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EX급….”
물의 핵은 S급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높은 EX급이라면 분명 입수 난이도 또한 상당할 터.
‘갑자기 급이 달라져버렸는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뭔데.”
“EX급 아이템인 용주입니다.”
이시결의 말에 나는 더더욱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용주라면 말 그대로 용의 구슬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서고지기. 들었지? 설명.’
<허허허.>
서고지기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용주는 EX급 아이템입니다. 물의 핵의 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는 아이템이지요. 그것을 가진 자는 바다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혹은 바다를 없앨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비유적인 이야기였다.
‘그만큼 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물의 핵의 상위 호환이기 때문에 물의 핵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능하고요.>
물의 핵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용주로도 할 수 있다면 이네스처럼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용으로 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바다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물을 생성해낼 수 있다면 내가 필요할 때 얼마든지 물을 부릴 수 있다는 것.
<물의 핵과 다른 점이라면 물의 핵은 한 번 삼킨 것들을 뱉어낼 수 없지만 용주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알겠어.’
충분한 설명에 만족한 나는 서고지기와의 연결을 끊었다.
설명만 들으면 아주 솔깃하게 만드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용이 신급 몬스터라는 점이었다.
이시결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아직 게이트 안에서 용을 만난 적은 없어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EX급 아이템이니 용주를 얻는 건 꽤 힘들 것 같군요.”
신급이라면 지난번 우부를 만났던 게이트에서 보았던 크라켄이나 레비아탄과 동급이었다.
그런 놈들은 잡기도 힘들었고, 이제 겨우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그런 놈들을 잡는 게이트가 나타날 리 없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우부는 한동안 계속 풀어둔 채로 다녀야겠군.’
* * *
다음날 기관의 연구소장 박효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구소장 박효진입니다. 간이 시험 대비용 방어구가 완성됐으니 3시에 연구소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완성됐구나.’
지난번 논산에서의 게이트 브레이크에서 얻은 웬디고들의 뼈로 방어구를 만드는 것이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게이트에 가려던 이시결을 붙잡아놓은 후 도빈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윤도빈.”
분명 집에 있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직도 화났네.’
한숨을 내쉰 나는 닫힌 방문을 향해 말했다.
“기관 연구소 갔다올게.”
“아직도 삐졌습니까?”
뒤에서 이시결이 방문 너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방 안에서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윤도빈에게도 이시결의 말이 잘 들린 모양이었다.
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이시결을 돌아보았다.
이시결은 뻔뻔한 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했다.
한숨을 내쉰 나는 현관 앞에 둔 오토바이 키를 챙겨들었다.
“그거 타고 가십니까?”
이시결이 내 손에 있는 키를 보며 물었다.
내가 신발을 신느라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물었다.
“저는요?”
“거미줄 타고 오던가.”
나는 대충 놈에게 대답한 후 몸을 일으켰다.
“흠.”
이시결이 팔짱을 낀 채 팔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오토바이 헬멧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3시니까 늦지 마.”
하지만 이시결은 나보다 빠르게 기관 연구소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내가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자 이시결이 웃으며 말했다.
“아, 오셨습니까? 늦으셨네요.”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놈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늦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윤도아 씨 말대로 거미줄 타고 왔죠. ”
‘진짜로 그러고 왔다고?’
나는 기가 찬 얼굴로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알게 된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저 놈의 생각은 알 수가 없었다.
헬멧을 내려놓고 오토바이에서 내려 연구소를 향해 걸어가는데.
“도아 언니!”
뒤에서 니엘의 목소리와 함께 마구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슬쩍 옆으로 한 발 비켜섰다.
내 갑작스런 움직임에 니엘은 멈추지 못했다.
그녀가 그대로 이시결에게 안길 뻔 한 찰나.
촤악!
이시결이 빠르게 장갑을 벗고는 허공을 훑었다.
그의 손에서 뽑혀 나온 거미줄들이 바닥에 들러붙더니 그의 손짓에 따라 팽팽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렇게 펼쳐진 거미줄에 니엘이 걸려버렸다.
“으악!”
거미줄에 들러붙은 니엘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이게! 당장 없애지 못해요?”
니엘의 언성에 한숨을 내쉰 이시결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한테 갑자기 그렇게 달려들면 됩니까? 이렇게 멈춰 세워 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십시오.”
그러자 니엘이 반박하며 외쳤다.
“누가 그쪽한테 달려든 거래요? 난 도아 언니한테 달려온 거라고요! 근데 도아 언니가 하필 그때 움직일 줄 몰랐지!”
니엘은 내가 우연히 그녀를 피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시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놈은 내가 일부러 피했다는 걸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쪽이랑 안을 생각 추호도 없다고요!”
그 말에 이시결이 인상을 찌푸리며 니엘을 바라보았다.
“저도 싫습니다.”
그러더니 이시결이 니엘을 막아냈던 거미줄들을 손에서 끊어냈다.
“우악!”
그러자 니엘이 비틀거리다가 결국 바닥으로 철퍽 넘어지고 말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니엘이 매섭게 이시결을 쏘아보았다.
“이, 이…! 너!”
“없애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뻔뻔하게 대답한 이시결은 다시 장갑을 낀 채 몸을 돌려 연구소로 걸어갔다.
“으으, 거미줄이야?”
니엘이 질색한 표정으로 몸에 묻은 거미줄들을 걷어냈다.
그런 니엘을 스쳐지나가던 이네스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네스에게 마주 인사를 한 후 이시결을 따라 연구소로 걸어갔다.
“힝, 언니 같이 가요!”
니엘이 쪼르르 우리 뒤를 쫓았다.
연구소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박효진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은 퀭해 보였다.
아무래도 게이트 브레이크 이후로 계속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한 것 같았다.
“아, 다들 오셨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는 박효진을 따라 연구소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지난 번 푸른 놀 사체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던 그 방이었다.
“도아 씨는 아시겠지만 다른 세 분은 잘 모르실 테니 일단 설명을 드릴게요.”
박효진이 나란히 앉은 이시결과 니엘, 이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2주 전 쯤에 한국의 한 지역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있었어요. 이시결 씨는 아시겠지만 그 자리에는 없었고요. 그렇죠?”
박효진이 동의를 구하며 이시결을 바라보았지만 이시결은 팔짱을 낀 채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시결의 반응이 없자 헛기침을 한 박효진이 니엘과 이네스를 보며 말했다.
“크흠. 어쨌든 그때 도아 씨랑 다른 각성자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웬디고의 뼈들을 확보했거든요.”
“웬디고의 뼈요?”
여전히 거미줄을 떼어내던 니엘이 되물었다.
니엘이 관심을 가져준 것이 고마웠는지 박효진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네, 네. 눈보라를 일으키는 설원의 웬디고요.”
“그 냄새 지독한?”
니엘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게이트에서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니엘은 샐러맨더 특성을 가졌기에 웬디고들을 처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테고.
“맞아요! 그거.”
박효진이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놀이랑 마찬가지로 웬디고 뼈도 상당히 튼튼하더라고요. 왜 지난번에 컨벤션에 참여하셨다면 아시겠지만 저희가 그때 놀 뼈와 가죽을 이용해서 방어구를 만든 적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걸 김지석 이사님이 사용하고 계시고요.”
“아아. 그거 봤어요! 굉장하던데요?”
니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쵸, 그쵸? 저도 만들어놓고도 놀랬다니까요.”
박효진과 니엘이 카페에서 만나 수다를 떠는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밖을 내다보던 이시결이 말했다.
“수다나 떨려고 부른 거라면 올 필요 없었겠는데요.”
그에 박효진이 입을 다물었다. 니엘 역시 이시결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나 쟤 싫어요.”
“당신한테 좋아해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만.”
“이익!”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이시결에게 니엘이 발끈했다.
괜히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니엘을 말렸다.
“그만해.”
니엘은 여전히 씩씩거렸지만 그래도 내 말에 따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효진이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시작했다.
“아무튼 이번에도 그래서 웬디고의 뼈를 이용해서 방어구를 좀 만들어봤어요.”
박효진이 탁자 밑에 있던 박스를 열어 보호구를 하나 꺼냈다.
“지난번에 만든 것과 같은 팔 보호대에요.”
그녀가 팔 보호대를 내게 건넸다.
“근데 아직 테스트를 못 해봤거든요. 혹시 괜찮으시면 지금 테스트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가볍게 보호대를 두드려본 내가 박효진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요?”
“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간이 시험까지. 그러니까 보완할 게 있으면 빨리 하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것을 이시결에게 내밀었다.
이시결이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보호대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뭐해? 테스트.”
내 말에 이시결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차라는 말입니까?”
“그럼 내가 차?”
이시결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보호대를 받아들고 자신의 팔에 착용했다.
나는 이번에는 이네스를 보며 말했다.
“가볍게 찔러줄래요?”
내가 직접 보호대를 찌른다면 완벽하게 두 동강 낼 자신이 있었기에 나는 그 역할을 이네스에게 넘겼다.
이네스는 잠시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싶어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이시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우리를 돌아보며 멈추어 선 채 보호대를 찬 팔을 가슴 앞으로 들어보였다.
“빨리 하죠.”
그러자 이네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어가며 허리에 차고 있던 레이피어를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레이피어의 날이 번뜩였다.
“…와, 진짜요? 괜찮은 거예요?”
니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만약에 부서져서 다치게 되면 리나한테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면 돼.”
이리나를 모르는 니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둘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세요. 제대로 테스트는 못해보긴 했지만 그래도 제작하면서 보니까 그때랑 비슷했던 것 같아요.”
박효진이 니엘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하지만 박효진이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김지석이 했던 테스트는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를 상대로 한 테스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각성자, 그것도 5위 랭커인 이네스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그 차이를 알았다면 지금 테스트 해달라는 얘기는 안 했겠지.’
각성자가 아닌 박효진이 잘 몰라서 저지른 실수였다.
이시결은 그걸 알고 있겠지만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빨리 테스트가 끝났으면 하는 것 같은 얼굴.
“그럼.”
몸을 꼿꼿이 편 채 왼손을 뒷짐 진 이네스가 레이피어를 들어올렸다.
한 순간에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변했다.
일단 이네스는 레이피어를 내밀어 가볍게 이시결의 팔을 톡 쳤다.
“하시죠.”
그 말에 레이피어를 거두었던 이네스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카앙!
이네스의 레이피어가 빠르게 이시결의 팔을 찔렀다.
찌르기 스킬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번, 치고 빠진 것이었지만 이시결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팔을 돌려 보호대를 바라보았다.
“흠집이 조금 났습니다만. 그때 했던 것처럼 해보시죠.”
이시결이 다시 팔 보호대를 가슴 앞으로 가져다대며 말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네스가 다시 레이피어를 앞으로 겨눴다.
이네스가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레이피어를 찔러 넣었다.
카가강!
날카로운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초당 속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았다.
‘초당 30회 정도이려나?’
아직 이네스가 보호대를 불신했기에 속도를 늦춘 모양이었다.
이네스의 공격에 뒤로 몇 걸음 밀려난 이시결이 다시 보호대를 살폈다.
다행히 피가 떨어지거나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보호대가 뚫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보호대를 살펴본 이시결이 다시 말했다.
“속도 더 높이세요.”
그가 다시 팔을 내밀었다. 이제 이네스도 조금 안심을 한 모양이었다.
어제 내게 찌르기를 했을 때처럼 이네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카가가가강!
굉장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