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도빈이는 나와 함께 각성자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화는 가라앉았어도 토라진 것은 여전했는지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입장하는 건 보려는 모양이네.’
그리고 도빈이가 함께하자 조이까지 덤으로 붙어버렸다.
사실 혼자였다면 이시결처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대신 도약과 마나 방패를 이용해 건물을 올랐겠지만.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인파를 뚫고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옥상에는 안세인과 김지석, 주선오, 이네스와 니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아 언니!”
니엘이 후다닥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안세인과 김지석, 이네스에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했다.
“오늘 어때요?”
내게 다가온 안세인이 물었다.
내 컨디션을 묻는 질문이리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아요.”
나를 바라보는 안세인의 얼굴이 미안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뭔가 도아 씨한테 짐을 지게 한 기분이네요.”
“아뇨. 제가 먼저 가겠다고 한 건데요, 뭐.”
다행히 니엘이나 이네스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하늘의 게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네.’
시험의 게이트를 마주한 것이 그닥 기분 좋지는 않았다.
처음 죽었던 첫 번째 시험이 생각나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제 들었던 나라의 예언 또한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함을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더 찜찜한 것은 여우 구슬을 통해 본 간이 시험 게이트의 정보였다.
정보가 주어지던 다른 게이트와는 다르게 간이 시험의 게이트는 아무런 정보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게이트에 가는 건 오랜만이네.’
여우 구슬을 얻은 이후로 게이트에 대한 내용은 모두 알았기에 이런 상황이 조금 어색할 정도였다.
‘그 전에는 항상 이랬는데 벌써 익숙해졌군.’
나를 따라 게이트를 바라본 안세인이 물었다.
“저 숫자가 뭘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나요?”
게이트의 입장 안내문 밑에 적혀있는 숫자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15:41:01]
[15:41:00]
[15:40:59]
저것은 게이트가 닫히기 전까지의 시간이었다.
게이트가 닫히게 되면 그 이후로 각성자의 입장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만약 그때까지 각성자가 한 명도 입장하지 않았다면 게이트는 브레이크를 일으키고 만다.
그렇게 따지면 게이트가 브레이크를 일으키기까지의 남은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에 제한시간이라면 브레이크밖에 생각이 나지 않네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 듯, 안세인은 놀란 기색을 비치지는 않았다.
“역시 그렇군요.”
꽤나 걱정 섞인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들어가서 클리어하면 그만이니까.”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에 안세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뒤에서 함께 미소를 지은 김지석이 내게 말했다.
“도아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믿음이 가네요.”
“그럼요. 도아 언니가 누군데요! 당연히 간단하게 클리어하고 나오겠죠.”
니엘이 옆에서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슬슬 입장해볼까.’
나는 허리 뒤쪽에 메어둔 두 단검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주선오가 살짝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잘 갔다 와요, 누나.”
옆에 있던 신교진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계속 말이 없는 도빈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도빈이의 팔짱을 끼고 있던 조이가 말했다.
“도빈 씨는 제가 잘 보고 있을게요. 걱정 말고 다녀와요.”
“부탁 좀 할게요.”
여전히 표정이 좋지 못하던 윤도빈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조심해.”
나는 그런 도빈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걱정 마.”
그리고는 함께 시험의 게이트에 입장할 셋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가도 괜찮죠?”
“괜찮습니다.”
이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같이 침착한 그녀에게서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시결이야 뭐.’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아침부터 쌩쌩하게 움직이는 걸 봤으니.
반면 내 이야기에 니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이시결이 그런 니엘을 보며 물었다.
“겁이라도 먹었습니까?”
“뭐라고요?”
니엘이 발끈하며 외쳤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부인하지는 못했다.
이시결이 코웃음을 치자 니엘이 말했다.
“뭐 본인은 하나도 안 무서운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럼 먼저 입장하시든가요!”
니엘은 당연히 이시결이 망설일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시결은 나를 한 번 슥 보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입장.”
순식간에 투명한 일렁임이 이시결을 감쌌다.
스륵.
눈앞에서 이시결이 사라지자 니엘이 당혹스러운 듯 커다래진 눈을 껌뻑였다.
정말로 입장해버릴 줄 몰랐던 것 같았다.
피식 웃은 나는 이네스와 니엘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가죠.”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하늘의 게이트를 보며 말했다.
“입장.”
* * *
기분 나쁜 감각 이후에 나타난 공간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무언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꿈 같은 곳.’
이시결은 무심한 얼굴로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이렇게까지 비어 있는 게이트는 처음이었다.
대체 어떤 걸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에게 간이 시험은 그닥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간이 시험에 참여한 이유는 단 하나.
윤도아가 참여하니까.
잠시 가만히 선 채 윤도아가 입장하기를 기다렸지만, 몇 분이 지나도 윤도아는 입장하지 않았다.
‘또 입장 지역이 다른 건가?’
이시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감이 치솟았다.
윤도아는 자신이 아껴둔 사냥감. 절대 남의 손에 들어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간이 시험의 게이트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예지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윤도아를 찾아야했다.
잠시 텅 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손끝에서 하얀 거미줄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촤륵!
촥!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거미줄은 멀리 가지 못하고 멈추어버렸다.
‘뭔가 있다.’
이시결은 허공에 붙어있는 거미줄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곳에 손을 가져다대자.
툭.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 앞을 더듬자 그것은 양옆으로 쭉 이어져있었다.
‘벽인가.’
이시결은 이번에는 위를 향해 거미줄을 쏘아 보냈다.
촤륵!
힘차게 솟구치던 거미줄이 이내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천장은 막혀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거미줄을 쏘아올렸다.
이번에는 투명한 벽의 위쪽으로.
그러자 치솟았던 거미줄들이 떨어져내려 벽의 높이와 두께를 나타냈다.
2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이와 사람 한 명이 서 있을 수 있을 만한 두께.
이시결은 거미줄을 타고 투명 벽의 위로 올라섰다.
마치 허공을 딛고 선 것 같은 그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아마 투명한 것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일 터.
눈으로 그것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감지할 수는 있어.’
그는 다시 거미줄을 뽑아 사방으로 퍼트렸다.
촤륵, 촤르륵.
거미줄은 허공을 가로지르다가 투명한 무언가에 막혔다.
그럼 그 거미줄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거미줄이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간다.
곧 텅 비어있던 공간에 거미줄이 가득 채워졌다.
이시결은 잠시 주변을 살폈다.
얼핏 보면 미로 같은 공간이었다.
다양한 높이와 두께를 가진 벽들이 공간을 나눠 길을 만들고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것 같은 넓이의 길도 있었고 수십 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것 같은 길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길은 결국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저쪽.’
하지만 그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그를 중심으로 백여 미터 정도 뿐.
그 시야를 벗어나자, 거미줄들이 뚝 끊겨 보였다.
이시결은 가볍게 손끝을 까닥여 거미줄들을 움직여보았다.
파르르.
작은 진동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절단된 것 같은 거미줄의 앞부분에서도 분명 진동은 감지되고 있었다.
그가 몇 걸음 앞으로 내딛자, 그의 시야 역시 동시에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새로운 부분이 드러난 만큼, 보이던 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어두운 공간에 횃불을 들고 있을 때처럼, 횃불의 위치에 따라 시야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물론 이곳은 어둡지도 않았고 횃불도 없었다.
‘게임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군.’
이런 이상한 시야 역시 이곳의 특성인 것 같았다.
파악을 끝낸 이시결은 거미줄의 위를 거닐며 그곳으로 향했다.
거미줄을 뽑아 주변을 살피고, 그 위를 걷고를 몇 번 반복하자.
드디어 거미줄을 통해 색다른 것이 감지되었다.
아직 시야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있었다.
그것의 움직임이 거미줄을 타고 이시결의 손끝에 닿았으니까.
씩 웃은 이시결은 그곳을 향해 걸었다.
잠시 후, 그는 드디어 그것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절그럭.
절그럭.
시야의 바깥 어딘가에서 시작되었을 투박한 쇠사슬들이 이시결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무언가 묶여있었다.
‘뼈.’
넓적다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져 있는 무언가의 다리뼈였다.
사람의 것과 닮아있었지만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컸다.
시야의 끝에 걸친 그 다리뼈는 거리가 있었음에도 이시결의 절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게다가 절단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뼈를 묶은 쇠사슬이 함께 흔들렸고, 그것들을 뒤덮은 거미줄을 따라 그에게 진동이 전해지고 있던 것.
하지만 그것 외에 또 하나의 진동을 만들어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뼈가 묶인 쇠사슬의 앞에 엎드려있던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그르르….”
날카로운 이빨들이 가득 솟은 입을 실룩거리는 늑대였다.
아직도 거리가 있었지만, 이빨 하나하나까지 보일 정도라면. 뼈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늑대는 아닐 터.
늑대의 탁한 흑색 눈이 이시결을 향했다.
이시결은 그 눈을 마주한 채 늑대를 향해 걸어갔다.
‘저걸 죽이고 저 뼈를 풀어줘야 하나.’
그때 이시결을 바라보던 늑대가 입을 벌렸다.
“나는 지키는 자.”
“호오. 말을 할 줄 아는군요.”
이시결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늑대를 향해 다가가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자 늑대가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붙어있던 거미줄들이 끊어져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몸을 일으킨 늑대는 한입거리인 이시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먹어치울 것이다.”
그 깊은 울림에 이시결은 피식 웃었다.
“너무 밑도 끝도 없이 공격의사를 밝히는 것 아닙니까? 뭐, 물론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모든 거미줄을 끊어냈던 이시결이 재차 거미줄을 뽑아냈다.
그 거미줄들은 조금 전과는 달리 사방으로 퍼지는 대신 허벅지에 매어뒀던 아홉 개의 비수와 시커로 향했다.
“그르륵!”
이시결이 비수들을 모두 뽑아들기도 전에 늑대가 땅을 박찼다.
하지만 덩치가 커다란 늑대인 만큼 그의 동작은 상당히 굼떴다.
‘느리군.’
이시결은 자신을 한 입에 집어삼키려는 늑대의 주둥이를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 뽑아든 시커로 눈앞에 훤히 드러난 늑대의 목을 내리찍으려는데.
훅!
이시결의 코앞에 있던 늑대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
사냥감을 놓친 이시결은 쇠사슬을 향해 거미줄을 쏘아 그것을 타고 물러났다.
늑대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있던 곳에 양 팔을 축 늘어트린 무언가 서 있었다.
나무껍질 같은 피부가 온몸을 뒤덮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웨어울프인가?’
하지만 지금까지 만났던 웨어울프들과는 형상이 달랐다.
게다가 그들은 저것처럼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시결이 잠시 그것에 대해 파악을 하는 사이, 그것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움푹 파인 눈 안의 탁한 흑색 눈동자가 이시결에게 꽂혔다.
그러더니 그것이 서서히 자세를 낮췄다.
이시결 역시 그것의 동작을 보며 다시 사냥을 재개할 준비를 했다.
‘독 주입.’
스스슥.
이시결과 연결된 모든 거미줄에 독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닥을 박차고 쇠사슬에 매달린 이시결을 향해 솟구쳤다.
탓!
하지만 이시결에게 다가온 그것은 어느새 사람만한 크기의 하이에나로 변해 있었다.
이시결은 빠르게 거미줄을 풀어 바닥으로 떨어지듯 착지했다.
콰드득!
하이에나의 이빨이 그가 매달려있던 곳의 굵은 쇠사슬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쇠사슬은 끊어지지 않았고 쇠사슬을 문 채 매달린 하이에나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 이시결에게 향했다.
이시결이 독을 주입한 비수들을 위로 쳐올렸다.
촤륵!
하이에나는 사슬을 박차며 다시 뒤로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허공에서 날렵한 표범의 모습으로 변해 바닥에 착지했다.
뒤이어 번쩍이는 섬광의 공격.
번쩍!
그 빛에 이시결은 시야를 잃었다.
하지만 그제야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이시결은 방긋 미소를 띠었다.
원형은 나무껍질 같은 사람의 형상.
개와 하이에나, 표범 등의 동물로 변할 수 있고 섬광의 마법을 사용하는 지적인 몬스터.
“구울이군요.”
자신의 정체를 간파당했음에도 구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본인의 목적에 충실하게 이시결을 죽이려 할 뿐.
시야를 잃었지만 이시결에게는 아직 감각이 남아있었다.
주변의 거미줄들을 통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표범이 느껴졌다.
이시결은 구울을 피하지 않았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
푹!
푸욱!
구울의 등으로 아홉 개의 비수가 내리꽂혔다.
놈은 허공에서 멈추어버렸고.
철퍽!
순식간에 온몸에 독이 퍼진 구울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으윽….”
모든 것이 마비된 구울의 입에서 탁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서서히 시야가 회복된 이시결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독입니다.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독이죠.”
여전히 표범의 모습을 한 구울이 힘겹게 눈을 돌려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구울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오고 있었다.
이시결은 그런 구울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까닥여 시커를 끌어당겼다.
촥!
자석처럼 손에 달라붙은 시커를 움켜쥔 이시결이 서서히 시커를 구울의 목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는 시커를 긋지 않았다.
“구울은 같은 곳을 두 번 베면 다시 회복이 된다고 하죠.”
대신 시커의 날 끝으로 표범의 목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 생명체를 만나는 건 흔치 않고요. 아깝지 않습니까?”
이시결은 여전히 마비된 채 덜덜 떨고 있는 구울을 보며 웃었다.
“한 번에 죽이기에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