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12월 31일.
간이 시험의 게이트가 열린 날.
회귀를 한 번 했음에도 여전히 게이트의 정보는 볼 수 없었다.
‘아이템이 바뀐 것이 아니니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찝찝함은 사라진 상태였다.
이미 그 안에서 한 번 죽음을 겪었고, 이제는 놈을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알고 있으니까.
나는 우리를 배웅나온 안세인, 김지석과 이전과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도빈이에게 다가갔다.
“갔다올게.”
지난번에는 내 말을 지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제 밤, 이전과는 다르게 권재경과 나라가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나라의 예지에 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덕분에 이번에는 간이 시험을 클리어하고 돌아올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조심해.”
도빈이가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은 후 도빈이에게서 몸을 돌렸다.
“잘 다녀와요, 누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신교진과 주선오가 차례로 내게 인사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니엘과 이네스,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먼저 게이트의 안으로 입장했다.
* * *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역시나 휑한 공간에 묶여있는 검은 뼈였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있는 붉은 안광의 레버넌트.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길을 안내 받으려면 저놈을 풀어줘야해.’
이곳은 보이지않는 구조물들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탐지로는 공간을 감지할 수 있었기에 이동하는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로 본체를 찾아 나섰다가는 길을 잃을 확률이 컸다.
게다가 나 혼자 길을 찾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 다른 각성자들이 보기에는 이 상황을 예측했다는 것에서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특히 이시결.’
니엘이야 워낙 날 믿고 따르기에 그냥 굉장하다고 치켜세우며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이네스는 의심하겠지만 그걸 크게 문제삼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시결은 달랐다.
니엘과 이네스는 다른 나라에서 활동했지만 이시결은 같은 나라, 게다가 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 번 의심을 사기 시작하면 놈은 계속해서 나를 관찰할테고 그랬다가는 내가 회귀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챌지도 몰랐다.
‘그건 절대 안 되지.’
나는 살짝 고개를 내저은 후 나를 경계하는 레버넌트를 바라보았다.
놈을 제압할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싸움을 벌여 힘을 뺄 필요도 없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레버넌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놈의 양 옆으로 보이지 않는 손을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손.’
놈이 가만히 멈추어있는 지금이야말로 놈을 잡기에 가장 편한 상황.
나는 가볍게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덥썩.
레버넌트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못한 채 내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낸 공간 안에 갇혀버렸다.
“…….”
레버넌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지만 무언가 막혔다는 느낌을 받은 탓이리라.
곧 레버넌트는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보이지 않는 손을 벗어날 수 있을리는 없었다.
나는 그런 레버넌트를 내버려둔 채, 검은 뼈를 향해 걸어갔다.
내게 손짓을 하던 그림 리퍼의 팔 뼈가 곧 쇠사슬을 가리켰다.
‘한 번 반응 좀 볼까.’
나는 뼈를 바라보며 허리 뒤에 차고 있던 심연의 불꽃을 꺼내들었다.
이전에는 뼈의 반응을 살피지 않아 몰랐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순간적으로 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표정을 나타내는 머리가 없었기에 확신할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심연의 불꽃을 보고 긴장을 한 것 같았다.
‘쉽게 잡을 수 있겠어.’
속으로 웃음을 감춘 나는 심연의 불꽃을 이용해 뼈를 묶고 있는 쇠사슬에 가져다대었다.
치이이익!
서걱.
쇠사슬이 심연의 불꽃의 불에 녹아내리다가 잘려나갔다.
나는 쇠사슬이 풀리며 떨어지는 뼈를 염력으로 붙잡았다.
“안내.”
그러자 뼈가 검지 손가락을 세워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나는 레버넌트를 쥔 보이지 않는 손을 함께 움직이며 그림 리퍼의 본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먼 거리는 아니었다.
잠시 후 나는 뼈의 안내에 따라 그림 리퍼의 본체가 있는 공터에 도착했다.
“오, 여길세. 여기야.”
텁텁한 그림 리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떨어져있던 반 쯤 깨진 해골.
나는 놈을 보고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첫 번째 시험에서 만났던 오만의 그리폰처럼 나를 직접적으로 죽게 만든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내 목숨을 깎아먹는데에 일조한 놈.
그런 놈에게 다시 한번 죽음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 꽤나 기뻤다.
내 염력으로 허공에 떠 있던 팔 뼈가 본체를 조립하러 가기위해 버둥거렸다.
내가 팔을 놓아주지 않자 해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왔으면 내 팔을 좀 놓아주지 않겠나? 그게 있어야 내가 본모습을 찾을 수가 있어서 말이지.”
잠시 두개골을 바라보던 나는 곧 팔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팔이 후다닥 본체로 기어가 뼈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고맙네, 고마워. 내 팔 뼈를 가져다 준 것에 대한 사례는 톡톡히 해주겠네.”
‘뻔뻔하기는.’
놈의 사례가 우리들의 목숨을 수확해가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일단 놈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속셈을 드러내기 전에 놈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나는 놈의 팔 뼈가 뼛조각들을 맞추는 것을 지켜보며 다른 각성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두 번째로 도착한 것은 이시결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개의 형태를 한 구울을 타고 나타났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표정은 그닥 좋지 못했다.
이시결을 안내한 그림 리퍼의 다리가 본체에 연결되는 사이, 이시결에게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개의 등 위에서 가볍게 내려선 이시결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 분부때문에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지만 충분히 가지고 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틀 전 연구소 앞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때문인 듯 했다.
나는 니엘과 이네스, 이시결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당부했었다.
계획대로라면 나 혼자 입장하려고 했던 게이트였다. 하지만 그들이 억지로 따라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확실히 내 통제에 따라달라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가 안의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었다.
애매한 말이었지만 다들 내 말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안에서 만나는 몬스터를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는 걸.
그림 리퍼를 잡으려면 파수꾼들의 도움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그림 리퍼의 눈길을 끌어줘야 우리가 안전하게 그림 리퍼를 처리할 수 있으니까.
이시결은 내 말을 잘 파악했고 때문에 구울을 괴롭히지 못해 심통이 난 것이리라.
그렇기에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이곳에 도착한 것이고.
“흐하하핫, 자네들 참 실력이 좋구만. 따로 떨어져있기야 했지만 그놈들을 잡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을텐데 말야.”
다리를 이어붙인 그림 리퍼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별로 재미 없었습니다.”
이시결이 손 끝에 연결된 거미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마리오네트가 된 구울은 형체를 갖춰가는 그림 리퍼를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런 구울을 바라보던 이시결이 씩 웃으며 그림 리퍼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제 인형이 그쪽에게 꽤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풀어놔도 되겠습니까? 왠지 그쪽 뼈를 던져주면 잘 물어오기도 할 것 같고요.”
금세 이시결의 관심이 그림 리퍼에게 옮겨간 듯 했다.
“흐하하하! 내 뼈를 던져주면 물어온다고? 그거 나름대로 재미있는 발상이구만.”
그림 리퍼가 이시결의 말을 재미있는 농담으로 치부하며 태평하게 웃어제꼈다.
이시결이 마리오네트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더라면 정말로 실행에 옮겼을 텐데. 그 광경을 보지 못해 조금 아쉽긴 했다.
“아, 차라리 그쪽을 마리오네트로 만드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그쪽을 조종해서 같은 곳을 베어내면 회복하는 구울과 싸워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만.”
중얼거린 이시결이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내게 허락을 구하려는 것 같았다.
그 역시 꽤 솔깃한 이야기이긴 했다.
이시결이 마리오네트로 그림 리퍼를 조종한다면.
파수꾼의 도움 없이 쉽게 놈을 처리하는 것이 가능할 터.
하지만 나는 그의 정보를 살펴보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가진 마리오네트 스킬의 레벨은 겨우 2레벨. 그정도로 그림 리퍼를 조종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쉽군요. 테스트해보고 싶었는데.”
이시결도 확신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내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으리라.
잠시 후, 밴시의 손을 잡은 니엘이 나타났다.
“앗, 도아 언니! 찾았다!”
니엘은 내게 손을 크게 흔들어보였다.
그리고는 옆의 밴시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저기 저 사람, 보이지? 저 사람이 다 해결해줄테니까 울지만 말아줄래, 제발?”
니엘 역시 내 말을 잘 이해하고 밴시를 잘 설득해서 데려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니엘은 지난번에는 밴시의 울음을 들었을지도 몰랐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표정이 좋지 않았고 자꾸 뒤를 돌아보며 밴시를 확인하던 행동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아직 밴시가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와, 저 뼈는 뭐래요? 혹시나 했는데 진짜 뼈들이 모여있네.”
니엘이 그림 리퍼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사이, 밴시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그리고는 내 뒤의 보이지 않는 손에 갇힌 레버넌트를 보고 이시결의 거미줄에 메어있는 구울을 확인했다.
우리가 그림 리퍼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중이리라.
이내 밴시는 울음을 터트리는 대신 니엘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뒤로 숨어버렸다.
‘통과인가보네.’
곧이어 먼 거리에서 여러가지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다그닥, 다그닥.
절그럭. 절그럭.
쿵쿵거리는 소리는 마지막 남은 그림 리퍼의 다리 한 짝이 뛰어오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쇠의 마찰음 소리는 아마도 이네스와 만났던 파수꾼의 것이리라.
“흐하핫! 남은 다리가 마저 오는구만, 그래!”
그림 리퍼가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곧 우리의 시야 끝에서 그림 리퍼의 다리 한 짝이 튀어나왔고 그 뒤를 이어 말을 끌고 있는 기사가 나타났다.
기사는 한 손에는 말의 고삐를 잡은 채 말을 이끌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부서진 랜스를 들고 있었다.
그런 기사에게는 목이 없었다.
‘듀라한이었어.’
유일하게 만나지 못했던 파수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아하니 듀라한과 이네스는 자우스트로 승부를 가린 것 같았다.
보통 자우스트는 3합 안에 결판이 난다.
이네스 역시 내가 사전에 했던 말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 결과 듀라한을 제압만 하고 죽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승리를 거두었기에 듀라한은 승자인 이네스를 자신의 말에 태워 이곳까지 모셔온 것이리라.
“우와….”
니엘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 위에 도도하게 앉아있는 이네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듀라한은 말의 고삐를 놓고 이네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네스는 가볍게 듀라한의 손을 붙잡고는 말 위에서 내려섰다.
듀라한은 곧 몸을 돌려 그림 리퍼 쪽을 향했다.
머리가 없었기에 그가 정확하게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역시 파수꾼.
목표는 그림 리퍼이리라.
그림 리퍼는 어느새 자신의 뼈조각을 모두 조립한 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흐하하하! 고맙네, 고마워. 이렇게 다들 모여서 내가 본모습을 찾은 것을 축하해주다니 말야.”
아무도 축하인사 따위를 건네지는 않았다. 오히려 파수꾼들은 놈을 죽일듯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 리퍼는 그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전히 묶여있는 자신의 낫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이거까지 마저 풀어주지 않겠나?”
“뭐야? 염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니엘이 버럭 외쳤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니엘을 지나쳐 낫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지 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흐하하하, 이거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구만.”
그림 리퍼가 호탕하게 웃으며 낫을 향해 다가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낫의 앞에 선 채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낫은 거대했다.
아무래도 그림 리퍼의 본체와 비슷한 정도의 크기이다보니 내가 붙잡고 휘두르기에는 꽤 무리가 있어보였다.
나는 낫을 묶고 있는 사슬을 잘라내기위해 심연의 불꽃을 꺼내들었다.
그림 리퍼는 심연의 불꽃을 보며 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놈의 시선은 심연의 불꽃에 꽂혀 있었다.
‘겁이 나긴 하는 모양이지.’
피식 웃은 나는 심연의 불꽃을 이용해 쇠사슬들을 잘라내었다.
치이이익, 서걱.
서걱.
그리고 잠시 후, 쇠사슬에서 해방된 낫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염력으로 받아들자, 그림 리퍼의 낫이 허공에 우뚝 멈추어 섰다.
“흐하하하하, 고맙네, 고마워. 이제 그걸 나에게 주지 않겠나?”
그림 리퍼가 내게 한 발짝 다가오며 길쭉한 손 뼈를 내밀었다.
나는 그림 리퍼의 낫을 내 뒤로 이동시켰다.
그리고는 놈을 보며 씩 웃었다.
“싫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