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뭐죠? 왜 낫 날이….”
충격이 꽤 컸는지 이네스가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물어왔다.
하지만 누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검은 해골, 그림 리퍼가 웃음을 터트렸다.
“후하하하하! 어리석은 놈들같으니라고.”
그림 리퍼는 내리찍었던 낫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러자 내 앞쪽에 튀어나와있던 낫의 날끝이 공간 속으로 슥 사라졌다.
동시에 그림 리퍼의 손에 들린 낫은 날이 모두 원상복구 되었다.
“뭐, 뭐야, 방금? 지금 저게 우릴 공격한거야?”
니엘이 입을 쩍 벌린 채 물었다.
물론 게이트 안이라 무엇이 우리를 공격해오던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내자로 알고 있던 것에게서 받는 공격은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우릴 속인거야?”
배신감을 느낀건지 니엘이 그림 리퍼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림 리퍼가 다시 웃었다.
“흐하하핫! 난 자네들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네.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단 말이지.”
그림 리퍼가 한쪽 눈두덩이로 우리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이어 말했다.
“다만 나는 목숨을 수확하는 그림 리퍼. 내 눈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수확해야하는 사명을 가졌기에. 나의 할 일을 하려는 것 뿐일세.”
놈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휘하에서 일하는 사신 중 하나였다.
때문에 신급의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것 자체가 나에게는 불리했다.
사실 저놈만 놓고 보면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위험한건 저 낫이었다.
그림 리퍼의 낫은 공간을 갈랐다.
그렇게 가른 공간으로 사라진 낫은 본인이 원하는 곳의 공간을 가르며 그곳에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게 놈의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즉, 본인이 원한다면 제자리에 선 상태로 우리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림 리퍼를 만난 적 있습니까?”
이시결이 내게 조용히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림 리퍼를 본 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놈을 보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하지만 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리고 놈 대신.
‘크로노스를 만났었지.’
물론 그때는 크로노스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무사히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림 리퍼의 모습은 크로노스가 주던 위압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넌?”
“저도 듣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새 인형을 데려오기를 잘한 것 같군요. 놈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이시결이 슬쩍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거미줄에 조종당하고 있는 커다란 개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듯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포에 의한 떨림은 아니었다.
그것의 눈은 서늘한 빛을 내며 그림 리퍼에게 꽂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놈에게 달려들고 싶지만 이시결의 실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았다.
“윤도아 씨도 대신할 인형을 가져온 것 같은데요.”
이시결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보이지 않는 손 안에 갇힌 레버넌트를 바라보았다.
레버넌트의 난동 역시 이전보다 훨씬 거세어진 상태였다.
저들은 파수꾼이었으리라.
그림 리퍼에 대적하여 놈이 다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도록 뼈를 지키던 파수꾼.
“흐하하핫! 저것들이 날 상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겐가! 자네들은 모두 이곳에서 수확당할 운명일세!”
그림 리퍼가 다시 낫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순간, 이시결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동시에 각자 붙잡고 있던 파수꾼들을 풀어주었다.
“캬아아악!”
보이지 않는 손을 풀어주자마자, 레버넌트가 튀어나갔다.
그림 리퍼를 향해 돌진한 속도가 너무도 빨랐기에 눈에 잡히지 않았다.
커다란 개의 모습을 한 파수꾼 역시 이시결이 마리오네트를 풀자마자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개를 중심으로 섬광이 번쩍였다.
“큭! 이놈!”
그림 리퍼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역시 그 섬광에 잠시 시야가 막혔다.
나는 눈을 감고 상황을 탐지했다.
섬광을 터트렸던 커다란 개는 잽싼 표범으로 변해있었다.
밝은 섬광을 내비치며 여러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몬스터라면 구울 뿐이었다.
잠시 시야를 잃은 그림 리퍼에게 레버넌트가 달려들었다.
레버넌트가 노리는 것은 낫을 든 손이었다.
콰드득!
파수꾼들 역시 그림 리퍼의 낫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터.
“어딜 감히!”
그림 리퍼가 손 뼈를 물어뜯는 레버넌트를 다른 손으로 쳐냈다.
레버넌트의 얼굴이 뭉개지며 그림 리퍼의 팔에서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곧바로 커다란 곰으로 변한 구울이 그림 리퍼를 덮쳤다.
그림 리퍼는 곰의 무게에 눌려 비틀거렸다.
그리고 순간.
“아아아아아!”
가느다랗고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배, 밴시!”
당황한 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눈치를 채는 것을 보니 니엘과 만났던 파수꾼이 밴시인 것 같았다.
밴시의 비명을 직격으로 맞으면 잠시동안 몸에 마비가 오기 마련.
우리는 밴시의 정면에 서지 않았기에 그저 비명으로만 들을 뿐이었지만, 그것을 직격당한 그림 리퍼는 결국 구울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 버러지같은 놈들이!”
그림 리퍼가 버럭 소리쳤다.
파수꾼들의 협동 공격에 단단히 화가 난 그림 리퍼는 우리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틈에 나는 이네스와 니엘을 보며 말했다.
“물러나있어요. 웬만하면 그림 리퍼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으로. 여기 시야가 한정적인 거 알죠?”
이네스가 그럴수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이네스의 말을 막았다.
“저 낫은 위험해요. 아까처럼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몰라요. 하지만 이네스라면 그걸 파악하고 막아낼 수 있을거에요. 니엘을 좀 부탁해요.”
이네스에게는 동체시력과 민첩 스탯이 있었다. 그 둘을 잘 이용하면 그림 리퍼의 낫을 보고 피하는 것이 가능할 터.
그리고 물의 핵이라면 갑자기 튀어나오는 낫을 막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낫 자체를 물의 핵 속에 가둘 수 있으면 좋긴 하지만.’
그러려면 낫 전체가 물의 핵 속으로 들어가야했다.
잠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그림 리퍼와 파수꾼들을 바라보던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만요, 전 같이…!”
니엘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내 단호한 눈빛에 이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이전부터 니엘은 본인의 실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가능했다.
이번에도 자신이 나설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이네스와 니엘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이번에는 이시결을 향해 말했다.
“넌 알아서 해. 걸리적거리지는 말고.”
어차피 물러나있으라고 말해봤자 말을 들을 놈이 아니었다.
내 말에 이시결이 씩 웃었다.
“분부대로.”
이시결이 손에서 거미줄들을 뽑아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파수꾼과 그림 리퍼의 싸움에 집중했다.
이미 구울의 팔과 다리는 날아간 상태였고 레버넌트는 계속 찢어짐과 회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밴시는 뒤쪽에서 비명을 질러 그림 리퍼의 움직임을 가끔식 멈춰주고 있었다.
셋의 협공에 그림 리퍼의 팔 한쪽이 날아간 상태였다.
그 팔은 몸체로 돌아가기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셋의 난투극에 이리저리 치이며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며 주변의 마나를 응축시켜 마나구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네놈들의 목숨은 이미 내 것이다!”
그림 리퍼의 낫이 레버넌트의 등 뒤에서 튀어나와 그것의 등을 갈랐다.
“아아아아!”
그때 밴시의 비명이 그림 리퍼를 관통했다.
동시에 구울이 순간 마비된 그림 리퍼의 낫을 든 팔을 물었다.
레버넌트 역시 낫이 가른 자신의 등을 회복하며 그림 리퍼의 낫을 든 어깨를 물어 뜯었다.
우둑!
그림 리퍼의 관절이 뒤틀렸다.
“이놈들!”
그림 리퍼가 파수꾼들을 털어내기위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그림 리퍼를 향해 마나구를 날렸다.
피잉!
빠르게 움직인 마나구가 그림 리퍼의 팔꿈치에 닿았다.
콰앙!
폭발음과 함께 레버넌트와 구울이 나가 떨어졌다.
직접적으로 폭발을 맞은 그림 리퍼의 팔 뼈가 산산히 부서졌고 낫을 든 손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마나구가 폭발을 일으킨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뭐지?’
하지만 지금은 그걸 자세히 살피는 것보다 바닥에 떨어진 그림 리퍼의 낫을 회수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끄아아악!”
폭발에 밀려 바닥에 쓰러진 그림 리퍼가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폭발때문에 놈의 뼈들은 많이 부서진 상태였고 제 모습을 갖춘 뼈는 몇 되지 않았다.
그런 뼈를 맞추기 위해 바닥을 기던 손 뼈가 빠르게 본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밴시의 울음이 다시 그림 리퍼를 관통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염력을 이용해 그림 리퍼의 낫을 내게 끌어당겼다.
‘염력!’
스윽!
“이놈! 감히 내 낫을!”
그림 리퍼가 크게 분노하며 바닥을 미끄러져오는 낫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놈의 무기는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상황.
이제 크게 몸을 사릴 이유는 없었다.
폭발에 말렸던 몸을 모두 회복한 레버넌트가 재차 그림 리퍼에게 달려들었다.
레버넌트가 그림 리퍼의 두개골을 물었다.
이어서 절뚝거리며 그림 리퍼에게 다가간 구울이 놈의 허리뼈를 물고는.
둘은 세게 고개를 뒤틀었다.
우드득!
“끄아악!”
그림 리퍼의 목이 몸체와 분리되었다.
“이놈들! 또 다시 묶일 수는 없다!”
레버넌트의 입에 물린 그림 리퍼의 두개골이 비명을 질렀다.
구울에게 물린 몸통이 그 입에서 벗어나려 구울을 마구 발로 찼지만 구울은 꼼짝도 하지않았다.
그리고 곧, 그런 그림 리퍼의 온 몸에 이시결의 거미줄들이 연결되었다.
덜컥!
버둥거리던 그림 리퍼의 몸이 일순 멈추더니 이내 축 늘어져버렸다.
“무, 무슨 짓이냐!”
두개골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곧 이시결의 거미줄들이 두개골마저 뒤덮었다.
“인형이 말을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으으….”
강제로 움직임이 멈추어버린 그림 리퍼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레버넌트가 그림 리퍼의 두개골을 입에서 뱉어냈다.
두개골은 바닥에 떨어지는 대신 이시결의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허공에 떠 있었다.
이시결은 손가락들을 움직여 그림 리퍼의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제압은 했습니다만. 클리어 메시지가 뜨지는 않는군요.”
이시결의 거미줄에 묶인 까만 뼈가 비틀비틀 춤을 추었다.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싸움이 끝난 것을 느꼈는지 이네스와 니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저거 안내자가 아니었던거에요?”
니엘이 여전히 배신감을 느끼는 듯 춤추는 해골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내자이긴 했지. 어쨌든 저게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곳으로 모일 수도 없었을테니까.”
내 말에 니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네스는 마나구가 폭발을 일으켜 일그러지는 공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건 뭐죠?”
“아까 일으킨 폭발 때문에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아요. 빨리 여길 클리어하고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안내자는 그림 리퍼였다. 그렇다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방법은 혹시 놈이 알고 있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가 이시결에게 그림 리퍼의 입을 열어두라고 말하려는데.
“놈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
멀찍이 떨어진 채 우리를 바라보던 구울이 물었다.
그 옆에는 여전히 붉은 안광을 내뿜는 레버넌트와 밴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소멸?”
이시결이 되묻자 구울이 말했다.
“우리는 놈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너희는 놈을 소멸시킬 수 있는가.”
그림 리퍼를 소멸시키려면 뼈를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시는 합쳐지지 못하도록 뼈를 잘게 갈아버리거나, 아니면.
“저기에 넣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시결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공간이 일그러진다는 건 그곳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시결이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들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검은 뼈가 비틀거리며 일그러진 공간을 향해 걸어갔다.
절그럭.
절그럭.
그리고 곧 그림 리퍼와 일그러진 공간의 끝이 맞닿았다.
우웅—!
순식간에 놈의 뼈가 일그러진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끄으으으으!”
그림 리퍼의 두개골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시결은 그림 리퍼의 조종을 멈추지 않았다.
우우우웅!
결국 그림 리퍼의 검은 뼈들은 모두 공간의 일그러짐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흐히흐그스다!”
두개골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작게 혀를 찬 이시결은 가볍게 손을 움직여 놈의 두개골을 마저 일그러진 공간 속으로 넣어버렸다.
“안 돼! 끄아아아아!”
그림 리퍼의 처절한 비명이 순간 뚝 끊겼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레버넌트의 눈에서 붉은 섬광이 사라졌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간이 시험이 완료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싱겁군요.”
이시결이 조금 실망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안도했다.
‘아무도 죽지 않았어.’
회귀 전 간이 시험을 치른 각성자들은 그림 리퍼의 낫에 당했거나, 혹은 놈을 소멸시키지 못해 이 공간에 갇혀 또다른 파수꾼이 되었을 확률이 컸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네스가 나와 이시결을 보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니엘이 조금 쳐진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따라왔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을 하고 있으리라.
“이제 빨리 돌아가죠.”
일그러짐은 점점 공간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출구가 열립니다.]
마침 안내문과 함께 일그러진 공간 반대편에 출구가 나타났다.
우리는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니엘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밴시와 레버넌트, 그리고 구울이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감사한다.”
구울의 짤막한 말에 이어 밴시가 손을 흔들어보였다.
파수꾼들은 이곳에서 그림 리퍼처럼 공간의 일그러짐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니엘은 가만히 밴시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가요, 빨리.”
출구 앞에 선 우리가 밖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갑자기 이시결이 나를 옆으로 확 밀어냈다.
“!”
잽싸게 균형을 잡은 나는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림 리퍼의 낫이 움직이고 있었다.
부웅!
서걱!
낫은 크게 휘둘러져 눈앞에 열려있던 출구를 베어냈다.
그 앞에 서있던 니엘, 이네스와 함께.
툭!
털썩!
니엘과 이네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흐르는 붉은 피.
“흐하하하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내는 것은 게이트와 함께 각성자들을 베어낸 그림 리퍼의 낫이었다.
“너희 역시 이곳에서 소멸되리라.”
짤막한 말을 남긴 낫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내렸다.
툭!
그리고는 바스스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
나는 바닥에 흥건하게 번져오는 피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한 순간이었다.
니엘과 이네스는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놈을 소멸시켰다고 안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 낫에 놈의 사념이 남아있을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내가 잘못….’
그때 뭔가 내 팔을 덥썩 붙잡았다.
“윤도아 씨. 정신 차려요.”
이시결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 역시 배를 크게 베인 것을 알아차렸다.
“너…!”
내가 그의 앞에 주저앉아 상처를 살피려했지만 이시결은 내 손을 밀어냈다.
“그것보다 출구가 함께 잘렸습니다.”
“…출구?”
이시결의 말대로 열려있던 출구는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림 리퍼의 낫이 공간을 베어내면서 출구까지 잘라버린 것 같습니다.”
출구는 다시 생성되지 않았다.
나는 그림 리퍼의 낫에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정말 그림 리퍼의 말대로 이곳에서 소멸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한 번 살릴 수는 있었지만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이시결이 나를 밀지 않았다면. 나 역시 저 낫에 베여 니엘과 이네스와 함께 영문도 모른 채 죽었을 터.
“이런 몸으로는 윤도아 씨를 죽일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
이시결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는 배를 붙잡은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도 곧 일그러질겁니다.”
그의 말대로 공간의 일그러짐이 주변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다.’
나는 나라의 예지를 떠올렸다.
게이트는 클리어했지만, 정말, 말그대로.
이 게이트에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출구가 없는 게이트를 벗어날 방법은 딱 하나.
하지만 그 방법은 지금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제길.’
공간의 일그러짐은 순식간에 나와 이시결을 뒤덮었다.
* * *
[고양이 신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고양이의 목숨은 9개]
[두번째 목숨이 차감됩니다]
[남은 목숨은 7개입니다.]
[선택한 시간으로 회귀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