미묘하게 변했다.
당혹감이 섞여 든 표정.
‘이렇게 많은 공격을 한 번에 받아본 적은 없겠지.’
나는 씩 웃고는 마나 단검들을 이네스에게 쏘아 보냈다.
마나 단검들이 소리 없이 이네스에게 날아갔다.
그때 이네스가 갑자기 뒤쪽으로 훅 빠지더니 고무 검을 치켜세웠다.
‘저건…!’
회귀 전, 그녀가 방어를 위해 취하던 자세였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고무 단검을 회수했다.
이제 마나 단검들만이 그녀를 향해 날아갔고.
이네스가 검을 잡은 손을 돌려 고무 검의 날로 자신의 앞쪽 허공을 쓸어내렸다.
촤라락.
그러자 날이 지나간 곳에 심한 왜곡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얇은 물의 막이 생성된 것이었다.
물의 핵이었다.
‘가지고 있구나, 벌써.’
나는 아쉬움에 살짝 입맛을 다셨다.
이미 이네스의 손에 있는 물의 핵을 빼앗을 수는 없다.
우부를 넣어둘 집은 다시 이시결을 닦달해서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네스에게 날아가던 내 마나 단검들이 물의 막에 닿자, 물의 막은 그대로 단검들을 흡수해버렸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마나 단검들이 사라졌다.
물의 핵과 연결된 깊은 심해 속으로 흡수되었으리라.
이네스가 이번에는 허공을 쓸어올리며 고무 검을 다시 위로 세웠다.
그러자 지퍼를 열고 닫은 것처럼 물의 막이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고무 검이 이네스의 코 앞쪽에 세워졌다.
검날을 사이에 둔 이네스의 눈빛이 다시 번뜩였다.
‘온다.’
생각과 동시에 이네스가 체공 상태를 유지하며 내게 고속으로 다가왔다.
백 여 미터는 떨어져 있었지만 내게 고무 검이 찔러들어온 것은 고작 5초 후였다.
이제 이네스가 물의 핵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대련을 끝낼 시간이었다.
나는 곧장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파바바밧!
재봉틀의 바늘이 허공에 스티치를 수놓듯, 고무 검이 나를 따라 올라왔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마나로 만들어진 손이긴 하지만 그 힘은 내 근력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
‘근력에서는 내가 우위지.’
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네스의 오른손목을 꽉 붙들었다.
“!”
빠르게 움직이던 이네스의 손이 멈추었다.
살짝 커진 눈이 자신의 손목을 향했다가, 이내 위쪽의 나를 바라보았다.
씨익.
웃은 나는 마나 방패를 만들어 그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쪼그려 앉은 채 고무 단검을 이네스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
이네스가 호버링으로 몸을 빼려했지만 내 근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이네스는 잡고 있던 고무 검을 손에서 놓았다.
“이정도면 충분하군요.”
이네스의 말에 나는 그녀의 목을 겨누었던 고무 단검을 거두었다.
툭!
고무 검이 체육관 바닥에 부딪혔다.
나와 이네스 역시 바닥에 내려서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주선오와 김지석이 우리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네스가 흐트러졌던 호흡을 가다듬으며 계속 뒷짐을 지고 있던 왼손을 축 늘어트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다가온 주선오가 우리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나는 들고 있던 고무 단검을 그에게 건넸다.
조금 상기된 표정의 김지석이 나를 보며 물었다.
“잘 봤습니다. 역시 랭커분들의 대련은 다르군요.”
“별로 대단할 건 아니지만요. 이네스도 간이 시험에 같이 참여하는 걸로 할게요.”
이네스가 물의 핵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녀에게 니엘의 보호를 맡길 생각이었다.
김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험은 윤도아 씨와 니엘, 저만 참여하는 겁니까?”
금세 평소의 호흡으로 돌아온 이네스가 물었다.
이네스의 시선은 2층의 관중석에 앉아있는 니엘에게 향해있었다.
“한 명 더 있어요.”
“누구죠?”
이네스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반대편 관중석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시결이 있었다.
이네스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랭커는 아닌 것 같군요.”
“뒤늦게 등록한 각성자라 랭킹에는 없지만 꽤 실력 있는 사람입니다.”
내 말에 이네스는 별다른 의문을 달지 않았다.
본인의 손목을 잡아 공격 자체를 차단해버린 나였다.
내가 실력이 있다고 말을 했으니 어중간한 각성자가 아니라는 건 눈치챘을 터.
이네스는 이번에는 주선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험 전까지 이곳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시험까지는 3일이 남은 상태. 아무리 실력 있는 각성자라고 해도 3일 동안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럼 지금부터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돌아가는 건 제가 알아서 갈 테니 이사님은 가보도록 하세요.”
이네스의 말에 김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아 씨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따로 갈게요.”
올 때는 주선오의 차를 얻어 타고 왔지만 주선오 역시 이곳에 남아 있을 예정이었다.
게다가 이시결에게 우부가 지낼 곳을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다시 관중석을 바라보자 윤도빈과 조이는 어느새 사라진 후였고, 이시결은 관중석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곧 뒤따라 나온 이시결이 말했다.
“나쁘지 않네요.”
그도 이네스의 실력을 꽤 높이 평가했다.
“참, 이네스가 물의 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들고 있던 책으로 톡톡 턱을 두드리던 이시결이 나를 돌아보았다.
“중간에 윤도아 씨의 단검을 삼켰던 그거 말입니다.”
물의 핵을 봤던 것은 회귀 전의 일이었기에 나는 모른 척 물었다.
“그게 물의 핵이라고?”
“물의 핵이 가진 특징이 드러나더군요. 물의 핵은 뭐든 삼킬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윤도아 씨가 키우는 그 슬라임들이랑 비슷하지요.”
지난번 서고지기에게 들었던 내용과 같은 이야기였다.
‘아이템 도감에 적혀 있나 보네.’
“그럼 다른 아이템을 찾아봐야겠네. 그래서 좀 알아봤어?”
“찾아봤습니다.”
이시결의 말에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근데?”
“EX급 아이템 중에 비슷한 게 하나 있더군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